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P174

하밀 할아버지는 언제나 내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은 시인들이라고 했었는데, 나는 그가 나를 빅토르라고 불렀던 것이 갑자기 떠올라 웃음이 났다. 어쩌면 신이 할아버지를 통해 시인이 되라는 계시를 내게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상 속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희고 붉은 새들을 보았다. 새들의 발에는 내가 함께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끈이 달려 있었다. - P179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 P252

내 말을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유태인 노인네의 눈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눈은 하밀 할아버지가 "이건 최고로 아름다운 양탄자란다"라고 말하던 양탄자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하밀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양탄자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으며, 알라신도 양탄자 위에 앉아 있었다고 믿었다. 내 생각에는, 알라신이 속임수 더미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지만. - P254

"로자 아줌마, 왜 내게 거짓말을 했어요?" 그녀는 정말 놀라는 것 같았다.
"내가?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했다구?"
"열네 살인데, 왜 열 살이라고 하셨냐구요."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로 그녀는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네가 내 곁을 떠날까봐 겁이 났단다, 모모야. 그래서 네 나이를 좀 줄였어. 너는 언제나 내 귀여운 아이였단다. 다른 애는 그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네 나이를 세어보니 겁이 났어. 네가 너무 빨리 큰 애가 되는 게 싫었던 거야. 미안하구나."
나는 덥석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 팔로는 마치 내 아내인 양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 P256

"이제 모두 다 지겨워요. 로자 아줌마만 빼고요. 아줌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 사람이에요. 의사들을 즐겁게 해 주자고 아줌마를 식물처럼 살게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 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그건 누굴 죽이는 것과 같은 힘이 있대요. 선생님이 인정머리 없는 늙은 유태인이 아니고 심장이 제자리에 붙어 있는 진짜 유태인이라면, 좋은 일 한번 해주세요. 로자 아줌마를 고통스런 생에서 구해주세요. 생이란 것은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버렸어요. 그놈의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 아버지란 작자 때문이에요. 그 작자는 어찌나 잘 숨어 있는지 낯짝도 안 보여요. 그 낯짝을 재현시키는 것조차도 안 된대요. 붙잡히지 않으려고 마피아들을 풀어서 막잖아요.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지 않는 더럽고 멍청한 의사들은 비난받아야 해요. 그건 범죄라구요······." - P264

"모모야,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어. 넌 어른이 되어서도 딴 사람들과는 다를 거야. 나는 언제나 그걸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카츠 선생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이야.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다. 너는 언젠가 특별한 사람이 될거야."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건 어쩌면 내 아버지가 정신병자였기 때문일 거예요."
카츠 선생님은 환자처럼 보일 정도로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렇지 않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넌 너무 어려서 이해를 못 하겠지만······."
"선생님,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 P267

"아, 그래. 너는 아주 영리하고 예민한 아이야. 너무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해야겠지. 종종 로자 부인에게 말했지만, 너는 정말 남다른 사람이 될 거다. 훌륭한 시인이나 작가나, 아니면······."
그는 또 한숨이었다.
"반항아가 되거나······ 하지만 안심해라. 네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은 결코 아니니까."
"나는 절대로 정상은 안 될 거예요, 선생님. 정상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비열한 놈들뿐인걸요."
"정상인을 말하는 거다."
"나는 정상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선생님······." - P268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 P275

"난 너무 추한 꼴이 되었구나, 모모야." 나는 화가 났다. 늙고 병든 여자에게 나쁘게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니까. 하나의 자로 모든 것을 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마나 거북이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듯이 말이다.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슬퍼서 우는 건지 근육이 풀려서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P276

한 가지 말해둘 게 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은 셈이니까. 더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 P295

"나는요, 자연의 법칙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요. 롤라 아줌마."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은 개나 물어가라고 해요.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어요. 구역질나는 그 따위 것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요." - P3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죽고 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 P138

나는 내가 커서 경찰이 될지 테러리스트가 될지 아직 몰랐다. 그것은 나중에 커봐야 알 것이다. 아무튼 어떤 조직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사람을 죽이는 건 정말 싫다.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야말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라고 했다. - P141

로자 아줌마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 이빨도 거의 없었다. 미소라도 지어야 아줌마는 평소보다 덜 늙어 보이고 덜 미워 보였다. 그녀의 미소에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켜주는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 전인 열다섯 살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 P147

나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도 닮지 않았고 아무와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녀에게 "롤라 아줌마, 아줌마는 어느 누구와도 무엇과도 닮지 않았어요" 라고 했더니 그녀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대답했다. "그래, 귀여운 모모야, 나는 꿈속의 사람이란다." 그런데 정말로 그녀는 푸른 옷의 광대나 내 우산 아르튀르처럼 아무것과도 닮지 않았다. "모모야, 너도 크면 알게 되겠지만, 아무 의미도 없으면서 존경받는 외부적인 표시가 있단다. 예를 들면 불알 같은 거 말이다. 그건 조물주의 실수로 만들어진 거란다." - P158

로자 아줌마는 병 때문만이 아니라 오래 살면서 겪어온 경험 때문에 이런 방문에는 식은땀을 흘렸다. 점점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게 되자 그녀는 더 힘들어했는데, 사람이 늙으면 그런 것이다. 인사를 하려고 애써 사층이나 올라온 이 프랑스 사람은 그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방문은 마치 그녀의 죽음에 앞선 저승사자의 방문처럼 되어버렸다. 더구나 그 사람은 검정색 양복에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나타났던 것이다. 로자 아줌마에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죽고 싶은 욕망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저런 욕망이 아니라 그저 습관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런 생각을 하느니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 - P162

얼마간 더 침묵 속에 있다가 샤르메트 씨가 입을 열었다. 그는 로자 아줌마에게 자기가 프랑스 철도를 위해 평생 공헌한 일들을 매우 사무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상태가 매우 악화된 늙은 유태인 여자에게는 무척 부담이 되는 얘기여서 그녀는 점점 더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둘 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샤르메트 씨가 불쌍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나오는 연금이 있다 해도 그 역시 돈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는 노인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인데 말이다. - P164

노인들이 결국 죽게 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내가 흥분할 일도 아니다.
샤르메트 씨가 기차며, 역, 그리고 출발시간 따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래도 들어줄 만했다. 마치 그는 아직도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고 환승역에서 갈아탈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탄 기차가 이미 종착역에 다다라서 이제 내릴 일만 남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P165

"할아버지는 또 빅토르라고 불렀어요."
"그, 그랬니? 미안하구나."
"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름이야 아무러면 어때요. 어제부터는 좀 어떠세요?"
그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생각해내려고 무진 애를 쓰는 듯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양탄자를 팔러 다니던 생활을 그만둔 뒤로는 매일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다보니 백지 위에 백지만 쌓아온 셈이어서 별다른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빅토르 위고의 낡은 책 위에 오른손을 얹고 있었다. 그 책은 마치 장님이 도움을 받아 길을 건널 때에 의지하는 손길처럼 그의 손에 매우 익숙해진 것 같았다. - P171

신 얘기는 이제 지겨웠다. 신은 언제나 남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니까. - P1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 P113

지금도 나는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똑같았으니까. 내 생활은 매일이 똑같기는 했지만, 때로 다른 때보다 휠씬 기분이 안 좋은 때가 있었다. 아픈 데는 하나도 없는데 팔다리가 다 떨어져나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 하밀 할아버지도 그런 경우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 P118

세상에서 제일 일찍 죽는 것은 개들이다. 열두 살만 되면 쓸모가 없어져서 새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 다음에 내가 개를 갖게 되면 갓난 놈으로 골라서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데리고 있을 작정이다. 광대들만은 죽고 사는 데 문제가 없다. 그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나는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들을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킹콩이든 프랑켄슈타인이든 상처 입은 붉은 새떼라도. 그러나 엄마만은 안 된다. 그러기에는 내 상상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 P119

결혼해서 아이를 둔 경찰들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르 마우트와 함께 경찰을 아버지로 두는 것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르 마우트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그런 상상은 아무 쓸모 없는 짓이라고 말하더니 가버렸다. 약물중독자와는 토론할 수가 없다. 그들은 세상 일에 대해 호기심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P121

나는 아주 먼 곳, 전혀 새롭고 다른 것들로 가득 찬 곳에 가보고 싶은데, 그런 곳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공연히 그곳을 망칠 것 같아서이다. 그곳에 태양과 광대와 개들은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들은 그대로도 아주 좋으니까.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알아볼 수 없도록 그곳에 맞게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봤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물들이 얼마나 자기 모습을 끈덕지게 고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우습기까지 하다. - P122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저능아다. 저능아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다. 그러면 난처해진 부모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열 살처럼 행동을 하는 식이다. 문제는 그런 아이는 혼자 벌어먹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열 살짜리 아이가 열다섯 살처럼 행동하면 학교에서는 내쫓아버리기도 한다. 학교가 엉망이 된다나. - P131

그때 내게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서 엄마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땅바닥에 앉아 있는 내 모습과 그런 내 앞으로 가죽으로 된 미니스커트를 입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은 다리가 지나가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얼굴을 보려고 눈을 치켜뜨려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다. 나는 그것이 나의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추억만으로는 눈을 치켜뜨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좀더 먼 과거로까지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나를 어르며 재우고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두 팔이 느껴졌다. 배가 아팠다. 나를 따뜻하게 안고 있는 사람이 콧노래를 부르며 좌우로 몸을 흔들며 걸었지만 나는 여전히 배가 아파서 바닥에 똥을 쌌고, 그제서야 더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 따뜻한 사람은 나에게 뽀뽀를 해주더니 가볍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 P134

"재밌니?"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화면에는 이제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금발의 여자가 내게 다가왔고 방 안에 불이 켜졌다.
"아주 좋아요."
뒤이어 은행 직원인지 반대파 중의 한 명인지 배에 총을 잔뜩 맞은 채 "날 죽이지 마, 죽이지 마!"라고 울부짖는 남자가 다시 나왔는데, 그렇게 울부짖는 것은 참 멍청한 짓이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그는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죽기 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봐줄 만하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 P1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자 아줌마는 심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층계를 오르내리며 장을 보러 다니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녀에게는 층계가 제일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줌마는 날이 갈수록 숨을 쌕쌕거렸고, 덕분에 나도 천식에 걸렸다. 카츠 선생님은 심리적인 것보다 더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심리적 전염이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매일 아침, 나는 로자 아줌마가 눈을 뜨는 것을 보면 행복했다. 나는 밤이 무서웠고, 아줌마 없이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하면 너무나 겁이 났다. - P82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 P91

말을 마친 후 로자 아줌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카츠 선생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는 창녀들에게는 마음의 눈이 있다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 P93

그 구경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 모두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기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받지 않으며 늙지도 않고 불행에 빠지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네 인간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낙타(까다로운 사람, 고약한 사람에 비유된다)에게조차도 호감이 갔다. 녀석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마치 거드름을 피우는 중년 부인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걸어다녔다. 이 서커스의 세계는 인간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였다. 철사줄 위에 있는 광대는 절대 떨어질 리가 없었다. 열 흘 동안 나는 그가 떨어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가 떨어지더라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별세계였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 P106

"두려워할 거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사실 말이지 ‘두려워할 거 없다‘ 라는 말처럼 얄팍한 속임수도 없다.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메카에까지 다녀왔다. - P108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갑자기 내 속에서 희망 같은 게 솟았다. 당장 내가 따로 살 곳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로자 아줌마가 살아 있는 한 아줌마를 버리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닥쳐올 미래를 생각해두어야 했다. 나는 밤마다 미래를 꿈꾸곤 했다. 누군가와 바닷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꿈,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어떤 사람. 그렇다, 나는 가끔 로자 아줌마를 배신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죽고 싶어질 때 머릿속으로만 그랬을 뿐이다. 나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희망이란 것에는 항상 대단한 힘이 있다. 로자 아줌마나 하밀 할아버지 같은 노인들에게조차도 그것은 큰 힘이 된다. 미칠 노릇이다. - P109

뭔가를 이해하는 데 내가 워낙 젬병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두어야겠다. 나는 늘 연구하느라고 시간을 다 보낸다. 하밀 할아버지 말이 맞다.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하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한동안 어리둥절한 상태로 있을 뿐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 P110

사실 나는 이상한 일이란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일들이란 게 알고 보면 다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별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 P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모모야."
"맹세해요."
"카이렘?"
우리끼리 맹세한다는 뜻이었다.
"카이렘."
그리고 나서 아줌마는 마치 아주 먼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듯 내 머리 위로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렸다.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피난처야."
"알았어요."
"이해하겠니?"
"아뇨.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런 일엔 익숙해졌으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 P69

나는 종종 카츠 선생님의 병원 대기실에 가서 앉아 있곤 했다. 로자 아줌마가 그 의사는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늘 말했기 때문인데, 정말로 내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거기에 충분히 오랫동안 앉아 있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 때를 잘 맞춰서 지켜보아야 한다. 기적이란 없다. - P70

대기실에 앉아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좋았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카츠 선생님이 나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기분이 좋아졌다. 의학은 바로 이런 때 소용 있는 것이다. - P71

건강한 아이의 경우에도 위험은 있었다. 법적인 출생서류가 없이는 누군지도 모르는 부모에게 아이를 다시 데려가라고 강요할 수가 없으니까. 자식을 버리는 엄마들은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인간이다. 로자 아줌마는 동물세계의 법이 인간세상의 법보다 낫다고 말하곤 했다. 인간세상에서는 아이를 입양하는 문제도 쉽지 않다. 입양된 아이가 잘 자라는 것을 보고 친엄마가 아이를 다시 데려가겠다고 나서면 아이를 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럴 땐 위조서류가 최고다. 만약 자기 아이가 남의 집에서 행복하게 잘 자라고 있는데 이 년쯤 뒤에 그 사실을 알고 나타나서 아이를 찾아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파렴치한 엄마가 있다면, 위조서류를 내보이며 쫓아버릴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친엄마는 절대로 아이를 되찾지 못하고 오히려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 P73

로자 아줌마는 꿈이 오래되면 악몽으로 변한다고 했다. - P75

내 친구 르 마우트 역시 창녀의 자식이었는데, 그애는 늘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는 비밀이 많은 게 어울린다고 말하곤 했다. 법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일을 잘 처리하는 여자라도, 어쩌다 사고로 아이를 낳게 되어서 그 아이를 기르려고 하면 당국의 조사를 받을 위험이 항상 있는데, 그건 정말 최악이라는 것이다. 일단 걸리면 가차없이 아이를 빼앗긴다고 했다. 이런 경우, 표적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항상 엄마 들인데, 아버지들은 여러 가지 법으로 보호를 받기 때문이라나. -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