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드펠 수사는 자신이 겪은 다양한 경험 중 딱히 이상한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 무엇도 잊지 않았고,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았다. 또한 전투와 모험을 통해 맛본 기쁨과, 지금 이 정적의 한복판에서 느끼는 만족감 사이에서 어떠한 갈등도 느끼지 않았다. 향신료가 가득한 음식을 좋아하는 식성 그대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사소한 악행으로 생활에 풍미를 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고, 수도원이라는 조용한 배에 오른 지금은 다시 정적을 즐기고 있는 셈이었다.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젊은 수사들은, 오랜 세월 모험을 즐기며 살아 왔다면 여자들도 많이 만났을 테고 그 교제들이 전부 기사도적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사람이 이런 수도원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서로 속삭였을 것이다. - P13

여자들에 관해서라면 그들의 생각이 옳았다. 10년이 넘도록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같은 지방의 장인, 그러니까 절대로 전쟁터로 달아날 염려가 없는 견실한 남자와 결혼해버린 리힐디스를 제외하고도, 그에게는 여자들과의 추억이 많았다. 여러 나라에서 그는 서로에게 아무 해가 없이 오직 즐거움만을 주는 교제를 만끽했다. […] 가벼운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었고, 헤어진 뒤에도 나쁜 감정 같은 건 남지 않았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그 추억들이 고적한 은둔 생활과 균형을 이루어 지금의 삶을 보다 만족스럽게 영 위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그러한 경험으로 얻은 인내심과 통찰력 덕분에, 그에게는 단조로운 은퇴 생활 에 불과한 베네딕토회의 전통적 직무를 평생의 업으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폐쇄적이고 소박한 영혼들과도 그럭저럭 어울려 지낼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세상 온갖 풍상을 겪은 사람으로서는 허브밭에서 말년을 보내는 것도 적잖이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일마저 없이 무료하게 살아야 한다면 지금처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으리라. - P13

캐드펠 수사는 행렬의 가장 끝자락에 섞여 소리 없이 자신의 구석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빛도 거의 들지 않고, 줄지어 늘어선 석조 기둥으로 반쯤 가려진 맨 뒷줄 자리였다. 캐드펠은 번거로운 양피지 업무를 맡고 있지 않은 터라 수도원 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행사에서 낭독자나 발언자로 지명될 염려가 거의 없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그는 평의회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그는 어둠에 싸인 자신의 구석 자리에서 똑바로 앉은 자세로 잠자는 법을 터득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지체 없이 스스로에게 경고를 내리는 육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고를 받는 즉시 잠에서 깨어나 시치미를 뚝 떼고 조용히 앉아 있을 줄도 알았다. 그뿐 아니라 졸고 있을 때 던져진 질문에 대해서도 꼭 들어 맞는 답변을 할 수도 있었다. - P21

캐드펠이 느끼기에 콜룸바누스 수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만족할 만큼 일을 하지 못하여 그 결핍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쯤은 의식적으로 또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증상을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안타깝고 견책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간의 여지 또한 남겨두었다. 이곳에서 만난 형제들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한 터였다. 존 수사라면 또 모를까. 그러나 수도원 안에서건 밖에서건 존 수사처럼 명랑하고 둔감하며 외향적인 사람은 희귀한 법이었다. - P26

"저도 웨일스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들이 모퉁이를 돌아 세번강 위의 다리를 건너 사라져가는 것을 눈으로 좇으며 존 수사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는 계시 같은 건 영영 못 볼 거예요. 이런 일에는 제롬 형제가 적격이지
요."
"형제여, 갈수록 점점 더 신앙인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구먼." 캐드펠 수사는 점잖게 타일렀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전 누구 못지않게 그 소녀의 정결함을 믿고, 그녀에게 일어난 기적을 믿는다고요. 성인들께서 우리를 돕고 축복할 능력을 가지셨다는 거야 당연히 알죠. 그분들이 선의를 가지셨다는 것도 믿고요. 하지만 그 꿈을 꾼 사람이 하필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충복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성녀가 아니라 부수도원장의 신성함을 믿느냐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예요. 어쨌든 성녀께서 그런 호의를 베푸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도대체 왜 우리가 그분의 무덤까지 파헤쳐야 한다는 건지 전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건 교회가 아니라, 납골당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잖아요. 수사님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죠?" - P34

존 수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 온순한 하얀 양이 고해성사를 하다가도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는가 하면 철야 기도 중에 갑자기 황홀경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거야 다들 알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니 홀리웰에서 갑자기 얼음처럼 차디찬 샘물이 몸에 닿은 순간 화들짝 놀라 정신이 되돌아왔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이곳 연못에다 그 형제를 처박았더라도 같은 결과를 얻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 형제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얘기를 믿었을 테니 모두 그 성녀 덕분이라고 생각하겠죠. 그 형제가 어디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 넘길 사람인가요! 절대 아니고말고요. 전 콜룸바누스 형제가 그 음모의 일부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형제는 영광스럽게 은총을 입증할 도구로 이용되었을 뿐이죠. 수사님도 콜룸바누스 형제의 밤샘 간호를 명받은 사람이 제롬 수사였다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계시를 받는 것은 딱 한 사람만으로 충분했어요. 그가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라면 말이죠." 그가 여린 녹색 이파리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비비자 아침 대기 속으로 짙은 허브 향기가 퍼졌다. "아마 부수도원장이 웨일스로 갈 때 데려갈 사람들도 더없이 적합한 사람들일 겁니다!" 그는 씁쓸한 어조로 단언했다. "두고 보시면 아시게 될 거예요."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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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명숙 할머니를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할 수도 있었지만, 명숙 할머니가 원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다가갈 수 없었다. 할머니는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몇 번 더 명숙 할머니를 불렀다. 명숙 할머니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마당 쪽을 바라보고는 이제 그만 떠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것이 명숙 할머니의 본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도무지 그 순간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 P205

희자는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멀고 커다란 세계로 날아갈지도 몰랐다. 결국 희자는 나를 잊겠지. 편지가 점점 뜸해지면서 할머니는 희자를 조금씩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언젠가 희자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거야. 나는 너무 오래 개성과 대구를 그리워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 삶은 개성에도, 대구에도 있지 않아. 내 삶은 희령에 있어. 나는 희령에서 살아가야 해. 할머니는 그런 식으로 희자와 새비 아주머니, 명숙 할머니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희자의 삶이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처럼, 할머니 또한 자신의 삶이 정체되어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희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 P213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할머니는 그때 자신이 스스로를 속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증조모의 눈에 보였던 남선의 단점들을 할머니 또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면서 그저 노처녀가 되고 싶지 않아서, 남들 보기에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서 자신을 속였다. 남선 정도라면 남편으로서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속의 경고를 무시했다. 증조부의 목소리로 할머니는 생각했다. ‘내가 잘난 게 뭐가 있는데.‘ - P218

할머니는 증조부에게서 작은 선물 하나도 받은 기억이 없었다. 피난 갈 때도 그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잠을 잤고 어떤 것도 딸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얇은 외투를 입고 떨어도 자신의 외투를 벗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증조부의 그런 행동이 너무 익숙해서 서운하지조차 않았다. 할머니와 남선의 관계는 그런 익숙함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배려하는 남자, 아내와의 관계에서 손익을 따지지 않는 남자를 자신의 배우자로 상상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대신 그 안에 주저앉아 포기하는 편을 선택 했다. 그편이 훨씬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체념하고 나니 그런 삶도 견딜 만했다. - P219

명숙 할머니가 보내오는 편지에도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편지에서 묻어 나오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이 할머니는 버거웠다.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 P220

스무 살 이후의 할머니를 만난 이들은 할머니를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비웃거나 차갑게 평가했으니까. 그 냉소적인 가면 뒤에 상처받고 싶지 않고, 더는 울고 싶지 않은 할머니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 P221

영옥아, 내레 너를 처음 봤을 적부터 더러운 정이 들 줄 알고 있었다. 저리 가라면서 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도 너는 강아지마냥 내게 오더구나. 세상이 뒤집히구, 나도 죽을 날이나 기다리며 살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비웃어도 할말이 없어.
내 너를 전쟁통에 만났다. 이제 너를 언제 볼 수 있을까. 내 살아 있을 때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영옥아, 영옥아. 이렇게 불러본다. 항상 건강해라. 건강해라, 영옥아.
할마이가. - P223

할마이, 할마이, 부르며 곁에서 아무 이야기나 종알거려도 그걸 다 들어주고 가끔씩 희미하게 웃어 보이던 명숙 할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을 때면 가까이 다가와서 귀를 기울이고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도,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영옥이 왔냐, 묻던 얼굴도. 명숙 할머니가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해도 할머니는 그녀가 자신을 반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새비 아주머니는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우리가 결국은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단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대구 집을 떠날 때로 돌아가서 명숙 할머니를 껴안고 싶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 P224

– 기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기야?
그를 찾아가면서 할머니는 적어도 그가 자신을 보고 놀라거나 두려워할 줄 알았다.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할 뿐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를 속였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곤 한다고 했지만 결론은 늘 한 가지였다. 그는 그럴 수 있어서 그랬던 것뿐이었다. - P228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날 아침 의사가 내게 귀리의 죽음을 알렸을 때 느낀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의 일부는 안도했다. 귀리의 고통이 이제 사라졌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겪어야 했을 나의 괴로움이 끝났다는 사실에. 그 이기적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 P233

지연아.
그때 내게 앞니 두 개가 빠진 여덟 살의 언니가 다가와서 등을 두드린다.
지연아, 지연아.
언니가 나를 부를수록 세상이 환해진다.
태양이 커지고 있나봐.
나는 좀전까지 울던 일을 잊고 언니에게 말한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셔. 어떻게 이렇게 밝을 수 있어?
내 말에 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환한 빛 속에서 소리 내며 웃는다.
바보야.
언니가 말한다.
바보야, 난 널 떠난 적 없어. - P235

"너랑 이야기하다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침묵을 깨고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뭐가요?"
"그냥. 가깝진 않더라도 우리가 종종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어. 그런 생각이 드니까 지나간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고, 또 이 순간도 지나갈 걸 아니까 아깝고."
개와 사람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듯이 삼십대인 나의 시간과 칠십 대인 할머니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 P243

"의사가 그러는 거예요. 이런 사고를 당하고 이 정도 다친 건 흔한 일이 아니라면서 저보고 운이 좋다고요. 부정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즐겁지가 않았어요. 잡고 싶을 만큼 아까운 시간도 없었어요. 그런 건 이미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찬바람에 몸이 떨려서 어깨를 움츠렸다.
"네 나이 때 나도 그랬어.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지. 그럴 수만 있다면 내게 남은 시간을 다 퍼다가 갖다버리고 싶었어······"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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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여느 날처럼 낭독을 마치고 물을 마시는데 명숙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얼굴이 아니라 대문을 바라보고 이야기해서 꼭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 내레 어릴 적에 소설 읽어주던 이들이 있었다이. 책방에서 『홍길동전』두 읽어주구 『사씨남정기』랑 『임진록』두 읽어주구. 내레 기걸 참 좋아했더랬어. 넋을 농구선 이야기를 들었다이. 어마이가 이야기 좋아하믄 가난해진다고 해두 어쩔 수가 없었다. 기게 참 좋았더랬어.
그 말을 하는 명숙 할머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 P186

내가 아직 서울에 살 때 엄마가 집에 왔다가 정신과 약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봉투에 인쇄된 약 이름을 핸드폰으로 하나하나 검색해보고 나서 엄마는 차갑게 말했다. 내게 실망했다고, 힘든 일이 있다고 무턱대고 약을 먹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서 곧 끊을 거라고 약속했었다. 엄마와 맞서 싸웠다면 엄마는 결국 자신이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정신과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 P190

이런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엄마나 나나 서로에 대해 많은 걸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이렇게 부딪치게 된 걸까.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결국 엄마를 공격하게 되는 패턴을 반복하고야 말았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 자신을 꺾지 않고 나를 비난하는 엄마를 견딜 힘이 내게는 없었다. - P191

– 보통이 아니구만.
혼잣말하듯 무심하게 한 말이었지만 명숙 할머니에게 칭찬을 듣자 할머니는 가슴이 뛰었다. 명숙 할머니가 보기에 할머니의 바느질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 하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자 할머니는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칭찬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할머니는 그후로 매일 명숙 할머니 곁에 붙어서 바느질을 손에 익혔다. - P195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뒤에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 악의 없는 웃음을 보이면서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흔하고 흔했다. 그런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성질인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명숙 할머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고양이 같았다. 움직이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걷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그랬다. 고양이 중에서도 결코 인간의 무릎에 앉지 않고, 인간에게 치대지 않는 고양이라고 해야 할까. 늘 인간에게서 등을 돌려 앉고, 인간이 자신을 보지 않을 때는 멀리서 바라보다가도 눈길을 주면 외면하는 척하는 고양이. 명숙 할머니는 그런 고양이를 닮아 있었다. - P195

밤에 잠이 들면 증조부가 나오는 꿈을 꿨다. 전쟁이 다 끝나고 나서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온 증조부를 맞는다. 그 장소는 늘 개성의 집이다. 이상하게 봄이는 귀도 아직 퍼지기 전인 어린 시절 모습이다. 봄이가 전쟁을 지나고 다시 아기 강아지가 됐구나, 감탄하면서 할머니는 봄이와 함께 증조부를 환영한다. 그가 증조부라는 건 알지만, 그의 얼굴은 언제나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나면 가슴이 서늘했고 증조부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국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한 중조부의 마음이 무엇인지 할머니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증조부가 죽지 않기만을 바랐다.
밥을 먹을 때도, 바느질할 때도,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가 일을 나가는 모습을 볼 때도, 희자와 이야기할 때도 할머니는 이상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이야기하다 웃음이 나올 때는 더 그랬다. 웃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가서는 안 되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할머니는 웃음을 삼갔다. - P197

새비 아주머니는 술을 한 잔 마시고는 손뼉을 치면서 숨이 넘어가라 웃기 시작했다. 얼굴이며 목이 온통 울긋불긋했다.
– 너이 아바이 닮아서 기렇구나. 우리 아바이고 오라비고 다 술을 못 먹어서 저랬디.
명숙 할머니가 새비 아주머니를 보고 혀를 찼다. 명숙 할머니는 깍두기를 안주 삼아 빠르게 술을 마셨다.
– 고모는 수녀회에서 술 마시는 거나 배워왔더래?
새비 아주머니가 명숙 할머니를 가리키면서 웃었다.
– 에이, 미친년. 술이나 먹고 실컷 웃어라.
그때 명숙 할머니가 새비 아주머니를 어떤 표정으로 보았는지 할머니는 기억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얼굴에 어리던 슬픈 마음을, 다가가 어루만져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그리고 그 마음에 깃든 깊은 애정을 할머니는 새비 아주머니를 보는 명숙 할머니의 얼굴에서 발견했다. - P198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꼈다.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은 증조모로부터 온 것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좋다, 행복하다, 만족스럽다, 같은 표현을 하면 증조모는 부정 탄다고 경고했다. 자식이 예쁠수록 못났다고 말하고, 행복할수록 행복하다는 말을 삼가야 악귀가 질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늘 그런 것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 말이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었으니까. 아무리 불안에 떤다고 해도, 좋은 순간을 그대로 누리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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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는 "자신이 더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우리가 하는 이 일들은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즉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꿨지?" 그는 사용하기 더 쉬운 기술을 만드는 일이 곧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설계자와 기술 전문가로서 얻은 가장 큰 배움 중 하나는, 무언가를 사용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 꼭 인간성에도 좋은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더 나은 사람이 될 자유를 주는 기술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아버지의 헌신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비전에 따라 살고 있는지 자문했다. - P186

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러니 중 하나는, 비반응적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신적 공간을 마련하는 마음챙김 워크숍이 페이스북과 구글에서 무척이나 인기를 끈다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이 세상이 마음을 챙길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가해자인데 말이죠." - P188

언젠가 제임스 윌리엄스(내가 만난 전 구글 전략가)는 일류 기술 설계자 수백 명 앞에서 강연을 하며 "현재 자신이 설계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싶은 분이 얼마나 계십니까?"라는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강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189

트리스탄은 내부에서 이러한 유인책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지켜보았다. 그는 내게 다음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말했다. 한 엔지니어가 사람들의 집중력을 개선하거나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는 약간의 수정을 제안한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2주에서 4주 후에 게시판에 관련 지표에 대한 리뷰가 올라옵니다. 관리자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봐, 왜 사이트에서 보낸 시간이 3주 전보다 낮아졌어? 아, 우리가 이 기능을 추가 해서 그런 걸 거야. 이 기능 다시 없애고, 수치가 회복되는지 보자고" 이건 음모론이 아니다. KFC가 사람들이 프라이드치킨을 더 많이 먹길 바란다는 말이 음모론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건 우리가 구축해서 계속 허용하고 있는 유인 구조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트리스탄은 말한다. "그들의 사업 모델은 스크린타임이지, 우리의 일생이 아니에요. - P198

우리의 집중력을 좀먹는 현재의 기술 작동 방식은 과거나 지금이나 선택의 결과다. 이 방식은 실리콘밸리의 선택이며, 실리콘밸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는 사회 전반의 선택이다. 과거에 인간은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었고, 현재에도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다. 트리스탄은 이러한 기술을 전부 그대로 보유하면서, 최대한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방향으로 설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정반대의 목표를 가지고 이 기술들을 설계할 수 있다.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을 최대한 존중하고, 사람들을 최소한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더 중요하고 유의미한 목표에서 사람들을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목표 성취를 돕도록 기술을 설계할 수 있다. - P200

진짜 논쟁은 이것이어야 한다. 어떤 기술이, 어떤 목적에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 설계되는가? - P201

페이스북(과 다른 모든 소셜미디어 기업)이 뉴스피드에서 우리가 볼 정보를 결정할 때, 이들에게는 보여줄 내용이 수천 가지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가 무엇을 볼지 자동으로 결정하는 코드를 작성한다.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알고리즘, 즉 우리가 무엇을 어떤 순서로 볼지 결정하는 방식은 무척 다양하다. […]
이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알고리즘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일관된 핵심 원칙이 하나 있다. 소셜미디어는 우리가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게 만들 정보를 보여준다. 그게 다다. 우리가 화면을 더 많이 들여다볼수록 그들이 버는 돈도 늘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알고리즘은 언제나 우리가 핸드폰을 내려놓지 않도록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보를 파악해서 그 내용을 점점 화면에 들이붓는다. 알고리즘은 집중을 방해하도록 설계된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이러한 원칙이 (매우 뜻밖에도,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또 다른 변화로 이어지며, 이 변화가 믿기 힘들 만큼 중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 P202

퓨리서치센터의 한 연구에 따르면 페이스북 게시물을 ‘분개한 반대 의견‘으로 채울 경우 ‘좋아요‘ 수와 공유되는 횟수가 두 배로 는다. 그러므로 우리를 화면 앞에 붙잡아두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알고리즘은 (의도는 없었지만 불가피하게) 우리를 화나고 격노하게 만드는 일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분노를 많이 일으킬수록 참여도도 높아진다. - P204

많은 사람이 많은 시간을 분노하는 데 쓰면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다. 트리스탄이 말했듯이, 이러한 현상은 ‘증오를 습관화‘한다. 증오가 우리 사회의 뼈대에 스며드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내가 10대였던 때 영국에서 열 살인 두 어린이가 막 걸음마를 뗀 제이미 벌저jamie Bulger라는 유아를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다. 이에 당시 보수당 총리였던 존 메이저john Major는 우리가 "비난은 조금 더 많이, 이해는 조금 더 적게" 할 필요가 있다고 공개 발언했다. 14살이었던 내가 총리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 했던 것이 기억난다. 악랄한 행동일지라도 (어쩌면 악랄한 행동일수록 더욱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언제나 더 낫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에 보상하고 자비에 벌을 주는 알고리즘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오늘날 (비난은 더 하고 이해는 덜 하는) 이러한 태도는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모두의 반응이 되었다. - P204

우리가 거짓말 속에서 길을 잃고 끊임없이 동료 시민에게 화를 내면 여기서부터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우리는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리가 집단으로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더 커지고 악화된다. 그 결과 사회는 위험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더 위험해진다.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 위험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더욱 각성 상태가 된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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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 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 P155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 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 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P156

"그때 지연씨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이게 숨구멍이라는 말. 이 공부를 할 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다고 했어요."
그때의 내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세계가 지구 밖에 있다는 사실은 나의 유한함을 위로 했다. 우주에 비하자면 나는 풀잎에 맺히는 물방울이나 입도 없이 살다 죽는 작은 벌레와 같았다. 언제나 무겁게만 느껴지던 내 존재가 그런 생각 안에서 가벼워지던 느낌을 나는 기억했다. 무리를 이루는 듯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도 철저히 혼자이며,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있던 물질들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느껴왔던 슬픔을 설명 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그 순진무구한 사랑은 대학원에 진학 하면서 차츰 빛을 잃어갔고, 그 자리는 현실적인 크기의 희망으로 대체됐다. 나의 숨쉴 구멍이었던 존재가 일이 되고, 나의 가능성이 한계가 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P158

"이티가 착한 애잖아요. 손가락으로 빛을 밝혀서 사람들 다친 데도 고쳐주고, 친구도 되어주고. 엄마 따라 극장 가서 그 영화를 봤는데 어느 장면에선가 이티가 저를 보는 거예요. 카메라를 보는 게 아니라, 모두를 보는 게 아니라, 극장 맨 앞좌석에 앉아 있는 나를 보는 거죠. 내가 자기를 보는 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해요. 이티가 마지막에 자기 별로 돌아갈 때 얼마나 울었는지 엄마가 부끄럽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 이후로 밤이 되면 하늘을 올려다 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어릴 때 친구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하늘을 올려다보면 거기 어딘가에는 내 친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팀장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린 팀장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예의바르고 말을 가려 하고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잘 얘기하지 않는 그녀가 내게 틈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이 위안이 되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잠자리에 누워서야 어쩌면 그것이 그녀 방식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58

– 봄이야. 우리 봄이야.
봄이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증조모를 올려봤다.
– 여기서 헤어지자. 이제 우리를 따라오지 말라는 말이야. 내레 미안해······
증조모의 말이 끝나자 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의 냄새를 한 번씩 맡더니 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 멀어졌을 때야 한 번 뒤돌아봤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혹시나 봄이가 돌아올까봐 봄이의 이름도 부르지 못했다. 등을 돌린 채로 걸어가는 봄이를 보며 할머니는 목에 두른 목도리가 다 젖도록 소리 없이 울었다. 그후로 누구도 다시는 봄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봄이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그냥 개일 뿐이야.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그런 거짓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 P161

– 작은 간나가 애 하나 데리고 기렇게 내려가기가······
증조모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새비 아주머니가 걱정 되어 견딜 수 없을 때면 증조모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냈지만 곧 침묵했다. 할머니는 피난을 떠나려는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를 만류하지 않았던 증조부가 미워졌다. 그래서는 안 됐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를 그런 식으로 보내는 건 아니었다고.
– 기래두 아바이가 있어서 다행인 기야.
증조모가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두려웠다. 헛간에서, 마당에서, 뒤뜰에서 잘 때, 때로는 운이 좋아 사랑채나 행랑채에서 잘 때에도 두려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피난길을 가는 여자에게는 인민군, 국군, 미군, 중공군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았다. 밤마다 민가를 다니면서 여자를 강간하는 군인들이 어느 쪽인지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었으니까. - P165

– 어마이.
– 됐다.
– 이렇기 간다는 말이시까.
– 기래.
– 어마이, 이러지 마시라요.
말이 끝나자마자 증조모가 할머니의 얼굴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다음에는 머리를 쳤다. 바닥에 쓰러질 정도로, 증조부가 말릴 때까지. 아이는 더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길을 걷다보니 해가 졌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 P166

"너희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이런 계절이었어. 장례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도무지······ 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여기 길가에 서서 계속 맴돌았어. 겁이 나더라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 세상에 엄마가 없다는 게 진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계속 맴돌았지. 옛날 사람들 말이 맞아. 딸의 곡성은 저승까지 들린다고······ 그렇게 한 해를 괴롭게 지내다가 네가 놀러왔을 때 얼마나 반갑고 좋았던지 몰라. 세상에는 끝나는 것들만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너를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할머니가 개망초꽃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지금 너도 남몰래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할머니의 말이 내게 꼭 그렇게 들렸다. 끝나는 것들만 생각하지 마. - P168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한글과 숫자를 배웠고 시계를 읽는 법을 배웠고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나는 엄마에게 죽은 언니와 놀았다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 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그렇게 지내면서 나는 내가 정말 오랜만에 온전하게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사논문을 쓰고, 박사 후 과정을 밟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남편의 배신을 알게 되고, 이혼하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희령으로 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앞만 보며 달려왔었다.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느끼고 싶지 않아 나에게 더 큰 상처를 주면서. - P172

전남편에게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얼어붙은 강물이라는 말을 즐겨 했다. 시간은 환상일 뿐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이라는 것 또한 커다란 환상일지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식의 생각에는 분명 이점이 있었다. 그런 믿음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후회의 덫에서 구원해준다.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현재의 고통이 없었으리라는 사고의 공회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속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건 일어날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 P173

"지연씨 사정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적 영역의 감정이 공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줘선 안 되는 거잖아요."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사과했다. P선배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선배가 건넨 파일을 한번 더 봤다. 있을 수 없는 실수였다.
지연씨 사정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내 사정을 들어서 안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나의 실수가 사생활 때문일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 생각을 어떻게 내게 전할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런 이야기를 듣도록 빌미를 제공한 나의 실수가 문제인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다니.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에 몸이 떨렸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흠 잡힐 일이 없도록 어느 때보다도 더 노력해야 했다. - P174

새비 아주머니의 고모 집은 대구의 비산동이라는 곳에 있었다. 피난민 수용소가 있는 곳이어서 골목은 물론이고 큰길을 걸을 때도 사람과 부딪치지 않는 게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
[…] 마치 죽 속 밥풀처럼, 모두가 개어져서 하나의 대접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밀접함이 아득했다. 모두가 살고자 연고도 없는 그곳으로 모인 것이었다. - P177

개성에 찾아온 두 사람을 피난길로 몰았던 것은 그녀의 가족이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봤지만 개성에 두고 온 봄이 생각도 났다. 피난길에서 본 광경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되도록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처마밑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동안 그간 한쪽에 밀쳐뒀던 생각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나왔다. 쌀 한 톨, 장작 한 조각도 나오지 않는 쓸모없는 생각이라는 것이. - P178

– 영옥이 언니.
할머니는 희자야, 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려움이 그제야 몸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정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할머니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가 대구까지 무사히 왔으리라고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희망이 꺾였을 때의 충격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작은 희망까지도 모두 버린 채로 피난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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