교도소 내에서 헤일에 대한 신경검사와 심리검사가 시행되었다. 검사 담당자는 헤일에 게 "억압이나 명백한 정신이상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지극히 사악한 요소들이 그의 기질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헤일은 문명인의 껍데기로 야만성을 감춘 채,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나라를 일구는 데 기여한 미국의 개척자 행세를 했다. 검사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뻔히 드러난 죄를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의 형편없는 판단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의 정서는 적절하지 않다. 그가 혹시 수치심이나 후회를 느꼈다 해도, 이미 그런 감정들을 잊어버렸다." 화이트는 헤일의 심리를 분석한 검사자의 글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과학을 뛰어넘는 사악함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헤일은 교도소 규정을 잘 따르면서도 계속 석방을 도모했다. 항소심을 맡은 법원에 뇌물을 주려고 시도했다는 말도 있었다. 이런 노력이 실패한 뒤에도 그는, 검사 담당자가 보고서에 썼듯이,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통해 석방 될 가능성이 높다"고 자랑했다. - P322
몰리의 인생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녀와 오세이지족은 부패한 후견인 제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줄곧 투쟁한 끝에 1931년 4월 21일 법원으로부터 몰리가 더 이상 주정부의 피후견인이 아니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법원은 또한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판결한다. 오세이지 분할 토지 285번 소유주인 상기 몰리 버크하트는 (…)이로써 법적인 능력을 회복할 것이며, 따라서 그녀에게 법적인 능력이 없다고 판결한 명령은 철회된다." 몰리는 마흔네 살에야 비로소 자신의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온전한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 P323
후버는 곧 수사국과 동의어가 되었다. 대통령이 몇 번이나 바뀌 었어도, 그는 예전과 달리 허리가 굵어지고 불도그처럼 턱살이 늘어진 모습으로 계속 자리를 지켰다. "시선을 들어 보니 저 멀리 높고 조용한 발코니에 J. 에드거 후버가 있었다. 그는 대통령이 바뀌어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그의 안개 왕국을 등 뒤에 두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잡지 〈라이프〉의 기자가 쓴 글이다. 후버의 권력남용 실태는 1972년에 그가 세상을 떠 난 뒤에야 밝혀졌다. 화이트는 눈치가 빠른 편인데도 보스의 과대 망상증, 수사국의 정치화, 그가 공공의 적으로 점찍은 사람들에 대한 편집증 환자 같은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점점 늘어나기만 하던 후버의 공공의 적 명단에는 미국 인디언 활동가들도 포함되었다. - P330
포허스카에도 버려진 건물들이 가득하다. 그래도 포허스카는 아직 도시로서 남아 있기는 하다. 지금은 이런 도시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현재 포허스카에는 3,600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학교도 있고, 법원도 있다(어니스트 버크하트의 재판이 열린 바로 그곳이다). 맥도널드를 포함한 식당도 여러 곳 있다. 또한 포허스카는 여전히 활기찬 오세이지족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오세이지족은 2006년에 자기들만의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다. 현재 2만 명 규모인 오세이지족은 자체적인 투표를 통해 구성한 정부도 갖고 있다. 대다수의 오세이지족은 오클라호마주와 미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오세이지 카운티에도 약 4,000명이 남아 있다. 오세이지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루이스 F. 번스는 자기 부족이 "갈기갈기 찢어진" 뒤 "과거라는 재 속에서" 다시 일어났다고 말했다. - P342
이 박물관에서 가장 극적인 사진 하나가 전시실 한 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1924년에 어떤 행사에서 찍은 이 파노라마 사진에 는 오세이지 부족원들과 이 지역의 저명한 백인 사업가들, 지도자들이 모두 있었다. 이 사진을 훑어보면서 나는 한 부분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마치 누가 가위로 잘라낸 것 같았다. 레드 콘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에 전시하기에는 너무 고통 스러워서요."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사진의 빈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악마가 바로 저기에 서 있었거든요." 그녀는 잠시 사라졌다가 사진에서 사라진 부분을 가지고 돌아왔다. 조금 흐릿해진 작은 조각 속에서 윌리엄 K. 헤일이 차가운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세이지족이 그의 모습을 잘라낸 것은 대다수 미국인들처럼 그 살인사건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 P344
역사연구가인 번스는 언젠가 이런 글을 썼다. "오세이지족이 그런 시련 속에서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남았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우리가 그때 어떻게든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한 것들은 그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더욱 소중해졌다. 사라진 것들은 바로 예전 우리의 모습이므로 역시 귀중하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모아 우리의 존재 속에 깊숙이 보존해두고 내일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우리는 지금도 오세이지족이다. 우리는 선조들을 위해 노년에 이를 때까지 살아간다." - P346
그해 말에 어니스트 버크하트가 가석방되었다. 오세이지 부족위 원회는 결의안을 통해 "그토록 사악하고 야만적인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범죄현장에 다시 자유로이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항의했다. <캔자스시티 타임스>는 사설에서 이렇게 지적했 다. 오클라호마주 교도소에서 어니스트 버크하트가 가석방되면서 남서부의 역사상 아마도 가장 대단한 살인사건, 즉 오세이지족 인디언들이 석유와 관련된 권리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한 사건을 되새기게 되었다. (…) 그 냉혹한 음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범 인이 종신형 중 고작 10여 년을 복역한 뒤 석방되었다는 사실에서 가석방 제도의 고질적인 약점 중 하나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 P350
마지는 어니스트가 석방된 뒤 어떤 오세이지족의 집에 침입해 강도짓을 하는 바람에 다시 감옥에 갇혔다고 말했다. 1947년에도 어니스트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으나, 헤일은 리븐워스에서 20년을 복역한 뒤 석방되었다. 가석방 위원회의 관리들은 헤일의 나이(일흔두 살)가 고령이라는 점과 모범적인 복역기록을 감안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오세이지족의 한 지도자는 헤일이 "저지른 죗값으로 교수형을 당해야 마땅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오세이지 부족원들은 가석방 위원회의 결정이 헤일의 정치적 영향력의 마지막 흔적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다시 오클라호마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그의 친척들에 따르면 그가 그들을 찾아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망할 놈의 어니스트만 입을 다물었다면 우리는 지금 부자가 됐을 거야."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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