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했소!" 수도원장은 진심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원대한 목적에 몰두하고 있는 영혼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아니 되지. 부수도원장에게는 그 젊은 형제를 순례에 참여시키기로 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시오. 일단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뒤에 다른 곳을 곁눈질하는 이들에게 무척 엄격한 사람이니까. 그것은 그 나름의 꺾을 수 없는 확신이라오."
"그렇지만 수도원장님, 우리 모두가 타고날 때부터 성직자의 운명을 받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다른 일을 함으로써 세상에 더욱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맞는 말이오!" 수도원장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띠며 캐드펠 수사 자신 또한 종종 곱씹는, 그러나 쉽게 잊히곤 하는 난제에 대해 생각했다. "고백하자면, 나도 의문을 품은 적이 있지. 이제는 다 끝난 얘기지만······. 어쨌든 좋소. 그 젊은 형제의 이름을 알려주시오. 그를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이오." - P46

"저는 성인들이 스스로에게 영광을 바치기를 요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휴 신부는 겸손하게 말을 이었다. "성인 들은 당신들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바치는 분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번 일에 관해서도 위니프리드 성녀의 뜻이 어떠하실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과 교단이 성녀께 올바른 영광을 바치고자 한다는 것은, 물론 아주 훌륭한 생각이긴 합니다만, 성인의 뜻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더욱이······ 이 축복받은 성녀께서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조용하고 기적적인 수도 생활을 하셨지요. 그분은 이곳에서 두 번이나 돌아가셨고, 결국 이곳에 묻히셨습니다. 비록 제 교구민들이 약하고 죄 많은 사람들이라 그분을 합당하게 섬기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들 위니프 리드 성녀께서 자신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웨일스에서는 그것만으로도 한 성인에게 바치는 경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왕자님과 주교님께서는—물론 저야 그 두 분께 합당한 존경을 표합니다만—성녀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그 유골이 잉글랜드로 옮겨질 경우 이곳 교구민들의 기분이 어떠할 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그분들께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만, 그 유골이 어디에 안치되어 있건 성인은 성인이십니다.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귀더린 주민들은 이런 일을 결단코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 P58

그들은 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에서 헤어졌다. 건너편 골짜기 기름진 농토에서는 아직도 수소와 팀을 이룬 사람들이 두 번째 밭을 갈아엎는 중이었다. 하루에 밭뙈기 둘이라니, 엄청난 노동이었다.
"부수도원장께서 조금만 현명하시다면 아까 본 그 젊은 형제로부터 교훈을 얻으실 수 있을 텐데요." 이리엔 신부는 캐드펠을 두고 떠나면서 말했다. "이런 마을에서는 재촉하기보다 한발 앞장서서 구슬리는 편이 더 좋은 성과를 얻는 법이지요. 하긴, 굳이 형제에게 이런 얘길 할 필요는 없겠군요. 형제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웨일스 사람이니까." - P64

캐드펠은 잘생긴 젊은이와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길을 피해 그곳을 떠났다. 소녀는 한동안 수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소몰이 청년이 강을 건너 둑으로 올라오자 반갑게 그에게로 달려갔다. 캐드펠이 무엇을 보고 깨달았는지 아마 소녀는 정확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주어 무척 안심했으리라. 수놓은 가운을 입은 웨일스의 지체 높은 아가씨가 이 혈족 사회에서 땅도 뿌리도 없는 이방인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사실을 숨겨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친족 관계가 없는 사람은 살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곳이었다. 제아무리 유쾌하고 잘생긴 젊은이라 할지라도, 제아무리 일을 잘하고 가축을 다루는 데 능숙한 젊은이라 할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캐드펠은 숲에 가려져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두 남녀는 기쁨에 겨워 꼼짝도 안 하고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직은 수줍은 사이인 듯 서로 몸이 닿지 않을 만큼 떨어진 채였다. 캐드펠은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 P70

"수사님도 아시겠지만, 객지 사람이 웨일스에서 살아간다는 게 좀 힘든 일입니까?"
캐드펠도 잘 알고 있었다. 주민들 모두가 같은 지방에서 태어나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과 잘 알고 지내는 곳, 모든 인간관계가 토지에 기반하며 마을에서의 지위가 자유 지주와 농노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곳에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객지 사람은 어느 곳에도 정착할 기반을 마련할 수 없었고, 따라서 삶의 근거 자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이가 스스로의 삶을 확립하는 유일한 방법은, 거처와 일굴 땅을 내주고 그가 가진 기술을 써줄 지주를 만나 계약을 맺는 길뿐이었다. 이 계약은 3대까지는 언제라도 양쪽 당사자에 의해 해지할 수 있었고, 계약이 해지될 경우 객지 사람은 삶의 기회를 부여해준 지주와 소유물을 공정히 분배한 뒤 떠날 수 있었다. - P83

"우리가 귀더린에 가져온 문제 말고도, 이 마을에는 이 마을 나름의 문제가 있는 모양이구먼." 카이와 헤어지면서 캐드펠은 말했다.
"하느님께서 시간을 두고 그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겠지요."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긴 채 카이는 어둠 속으로 터벅터벅 멀어져갔다. 캐드펠은 심란한 기분으로 오솔길을 걸었다. 그래, 하지만 반대로 하느님이 간혹 약간의 도움을 구할 때면 인간은 대개 훼방만 놓지. - P86

수십 명의 목소리가 동조하며 자신들이 품은 분노의 맥락을 정확히 짚어낸 이 대변인에게 환호를 보냈다. 게다가 교회 중에서도 오랜 전통을 지닌 켈트인들의 성스러운 교회, 세속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고 왕권의 환심을 사려 하지도 않으며 속세로부터 물러나 명상과 기도라는 축복받은 고독에 파묻힌 이 교회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가. 사람들의 속삭임은 억제된 웅성거림으로, 천둥 같은 고함으로, 포효로 점점 커져갔다.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그 외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도 목소리를 높여 맞고함을 질렀으나 현명한 대응은 아니었다. - P96

웅변과 논증에서 그만한 적수를 만나다니, 로버트 부수도원장에게는 그야말로 생애 최악의 타격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야만인이나 다름없는 웨일스인 지주, 그것도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영주도 아닌 평범한 지주에 불과한 인물 아닌가. 저 무수한 열등한 인간들과 견주어 겨우 조금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인 보잘것없는 자. 적어도 이 노르만인의 시선으로 볼 때는 그랬다.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지위와 계급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리샤르트는 혈연관계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이었다. 그 혈연 관계에 속하는 이라면 누구든 가족 속에 서로의 자리를 가질 뿐, 그 어떤 사람도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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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비는 집중력 면에서 "차이가 매우 뚜렷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을 받자 사람들의 집중력이 크게 개선된 것이다. 시그네는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돈과 관련된 문제가 집중에 매우 나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경제 상황을 걱정해야 한다면··· 뇌가 가진 능력의 상당 부분이 거기에 쓰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으면 다른 것들을 생각할 능력이 생기죠." - P284

다른 많은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도를 했다. 실험의 내용은 무척 다르지만 계속해서 비슷한 결과가 나오고 있다. 1920년대 영국에서는 W. G. 켈로그(시리얼 제조업체 창립자)가 하루 근무시간을 여덟 시간에서 여섯 시간으로 줄였고, 작업 중 사고(집중력을 측정하는 좋은 기준)가 41퍼센트 줄었다. 2019년 일본에서는 마이 크로소프트가 주4일 근무를 도입했고 생산성이 40퍼센트 개선되었다고 보고했다." 같은 시기 스웨덴 고센버그에서는 한 요양원 이 임금을 줄이지 않고 하루 근무시간을 여덟 시간에서 여섯 시간으로 줄였고, 그 결과 직원들은 수면 시간이 늘고 스트레스가 줄었으며 병가를 더 적게 냈다. 같은 도시에서 토요타는 하루 근시간을 두 시간 줄였고, 그 결과 정비공의 생산성이 114퍼센트로 높아졌으며 이윤이 25퍼센트 늘었다. - P297

우리는 더 빨리 걷고 더 빨리 말하고 더 오래 일하라고 명령하는 문화에 살며, 바로 거기서 생산성과 성공이 나온다고 생각하게끔 배웠다. 그러나 이곳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요. 우리는 속도를 줄일 것이고, 휴식과 집중을 위한 공간을 더 많이 마련할 겁니다. - P299

현재 이 같은 결정은 우리 대다수에게 불가능한 사치처럼 보인다. 사람들 대부분은 속도를 늦추지 못하는데, 그렇게 하면 일자리나 사회적 지위를 잃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인의 56퍼센트가 1년에 단 1주일의 휴가를 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사람들에게 집중력 개선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한 번에 하나씩만 하고, 더 많이 자고, 책을 더 많이 읽고, 딴생각하기)을 말하는 것이 그토록 쉽게 잔혹한 낙관주의로 변질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서는 그런 것들을 실천할 수 없다. 그러나 꼭 이런 식일 필요는 없다. - P299

20세기 중반에 신선 식품은 미리 조리된 가공식품으로 급속히 대체되었고, 이 가공식품은 슈퍼마켓에서 구매해 데워 먹을 수 있도록 제조되었다. 이러한 음식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산해야 했다.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서 상하지 않도록 각종 안정제와 방부제를 쏟아부었고, 이러한 가공 절차에서 수많은 영양 성분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P314

니컬러스를 만나기 전에는 그가 이러한 결과를 특정 방식으로 정당화할 것이라 생각했다. 수많은 의사가 주의력 문제를 겪는 자 녀들의 부모에게 하는 말, 즉 집중력 장애는 생물학적 원인에서 비롯되므로 약물을 이용한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리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니컬러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이 여정이 시작된 지점, 바로 끙끙이를 하던 말에서 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야생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말은 지금껏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건 말들을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가두는 ‘가축화‘의 문제예요. 말들이 마구간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초기에 그런 심리적 압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끙끙이를 하게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 P343

니컬러스가 이 말들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표현 하나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말들이 "생물학적 목적의 좌절‘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말은 돌아다니고 달리고 풀을 뜯고 싶어 한다. 이런 타고난 본성을 표현할 수 없을 때, 말들의 행동과 집중력은 망가지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니컬러스는 "생물학적 목적을 좌절시키려는 압력이 너무 심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이 파괴적인 심리 압박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완화해줄" 행동을 뭐든 찾게 된다. "야생말은 자기 시간의 60퍼센트를 풀을 뜯는 데 씁니다. 그러니 말에게 해방감을 주는 행동 중 하나가 일종의 가짜 풀 뜯기인 끙끙이라는 사실도 놀라운 일은 아니죠." - P343

니컬러스는 ‘주코시스zoochosis (동물원과 정신질환psychodis의 합성어로,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이상 증세를 가리킨다)‘라 불리는 증세를 보이는 동물에게 약물을 처방하는 자신의 접근법이 몹시 제한적인 해결책임을 스스럼없이 인정했다. 예를 들어 나는 그에게 북극곰에게 약을 먹여서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물었다. "아니요." 니컬러스가 대답했다. "그건 반창고를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북극곰을 북극에서 끌어내 동물원에 가둔 것이에요··· 자연에서 북극곰은 북극 툰드라를 몇 마일씩 걸어 다닙니다. 물개들이 있는 곳을 찾아서 수영을 하고 물개를 먹죠. 전시장[북극곰이 갇혀 있는 동물원 우리]은 실제 삶과 전혀 같지 않아요. 그러니 곰들은 감옥에 갇힌 수감자처럼 진짜 삶을 부정당한 내면의 고통을 달래려 서성이는 겁니다··· 곰들에게는 본능이 있어요. 그 본능은 생생히 살아 있는데, 쓸 수가 없습니다." - P344

니컬러스 혼자서는 그런 세상을 불러올 수 없다. 그는 이러한 장기적인 해결책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내게 물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논의했다. 나는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이해는 가지만 본능적으로 불편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동물들이 문제 행동을 보이는 것은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말 포커는 갇혀 있는 것이 싫었고, 비글 에마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싫었다. 말은 본래 뛰어다녀야 하고, 개는 본래 무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동물들이 보내는 신호를 그가 약물로 덮어버림으로써 주인들에게 일종의 환상을 불어넣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되었다. 한 생명체를 데려다가 그 본성을 무시하고, 동물의 필요가 아닌 주인인 자신의 필요에 맞는 삶을 살게 할 수 있다는, 그러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을 수 있다는 환상 말이다. 우리는 동물의 고통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P345

사미는 보통 사람들이 어떤 아이가 ADHD 진단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폐렴 진단을 받은 것과 비슷할 거라 상상한다고 했다. 이 경우 의사는 숨어 있던 병원균이나 질병을 확인하고, 그 신체적 문제를 해결할 무언가를 처방한다. 그러나 ADHD는 의사가 실시할 수 있는 신체검사가 없다.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 본인 및 그 아이를 아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아이의 행동이 정신과 의사가 작성한 점검표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게 다다. 사미는 이렇게 말한다. "ADHD는 진단이 아닙니다. 이따금 동시에 발생하는 특정 행동들의 묘사일 뿐이에요. 그게 전부입니다." 아이가 ADHD를 진단받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아이가 잘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그 말은 ‘왜‘라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아이가 기침을 한다는 말을 듣고 실제로 아이의 기침 소리를 들은 뒤, ‘그렇군요, 아이는 기침을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의사가 아이에게서 집중력 문제를 확인한다면, 그것은 진료 과정의 끝이 아니라 첫 단계여야 한다. - P350

스트레스가 심한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가 집중력 문제를 겪을 확률이 더 높은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네이딘 버크 해리스를 통해 알게 된 모든 내용을 떠올렸다. 앨런은 여기에 네이딘의 연구 결과와 양립하는 또 다른 층위의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속이 상하거나 화가 나면 자신을 달래주고 진정시켜 줄 어른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위로받는 경험을 충분히 하고 나면, 시간이 흘러 성장할수록 혼자서 자신을 달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가족이 주었던 안심과 이완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쌓인 부모는 자기 잘못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녀 달래기를 힘들어하는데, 본인이 너무 흥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들의 자녀도 중심을 잡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그들의 자녀는 화를 내거나 괴로워하는 방식으로 힘든 상황에 대처할 확률이 높아지고, 분노와 괴로움은 집중력을 망가뜨린다. - P353

다른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이 약물들의 긍정적 효과가 (실재하긴 하지만) 놀라울 만큼 제한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뉴욕 대학의 소아청소년 정신의학 교수인 그자비에 카스테야노스는 각성제 효과에 관한 훌륭한 연구에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각성제는 반복을 요구하는 작업에서는 어린이의 행동을 개선하지만, 학습 능력은 개선하지 못한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러다 각성제 처방의 지지자들이 ADHD 연구의 황금률로 제시한 연구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다. 14개월간 각성제를 복용한 아이들은 시험에서 1.8퍼센트 나은 결과를 보였다. 그러나 같은 기간 행동 지도만 받은 아이들도 1.6퍼센트 개선된 결과를 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증거에 따르면 초기에 나타나는 각성제의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성제를 복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내성이 생긴다. 몸이 약물에 익숙해져서 똑같은 효과를 내려면 복용량을 늘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어린이에게 허용된 최대 복용량에 다다르게 된다. - P360

그래서 제이는 여러 연구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설명해줄 유전자 이외의 다른 요인이 있다고 말했다. "일란성쌍둥이가 이란성 쌍둥이보다 훨씬 비슷한 행동을 유발하는 환경에서 성장한다는 사실"로 그러한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다. 일란성쌍둥이의 집중력 문제가 유사하게 발생하는 이유는 이들의 유전자가 더욱 유사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생활이 더욱 유사해서일 수 있다. 만약 집중력 문제를 일으키는 환경 요인이 있다면, 일란성쌍둥이는 똑같은 정도로 그 요소를 경험할 가능성이 이란성쌍둥이보다 높다. 그러므로 제이는 "쌍둥이 연구는 유전자와 환경의 잠재적 영향을 구분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즉 우리가 자주 듣는 통계 수치(예를 들면 ADHD의 75-80퍼센트가 유전적 문제라는 것)가 믿을 수 없는 토대 위에 있다는 뜻이다. 제이는 이러한 수치가 "사람들을 호도하며,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말한다. - P364

그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오래된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강가에 있다가 시체 한 구가 떠내려오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하죠. 사람들은 시체를 건져서 장례를 치러줍니다. 다음 날은 시체 두 구가 떠내려옵니다. 사람들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두 시체를 땅에 묻습니다. 한동안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마침내 사람들은 이렇게 묻기 시작합니다. 이 시체들은 어디에서 떠내려오는 걸까? 이 상황을 멈추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할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 답을 알아내려고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의자에 앉은 조엘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약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를 알아내야 합니다." 나는 지금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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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정보를 담은 영상을 본다면 유튜브는 이후로 여러 개의 영상을 더 추천할 것이며, 영상은 갈수록 더 극단적으로 변해서 우리가 다섯 개 정도의 영상을 시청한 뒤에는 결국 홀로코스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될 것이다. 우리가 9.11에 관한 평범한 영상을 본다면 마찬가지로 유튜브는 결국 9.11 트루서9.11truther(9.11이 미국 정부가 꾸민 일이라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옮긴이)‘의 영상을 추천할 것이다. 알고리즘 (또는 유튜브의 어떤 직원)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9.11 트루서 여서가 아니다. 알고리즘은 그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영상을 더 오래 보게 만들 내용을 선택할 뿐이다. 트리스탄은 이 사실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어디에서 시작하는 말도 안 되는 것에서 끝이 납니다." - P211

이스라엘계 미국인 기술 설계자인 니르 이얄Nir Eyal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어느 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우리에겐 아름다운 오후 계획이 있었어요." 두 사람은 아빠와 딸이 함께 읽는 책을 보고 있었 고, 이얄의 딸이 넘긴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쓰여 있었다. ‘아무 초능력이나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것을 고르고 싶나요?‘ 딸아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니르에게 문자가 왔다. "저는 딸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않고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니르가 고개를 드니 아이는 곁에 없었다.
어린 시절은 아이와 부모 사이의 작은 연결의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그 순간들을 놓치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 니르는 큰 충격과 함께 깨달았다. "아이는 그게 뭐든 간에 제 핸드폰에 있는 게 자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읽었을 겁니다." - P223

내가 니르의 접근법에 점차 불편함을 느낀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였다. 그중 한 명이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의 경영학. 교수 로널드 퍼서 Ronald Purser 였다. 그는 그때까지 들어본 적 없었던 "잔혹한 낙관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해주었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비만이나 우울, 중독처럼 우리 문화에 근본 원인이 있는 거대한 문제와 관련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언어로 단순한 개인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주장은 낙관적으로 들리는데, 문제를 금방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이 주장은 잔혹한데, 이렇게 제시하는 해결책이 너무 제한적이고 근본 문제를 전혀 보지 못하기에 결국 대다수에게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 P233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우리의 집중력을 망가뜨리는 시스템을 바꿀 수 없으므로 우리 개개인의 행동을 바꾸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왜 우리가 이 시스템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를 "낚고" "미치게" 만들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이 가득한 환경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 - P236

숲속을 걸어가고 있는데 포악해져 곧 공격을 해올 것 같은 회색곰과 만났다고 상상해보자. […]
이제 이러한 곰의 공격이 자주 발생한다고 상상해보자. 일주일에 세 번씩 화가 난 곰이 동네에 나타나 주민 중 한 명을 가격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아마 ‘과각성 byperiglance‘ 상태에 빠질 것이다. 위험한 대상이 눈앞에 있는 곰이든 다른 것이든 간에, 우리는 늘 위험 요소를 찾기 시작한다. 네이딘은 이렇게 설명했다.
"과각성은 본질적으로 가는 곳마다 곰을 찾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초점은 잠재적 위험의 단서에 맞춰져 있어요. 현재 일어나는 일을 느끼거나, 배워야 할 수업을 듣거나,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요. [그러한 상태에 빠진 사람이] 집중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위험의 단서나 증거를 찾는 데 집중하고 있는 거죠. 초점이 거기에 가 있는 거예요." - P274

네이딘이 말했다. "아세요? 리탈린은 성폭행을 치료해주지 않아요. 이 아이들에게 약은 근본 원인이 아닌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 치료해요··· 어떤 아이가 끔찍한 행동을 하면 대개 그건 옳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신체에 알리는 아이만의 훌륭한 방법이에요." 네이딘은 아이들이 집중하지 못한다면 종종 그건 끔찍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신호라고 믿게 되었다. 이 주제의 전문가인 애들레이드의 의사 존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건 한통속이 되어 아이들을 폭력적이거나 용납 불가능한 상황에 남겨두는 거예요." - P277

네이딘은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만약 이것이 잘못된 접근법이라면, 적절한 대응 방식은 무엇일까? 로버트를 비롯해 병원을 찾아오는 다른 아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네이딘은 부모에게 이렇게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저는 이것[집중하지 못하는 상태]의 원인이 [아이의] 몸이 너무 많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만들어내고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할 겁니다. 먼저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아이가 경험하거나 목격하고 있는 무섭거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소들을 제한해야 합니다. 그리고 완충 장치와 돌봄, 보살핌을 켜켜이 쌓아야 합니다. 그럴 수 있으려면 아이의 부모인 당신이 자기 삶의 역사를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 P278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너의 고통에 감사하라. 그 고통 덕분에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으니." - P280

진화인류학자인 찰스 넌Charles Nunn 교수는 불면증이 증가하는 현상을 조사한 뒤 우리가 ‘스트레스와 과각성‘일 때 잠 못 들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긴장을 풀 수 없는데, 우리 몸이 위험 상황이라고,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찰스는 불면이 기능 장애가 아니라 "위험을 인식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적응 형질"이라고 설명 했다."‘ 그는 불면증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불안과 스트레스의 진짜 원인을 없애 불면증을 효과적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불면의 원인을 직시해야 한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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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는 제 마음을 알아주고 조언으로 길을 인도해줄 벗을 찾고 싶다는, 항상 품어왔던 소망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충고를 듣고 기분 나빠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이라서 제 힘에만 의존해서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다 현명하고 경험 많은 벗이 저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벗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믿지도 않고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방인이 대답하더군요. "우정은 희망사항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실제로 얻을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저 역시 한때는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고결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니 서로를 존중하는 우정을 판단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 P36

그토록 상심한 상태인데도 그는 세상 누구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깊이 느끼는 사람입니다. 잔별이 총총한 하늘, 바다, 그리고 기적처럼 경이로운 극지의 풍광, 이런 것들은 그의 영혼을 하늘로 둥실 떠오르게 만드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중의 존재를 갖고 있어요. 불행을 겪고 상심에 꺾일지언정 내면으로 물러나면 마치 후광을 두른 천상의 영혼이 된 듯, 그 빛의 반경 속으로 어떤 설움도 우매함도 감히 범접할 수 없게 된단 말입니다. - P37

누구나 엘리자베트를 사랑했다. 하인들이 청탁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엘리자베트가 중재에 나섰다. 우리는 불화나 다툼을 전혀 몰랐다. 우리 둘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바로 그 괴리에서 조화로움을 찾았다. 나는 내 단짝보다 훨씬 차분하고 사색적이었지만 성격은 나긋나긋하지 못했다. 나는 근면했고 훨씬 더 지구력이 있었다. 어떤 일에 몰두해 있으면 그렇게 힘겹지 않았다. 나는 현실 세계와 관련된 사실을 탐구하는 일이 즐거웠다. 반면 그녀는 시인들의 신기루 같은 창조물을 좇느라 분주했다. 내게 세상은 비밀이었고, 나는 그 비밀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세상은 텅 빈 여백이어서,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그 여백을 채우고자 갈망했다. - P44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면 나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낀다. 불행이 내 마음을 더럽히고, 널리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밝은 꿈을 오로지 나 자신에 대한 우울하고 편협한 생각으로 바꾸어놓기 전의 일이니까. 그러나 어린 시절의 그림을 하나씩 그려나가면서,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한 발 한 발 훗날의 불행으로 나를 이끈 사건들을 절대 생략해서는 안 된다. 훗날 내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그 격정의 탄생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다보면, 그것이 마치 산을 따라 흐르는 냇물처럼 미미하고 거의 잊힌 원천에서 솟아나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그 냇물은 흘러 가면서 점점 불어 격류가 되었고, 결국 내 모든 희망과 기쁨을 휩쓸어 가버리고 말았다. - P45

어떻게도 보상할 수 없는 끔찍한 불행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굳이 묘사할 필요는 없으리라. 영혼에 드리워진 그 어마어마한 공허감, 그리고 표정에 떠오른 절망감을, 어머니가, 날마다 얼굴을 볼 수 있던, 마치 우리 자신의 일부 같았던 어머니가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마음으로 납득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그 눈의 밝은 빛이 영원히 꺼져버렸고, 그토록 친숙한,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숨이 죽어,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하기까지. 이런 것들이 첫날의 기억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참담한 현실이 뚜렷하게 드러나면 그제야 진짜로 비탄의 쓰디쓴 설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 무자비한 손길에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 누구나 느꼈을 슬픔, 그리고 반드시 느껴야만 할 슬픔을 굳이 내가 묘사할 필요가 있겠는가? 결국 때가 되면 비탄은 필연이라기보다 일종의 자기만족이 된다. 그리고 신성모독일지 모르지만, 입가에 서린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날이 온다. - P53

나를 멀리 데려갈 이륜마차에 몸을 던진 나는, 더할 나위 없는 우울한 생각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끊임없이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려 애쓰는 상냥한 가족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던 내가 이제는 혼자가 되었다. 지금 향하는 대학에서는 스스로 알아서 친구들을 사귀어야 했고 스스로를 알아서 돌봐야 했다. 이제까지의 내 삶은 유별나게 가족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얼굴들에 대해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반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동생들과 엘리자베트, 그리고 클레르발을 사랑했다. 그들이 내겐 ‘친숙하고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생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이런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여행이 진척되면서 차츰 기운도 생기고 희망도 샘솟았다. 나는 지식을 열렬히 갈구했다. 고향에 있을 때는 종종 청년 시절을 이렇게 한군데 처박혀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에 뛰어들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내 입지를 확보할 수 있기를 갈망했다. 이제 내 바람이 현실이 된 마당에 회한을 품는 건 우매한 짓이었다. - P55

나는 몹시 기쁜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섰고, 그날 저녁 당장 발트만 교수를 찾아갔다. 사석에서 본 그의 몸가짐은 공적인 자리에서보다 더 부드럽고 매력적이었다. 강의를 할 때 보이던 위엄은 사라지고 비길 데 없이 상냥하고 친절하기만 했다. 보잘것없는 내 얘기를 주의깊게 들었고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와 파라셀수스의 이름이 나오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크렘페 교수가 드러내던 경멸이 없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바로 이 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지식의 근간을 빚진 셈이지. 그들은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쉬운 작업을 남겨주었다네. 상당 부분 그들 덕분에 조명된 사실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서로 연관된 분류 체계로 정렬하는 일이지. 천 재들의 노고란 아무리 오도된 것이라도 결국은 인류의 선을 공고히 하는 데 쓰이기 마련이라네." - P59

친구여, 열의는 물론 경외와 희망에 찬 그대의 눈빛을 보니, 내가 알게 된 비밀을 전해줄 거라는 기대를 품는 모양이지만 그건 안 될 말이다. 이야기를 끝까지 주의깊게 듣고 나면, 내가 그 주제에 대해 말을 아끼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당시의 나처럼 몸도 사리지 않고 열의에 들뜬 그대를 파멸과 명약관화한 불행으로 이끌 수는 없으니. 나로부터 배우도록 하라. 가르침을 듣지 않겠다면 적어도 내 사례를 보아 깨닫도록 하라. 지식의 획득이 얼마나 위험한지, 본성이 허락하는 한계 너머 로 위대해지고자 야심을 품는 이보다 고향을 온 세상으로 알고 사는 이가 얼마나 더 행복한지를.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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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마이를 버리고서 개성으로 향했을 때······ 새비 너를 그 추운 날 난리통에 피난 가라고 떠밀었을 때······ 모두 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기렇게 마음먹으면서두 기래선 안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
– 새비야······ 나는 죽어 너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동무라 하기에는 너무 달랐으니······ 내레 죽으면 어마이도, 새비 너도 볼 수 없을 기야. 우린 다른 세상으로 갈 테니까. 나는 새비 너가 있는 곳에 절대루 갈 수 없을 테니. 그러니 이게 전부야······ 이게 전부야······
증조모가 두 손으로 새비 아주머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 우리 새비,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은 곳으로 가서 더는 힘들지 말구, 마음 쓰지도 말구, 새비 네가 그리워했던 사람들 모두 만나고 지내라. - P293

나는 남편의 외도와 그와의 이혼이 내 무릎을 한순간 꺾이게 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내가 믿었던 만큼, 내가 믿고 싶었던 만큼 그는 내게 정말 의미 있고 비중 있는 존재였을까. 그의 외도를 알기 전의 나는 정말 내 믿음대로 덜 아프고 덜 병들어 있었을까. - P298

나는 그와의 결혼으로 내가 지닌 문제와 내가 가진 가능성으로부터 동시에 도망치고자 했다. 나의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이혼 후 내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은 남편의 기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의 결과이기도 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보니, 그 중 나를 더 아프게 한 건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이었다. - P298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 P299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 P299

어마이가 나에 대해 뭐라 말한 건 없나······
희자는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 가끔은 희자 너레 새가 되어 꿈에 나온다고 하셨더랬어. 아주 잘생긴 새가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걸 본다구. 마음이 벅차서 ‘새야, 잠시 내려오갔어?‘ 말을 붙이면 그 새가 가지를 딛고서 아주 높고도 먼 곳으로 날아간다는 기야. 그러면 잠시 슬픈 마음이 들다가두,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래. 눈물이 날 만큼 기쁘더래.
– 그 새가 나인 줄 어떻게 알아······ 회자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너레 새가 되든 두더지가 되든 감나무가 되든 새비 아즈마이는 한눈에 희자로구나, 잘생긴 우리 희자로구나, 알아보시지 않았갔어.
– 그래, 그랬을 거야. - P302

이야기하는 할머니, 소리 내어 웃는 할머니, 화투 치는 할머니, 놉에 가려고 봉고차에 올라타는 할머니, 정자에 앉아서 친구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할머니, 차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할머니, 가끔 돋보기를 꺼내서 무언가를 읽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의 모습 중에서도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식탁의자에 앉아서 한 손을 컵에 댄 채 그 자리를 떠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끔 할머니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잊은 듯했다. 때로는 몇 초에서 길게는 일이 분 정도 할머니는 자신이 앉아 있는 장소를 떠나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할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돌아와서 컵에 담긴 음료를 마시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감각할 수 있기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할머니는 마치 잠수했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프리 다이버처럼 유유히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 P308

"미선이는 정연이 일을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어. 미선이 잘못이 전혀 아닌데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몰라······ 미선이는 네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있을 거야.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마음을 찔렀다.
"엄마한테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넌 나랑 달라. 그애의 딸이잖아. 엄마가 딸을 용서하는 건 쉬운 일이야." - P311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패배감에 젖은 그 말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나. 그런 마음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쳐야 했었나.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 P313

나는 엄마의 사진첩에서 본 결혼식 사진을 떠올렸다. 식 직전까지 울었는지 진한 화장에도 불구하고 붉은 얼굴과 충혈된 눈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때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의 결혼사진이 담긴 앨범에는 신혼여행 사진과 신혼시절의 사진도 있었다. 그때의 엄마는 즐거워 보였는데, 그것이 엄마의 젊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사진이 순간을 미화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엄마가 그 시절을 실제로 그렇게 즐겁게 보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진은 엄마가 분명히 그 순간 빛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 P315

"언니는······ 어떤 아이였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그애를 똥강아지라고 불렀어."
"똥강아지요?"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똥강아지. 걔가 얼마나 감탄을 잘했는지 몰라. 작은 개구리 하나를 봐도 우와,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봐도 우와, 늘 우와, 우와,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건 너도 그렇더라. 언니를 보고 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우리 엄마로부터 이어졌는지도 몰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 P316

작은방 구석에 이불을 개켜놓는 자리가 있었다. 언니는 그 위에 올라가서 두 손을 맞잡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 골목을 달리면서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서 이웃들에게 야단맞기도 했다. 그 모든 일이 나에게는 생생했다. 사람들은 네다섯 살의 기억이 그토록 구체적일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우는 힘이 그렇게 강하다면 마음 깊은 곳의 나는 그 강한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절박하게 기억했다. - P317

어떤 교사들은 부모가 제대로 보호해줄 수 없는 집의 아이들을 골라 괴롭히곤 했다. 책잡히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것, 그게 표적이 된 아이의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엄마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괴롭힘당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버텨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면 세상에 혼자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하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해변에 가는 날이 많았다. 그때 마다 증조모는 엄마를 찾아냈다. 어두워지는 해변에서 미선아, 미선아, 부르며 걸어오던 중조모의 모습을 엄마는 기억했다. 그때 자신이 느꼈던 반가움을, 자신을 짓누르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무엇보다도 내게 누군가가 있다‘라는 마음의 속삭임을 엄마는 기억했다. - P329

나는 어머니와 많이 닮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사십대의 나의 모습이 보여요.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어머니가 오십대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육십대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한 적도 많았어요. 어머니는 자기 신념이 강했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어요. 나를 데리고 늦가을에 대구로 피난을 가는데 어머니가 바들바들 떨던 것이 기억나요. 자꾸 농담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가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 P332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 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 P335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애들의 손을 잡아 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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