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 P113

지금도 나는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똑같았으니까. 내 생활은 매일이 똑같기는 했지만, 때로 다른 때보다 휠씬 기분이 안 좋은 때가 있었다. 아픈 데는 하나도 없는데 팔다리가 다 떨어져나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 하밀 할아버지도 그런 경우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 P118

세상에서 제일 일찍 죽는 것은 개들이다. 열두 살만 되면 쓸모가 없어져서 새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 다음에 내가 개를 갖게 되면 갓난 놈으로 골라서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데리고 있을 작정이다. 광대들만은 죽고 사는 데 문제가 없다. 그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나는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들을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킹콩이든 프랑켄슈타인이든 상처 입은 붉은 새떼라도. 그러나 엄마만은 안 된다. 그러기에는 내 상상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 P119

결혼해서 아이를 둔 경찰들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르 마우트와 함께 경찰을 아버지로 두는 것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르 마우트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그런 상상은 아무 쓸모 없는 짓이라고 말하더니 가버렸다. 약물중독자와는 토론할 수가 없다. 그들은 세상 일에 대해 호기심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P121

나는 아주 먼 곳, 전혀 새롭고 다른 것들로 가득 찬 곳에 가보고 싶은데, 그런 곳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공연히 그곳을 망칠 것 같아서이다. 그곳에 태양과 광대와 개들은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들은 그대로도 아주 좋으니까.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알아볼 수 없도록 그곳에 맞게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봤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물들이 얼마나 자기 모습을 끈덕지게 고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우습기까지 하다. - P122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저능아다. 저능아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다. 그러면 난처해진 부모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열 살처럼 행동을 하는 식이다. 문제는 그런 아이는 혼자 벌어먹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열 살짜리 아이가 열다섯 살처럼 행동하면 학교에서는 내쫓아버리기도 한다. 학교가 엉망이 된다나. - P131

그때 내게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서 엄마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땅바닥에 앉아 있는 내 모습과 그런 내 앞으로 가죽으로 된 미니스커트를 입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은 다리가 지나가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얼굴을 보려고 눈을 치켜뜨려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다. 나는 그것이 나의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추억만으로는 눈을 치켜뜨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좀더 먼 과거로까지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나를 어르며 재우고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두 팔이 느껴졌다. 배가 아팠다. 나를 따뜻하게 안고 있는 사람이 콧노래를 부르며 좌우로 몸을 흔들며 걸었지만 나는 여전히 배가 아파서 바닥에 똥을 쌌고, 그제서야 더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 따뜻한 사람은 나에게 뽀뽀를 해주더니 가볍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 P134

"재밌니?"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화면에는 이제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금발의 여자가 내게 다가왔고 방 안에 불이 켜졌다.
"아주 좋아요."
뒤이어 은행 직원인지 반대파 중의 한 명인지 배에 총을 잔뜩 맞은 채 "날 죽이지 마, 죽이지 마!"라고 울부짖는 남자가 다시 나왔는데, 그렇게 울부짖는 것은 참 멍청한 짓이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그는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죽기 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봐줄 만하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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