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여느 날처럼 낭독을 마치고 물을 마시는데 명숙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얼굴이 아니라 대문을 바라보고 이야기해서 꼭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 내레 어릴 적에 소설 읽어주던 이들이 있었다이. 책방에서 『홍길동전』두 읽어주구 『사씨남정기』랑 『임진록』두 읽어주구. 내레 기걸 참 좋아했더랬어. 넋을 농구선 이야기를 들었다이. 어마이가 이야기 좋아하믄 가난해진다고 해두 어쩔 수가 없었다. 기게 참 좋았더랬어.
그 말을 하는 명숙 할머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 P186

내가 아직 서울에 살 때 엄마가 집에 왔다가 정신과 약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봉투에 인쇄된 약 이름을 핸드폰으로 하나하나 검색해보고 나서 엄마는 차갑게 말했다. 내게 실망했다고, 힘든 일이 있다고 무턱대고 약을 먹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서 곧 끊을 거라고 약속했었다. 엄마와 맞서 싸웠다면 엄마는 결국 자신이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정신과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 P190

이런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엄마나 나나 서로에 대해 많은 걸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이렇게 부딪치게 된 걸까.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결국 엄마를 공격하게 되는 패턴을 반복하고야 말았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 자신을 꺾지 않고 나를 비난하는 엄마를 견딜 힘이 내게는 없었다. - P191

– 보통이 아니구만.
혼잣말하듯 무심하게 한 말이었지만 명숙 할머니에게 칭찬을 듣자 할머니는 가슴이 뛰었다. 명숙 할머니가 보기에 할머니의 바느질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 하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자 할머니는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칭찬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할머니는 그후로 매일 명숙 할머니 곁에 붙어서 바느질을 손에 익혔다. - P195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뒤에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 악의 없는 웃음을 보이면서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흔하고 흔했다. 그런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성질인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명숙 할머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고양이 같았다. 움직이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걷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그랬다. 고양이 중에서도 결코 인간의 무릎에 앉지 않고, 인간에게 치대지 않는 고양이라고 해야 할까. 늘 인간에게서 등을 돌려 앉고, 인간이 자신을 보지 않을 때는 멀리서 바라보다가도 눈길을 주면 외면하는 척하는 고양이. 명숙 할머니는 그런 고양이를 닮아 있었다. - P195

밤에 잠이 들면 증조부가 나오는 꿈을 꿨다. 전쟁이 다 끝나고 나서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온 증조부를 맞는다. 그 장소는 늘 개성의 집이다. 이상하게 봄이는 귀도 아직 퍼지기 전인 어린 시절 모습이다. 봄이가 전쟁을 지나고 다시 아기 강아지가 됐구나, 감탄하면서 할머니는 봄이와 함께 증조부를 환영한다. 그가 증조부라는 건 알지만, 그의 얼굴은 언제나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나면 가슴이 서늘했고 증조부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국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한 중조부의 마음이 무엇인지 할머니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증조부가 죽지 않기만을 바랐다.
밥을 먹을 때도, 바느질할 때도,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가 일을 나가는 모습을 볼 때도, 희자와 이야기할 때도 할머니는 이상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이야기하다 웃음이 나올 때는 더 그랬다. 웃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가서는 안 되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할머니는 웃음을 삼갔다. - P197

새비 아주머니는 술을 한 잔 마시고는 손뼉을 치면서 숨이 넘어가라 웃기 시작했다. 얼굴이며 목이 온통 울긋불긋했다.
– 너이 아바이 닮아서 기렇구나. 우리 아바이고 오라비고 다 술을 못 먹어서 저랬디.
명숙 할머니가 새비 아주머니를 보고 혀를 찼다. 명숙 할머니는 깍두기를 안주 삼아 빠르게 술을 마셨다.
– 고모는 수녀회에서 술 마시는 거나 배워왔더래?
새비 아주머니가 명숙 할머니를 가리키면서 웃었다.
– 에이, 미친년. 술이나 먹고 실컷 웃어라.
그때 명숙 할머니가 새비 아주머니를 어떤 표정으로 보았는지 할머니는 기억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얼굴에 어리던 슬픈 마음을, 다가가 어루만져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그리고 그 마음에 깃든 깊은 애정을 할머니는 새비 아주머니를 보는 명숙 할머니의 얼굴에서 발견했다. - P198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꼈다.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은 증조모로부터 온 것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좋다, 행복하다, 만족스럽다, 같은 표현을 하면 증조모는 부정 탄다고 경고했다. 자식이 예쁠수록 못났다고 말하고, 행복할수록 행복하다는 말을 삼가야 악귀가 질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늘 그런 것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 말이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었으니까. 아무리 불안에 떤다고 해도, 좋은 순간을 그대로 누리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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