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죽고 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 P138
나는 내가 커서 경찰이 될지 테러리스트가 될지 아직 몰랐다. 그것은 나중에 커봐야 알 것이다. 아무튼 어떤 조직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하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사람을 죽이는 건 정말 싫다.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아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야말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하밀 할아버지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라고 했다. - P141
로자 아줌마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 이빨도 거의 없었다. 미소라도 지어야 아줌마는 평소보다 덜 늙어 보이고 덜 미워 보였다. 그녀의 미소에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켜주는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 전인 열다섯 살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 P147
나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도 닮지 않았고 아무와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녀에게 "롤라 아줌마, 아줌마는 어느 누구와도 무엇과도 닮지 않았어요" 라고 했더니 그녀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대답했다. "그래, 귀여운 모모야, 나는 꿈속의 사람이란다." 그런데 정말로 그녀는 푸른 옷의 광대나 내 우산 아르튀르처럼 아무것과도 닮지 않았다. "모모야, 너도 크면 알게 되겠지만, 아무 의미도 없으면서 존경받는 외부적인 표시가 있단다. 예를 들면 불알 같은 거 말이다. 그건 조물주의 실수로 만들어진 거란다." - P158
로자 아줌마는 병 때문만이 아니라 오래 살면서 겪어온 경험 때문에 이런 방문에는 식은땀을 흘렸다. 점점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게 되자 그녀는 더 힘들어했는데, 사람이 늙으면 그런 것이다. 인사를 하려고 애써 사층이나 올라온 이 프랑스 사람은 그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방문은 마치 그녀의 죽음에 앞선 저승사자의 방문처럼 되어버렸다. 더구나 그 사람은 검정색 양복에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나타났던 것이다. 로자 아줌마에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죽고 싶은 욕망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저런 욕망이 아니라 그저 습관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런 생각을 하느니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 - P162
얼마간 더 침묵 속에 있다가 샤르메트 씨가 입을 열었다. 그는 로자 아줌마에게 자기가 프랑스 철도를 위해 평생 공헌한 일들을 매우 사무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상태가 매우 악화된 늙은 유태인 여자에게는 무척 부담이 되는 얘기여서 그녀는 점점 더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둘 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샤르메트 씨가 불쌍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나오는 연금이 있다 해도 그 역시 돈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는 노인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인데 말이다. - P164
노인들이 결국 죽게 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 내가 흥분할 일도 아니다. 샤르메트 씨가 기차며, 역, 그리고 출발시간 따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래도 들어줄 만했다. 마치 그는 아직도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고 환승역에서 갈아탈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탄 기차가 이미 종착역에 다다라서 이제 내릴 일만 남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P165
"할아버지는 또 빅토르라고 불렀어요." "그, 그랬니? 미안하구나." "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름이야 아무러면 어때요. 어제부터는 좀 어떠세요?" 그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생각해내려고 무진 애를 쓰는 듯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양탄자를 팔러 다니던 생활을 그만둔 뒤로는 매일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다보니 백지 위에 백지만 쌓아온 셈이어서 별다른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빅토르 위고의 낡은 책 위에 오른손을 얹고 있었다. 그 책은 마치 장님이 도움을 받아 길을 건널 때에 의지하는 손길처럼 그의 손에 매우 익숙해진 것 같았다. - P171
신 얘기는 이제 지겨웠다. 신은 언제나 남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니까. - P1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