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했소!" 수도원장은 진심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원대한 목적에 몰두하고 있는 영혼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아니 되지. 부수도원장에게는 그 젊은 형제를 순례에 참여시키기로 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시오. 일단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뒤에 다른 곳을 곁눈질하는 이들에게 무척 엄격한 사람이니까. 그것은 그 나름의 꺾을 수 없는 확신이라오."
"그렇지만 수도원장님, 우리 모두가 타고날 때부터 성직자의 운명을 받은 것은 아니잖습니까. 다른 일을 함으로써 세상에 더욱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맞는 말이오!" 수도원장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띠며 캐드펠 수사 자신 또한 종종 곱씹는, 그러나 쉽게 잊히곤 하는 난제에 대해 생각했다. "고백하자면, 나도 의문을 품은 적이 있지. 이제는 다 끝난 얘기지만······. 어쨌든 좋소. 그 젊은 형제의 이름을 알려주시오. 그를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이오." - P46

"저는 성인들이 스스로에게 영광을 바치기를 요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휴 신부는 겸손하게 말을 이었다. "성인 들은 당신들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바치는 분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번 일에 관해서도 위니프리드 성녀의 뜻이 어떠하실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과 교단이 성녀께 올바른 영광을 바치고자 한다는 것은, 물론 아주 훌륭한 생각이긴 합니다만, 성인의 뜻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더욱이······ 이 축복받은 성녀께서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조용하고 기적적인 수도 생활을 하셨지요. 그분은 이곳에서 두 번이나 돌아가셨고, 결국 이곳에 묻히셨습니다. 비록 제 교구민들이 약하고 죄 많은 사람들이라 그분을 합당하게 섬기지 못했다 할지라도, 다들 위니프 리드 성녀께서 자신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웨일스에서는 그것만으로도 한 성인에게 바치는 경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왕자님과 주교님께서는—물론 저야 그 두 분께 합당한 존경을 표합니다만—성녀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그 유골이 잉글랜드로 옮겨질 경우 이곳 교구민들의 기분이 어떠할 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그분들께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만, 그 유골이 어디에 안치되어 있건 성인은 성인이십니다.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귀더린 주민들은 이런 일을 결단코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 P58

그들은 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에서 헤어졌다. 건너편 골짜기 기름진 농토에서는 아직도 수소와 팀을 이룬 사람들이 두 번째 밭을 갈아엎는 중이었다. 하루에 밭뙈기 둘이라니, 엄청난 노동이었다.
"부수도원장께서 조금만 현명하시다면 아까 본 그 젊은 형제로부터 교훈을 얻으실 수 있을 텐데요." 이리엔 신부는 캐드펠을 두고 떠나면서 말했다. "이런 마을에서는 재촉하기보다 한발 앞장서서 구슬리는 편이 더 좋은 성과를 얻는 법이지요. 하긴, 굳이 형제에게 이런 얘길 할 필요는 없겠군요. 형제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웨일스 사람이니까." - P64

캐드펠은 잘생긴 젊은이와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길을 피해 그곳을 떠났다. 소녀는 한동안 수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소몰이 청년이 강을 건너 둑으로 올라오자 반갑게 그에게로 달려갔다. 캐드펠이 무엇을 보고 깨달았는지 아마 소녀는 정확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주어 무척 안심했으리라. 수놓은 가운을 입은 웨일스의 지체 높은 아가씨가 이 혈족 사회에서 땅도 뿌리도 없는 이방인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사실을 숨겨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친족 관계가 없는 사람은 살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곳이었다. 제아무리 유쾌하고 잘생긴 젊은이라 할지라도, 제아무리 일을 잘하고 가축을 다루는 데 능숙한 젊은이라 할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캐드펠은 숲에 가려져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두 남녀는 기쁨에 겨워 꼼짝도 안 하고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직은 수줍은 사이인 듯 서로 몸이 닿지 않을 만큼 떨어진 채였다. 캐드펠은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 P70

"수사님도 아시겠지만, 객지 사람이 웨일스에서 살아간다는 게 좀 힘든 일입니까?"
캐드펠도 잘 알고 있었다. 주민들 모두가 같은 지방에서 태어나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과 잘 알고 지내는 곳, 모든 인간관계가 토지에 기반하며 마을에서의 지위가 자유 지주와 농노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곳에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객지 사람은 어느 곳에도 정착할 기반을 마련할 수 없었고, 따라서 삶의 근거 자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이가 스스로의 삶을 확립하는 유일한 방법은, 거처와 일굴 땅을 내주고 그가 가진 기술을 써줄 지주를 만나 계약을 맺는 길뿐이었다. 이 계약은 3대까지는 언제라도 양쪽 당사자에 의해 해지할 수 있었고, 계약이 해지될 경우 객지 사람은 삶의 기회를 부여해준 지주와 소유물을 공정히 분배한 뒤 떠날 수 있었다. - P83

"우리가 귀더린에 가져온 문제 말고도, 이 마을에는 이 마을 나름의 문제가 있는 모양이구먼." 카이와 헤어지면서 캐드펠은 말했다.
"하느님께서 시간을 두고 그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겠지요."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긴 채 카이는 어둠 속으로 터벅터벅 멀어져갔다. 캐드펠은 심란한 기분으로 오솔길을 걸었다. 그래, 하지만 반대로 하느님이 간혹 약간의 도움을 구할 때면 인간은 대개 훼방만 놓지. - P86

수십 명의 목소리가 동조하며 자신들이 품은 분노의 맥락을 정확히 짚어낸 이 대변인에게 환호를 보냈다. 게다가 교회 중에서도 오랜 전통을 지닌 켈트인들의 성스러운 교회, 세속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고 왕권의 환심을 사려 하지도 않으며 속세로부터 물러나 명상과 기도라는 축복받은 고독에 파묻힌 이 교회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가. 사람들의 속삭임은 억제된 웅성거림으로, 천둥 같은 고함으로, 포효로 점점 커져갔다.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그 외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도 목소리를 높여 맞고함을 질렀으나 현명한 대응은 아니었다. - P96

웅변과 논증에서 그만한 적수를 만나다니, 로버트 부수도원장에게는 그야말로 생애 최악의 타격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야만인이나 다름없는 웨일스인 지주, 그것도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영주도 아닌 평범한 지주에 불과한 인물 아닌가. 저 무수한 열등한 인간들과 견주어 겨우 조금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인 보잘것없는 자. 적어도 이 노르만인의 시선으로 볼 때는 그랬다.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지위와 계급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리샤르트는 혈연관계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이었다. 그 혈연 관계에 속하는 이라면 누구든 가족 속에 서로의 자리를 가질 뿐, 그 어떤 사람도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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