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내가 아는 K는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는 타입도 아니고, 누군가의 진심을 비아냥거리는 경솔한 성격도 아니며, 오래 알고 지내는 동안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나 비하 발언을 한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K가 나의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듯 나 역시 K의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었고, 나는 K에게 면전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앞에서는 받아들여지더라도 결국에는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해해 보이는 상대일지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 머릿속의 생각일 뿐, 상대가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내보일 수도 있었다. - P280
나는 내가 엄마 앞에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의 폭음은 죽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는데, 사실 그건 죽음보다는 삶에 가까운 것이고, 내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건 기필코 나답게 살아 보겠다는 삶의 의지와 다름없는 것인데……… 어째서 엄마를 마주하자 그런 말이 튀어나온 건지, 어째서 내가 나를 때리면서까지 울어야만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 P288
나는 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잠든 척하는 사람을 깨울 수는 없다는 어느 오래된 격언을 새삼스레 떠올렸고, 내가 과연 엄마를 깨울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 일이 얼마나 오래 걸리든 끝내 포기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 P294
나는 책장 한쪽에 엄마의 몫으로 남겨 둔 책을 비스듬히 꽂아 두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안 할 게 분명한 그 책을 보면서, 보이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동시에 보이지 않기를 절실히 바라는 듯한 모습으로 놓여 있는 그 책을 눈에 담고 또 담으면서, 내가 쓴 책이 지금의 나와 무척이나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정말이지 나 같았다. - P294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갑작스레 밀려드는 공허함에 살짝 울적해져서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누가 대답을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나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걸까.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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