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한다. 정말 힘든 건 그런 거다. 정지 버튼을 누르거나 궤도에서 이탈해버릴 수가 없다. 다만 아주 많이 느려질 뿐이다. 정신이 명료한 시간은 하루에 삼십 분. 하루에 쓸 글을 열흘에 나눠 천천히 쓰고 지운다. 어둠이 길면 반짝이는 것들의 수명을 알 수 있다. 향초가 다 탔다. 정당한 분노도 굵고 명확한 미움도 길게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픈 몸의 유리함일지 모른다. 요즘 죄가 적다. - P64
인간은 정말 불쌍하게 복잡해, 하는 표정일까. 불쌍하게 약한 거야. 내가 턱밑을 긁자 사샤가 꼬리를 세웠다. 사샤는 자기를 구조하고 임보하고 입양한 여러 인간들이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를 유기한 인간에 대해서도, 그건 인간들의 문제니까. 나 역시 궁금해할 필요가 없는 거였을지 모른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그의 문제이므로. - P72
그의 이야기는 여동생 손에 있던 돌멩이를 뺏기 위해 여동생 손에 여덟 개의 선명한 이빨 자국을 냈다는 것으로 끝났다. "아, 피도 많이 났거든. 엄마랑 여동생이 나를 한동안 미친 애 보듯 하더라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기류가 또 한번 달라졌다. 그를 보는 내 눈빛도 달라졌다. 이 친숙한, 은은한 광기. 그와 나는 그렇게 친구가 됐다. - P75
당신은 또 놀란다. 아픈 이를 수식하는 그 많은 말에. 수식에 앞선 평가들에. 강하다, 긍정적이다, 성격이 좋아 회복이 빠르다, 생의 의지가 남다르다, 씩씩하다, 씩씩한 척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아프지 않은 그들의 안심을 위한 말임을 알게 되지만 그전까지는 이런 말들이 아픈 몸을 쉽게 억압할 수 있다는 걸 당신은 몰랐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란 말을 끝으로 소원해지는 건 어떤 부정적 영향도 받지 않겠다고 멀찌감치 떨어져 겨우 팔을 흔드는 일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몰랐다. - P76
당신은 유난히 놀란다. 아픈 몸에 깃드는 새 지도들과 언어에. 어떤 말은 영영 예전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걱정 어린 안부와 가벼운 호기심의 차이도, 기쁜 일과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함께하는 이들과 ‘도움이 되는 나‘에 취해 힘든 일에만 반응하는 이들의 차이도 더없이 선명하고 분명하지만 아픈 이의 감정적 반응은 대개 "아파서"로 해석되므로 당신은 다만 조용히 기록한다. 통감 이외의 다른 감각을 놓치지 않도록. - P77
기억은 철새 같은 거라고 그가 말했다. 오고가는 시기가 있다는 말인가 했는데 그는 조금 다른 이유를 댔다. "다음 해에는 언제나 더 많은 무리와 함께 오죠. 기억의 무리가 매해 다른 대형을 짜요." - P80
영국인이 매사추세츠 해안에 도착해 피쿼트 족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이 피쿼트 족의 세계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오만하게 지우고 물었다. 이 이방인들은 누구지? 리처드 커니는 그 순간 피쿼트 족 역시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피퀴트 족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이지만 우리는 영국인 시점으로의 이방인을 먼저 인식하고 역사로 전유한다. 권력은 원주민을 이방인으로 만든다. - P82
깨달음은 궁극의 실망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는데 궁극의 실망이라니, 그거 매일 똥 싸면서 하는 거 아닌가.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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