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키 큰 소나무 그늘에 누웠다. 등에 닿는 풀밭이 시원하고 흔쾌했다. 머리가 가슴보다 낮아지자 피가 양 관자놀이 사이에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다이애나가 내 가슴을 베고 누웠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 흉곽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내 몸에 대한 일종의 불가사의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때의 기분을 살라 데이 노베에서 느끼고 있었다. 어떤 독자적인 의지가 내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시계 장치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내 장기들의 작동과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관통해 흐르는 피가, 내가 지금 ‘나‘라고 느끼는 무언가가, 내 생각이나 감정과는 동떨어진 어떤 다른 존재 질서에 속한다는 느낌 말이다. - P36

내 생각은 그때 로마로 오기 전에 며칠 묵었던 트리폴리에서 옛날 친구와 나눈 대화로 흘러갔다. ‘욕망과 욕망의 지속이 어떻게 동경과 충족되지 않은 소망과 좌절된 욕구에 의지하는가‘에 관한 대화였다. 친구가 그런 얘기를 하던 밤, 우리는 어릴 때 살던 도시를 거닐고 있었다. 최근의 혁명과 뒤이은 내분으로 파손된 건물들이 보였다. 예전에 살던 익숙한 곳이라고 돌아온 도시가 그새 완전히 달라져 낯선 장소가 되어 버린 꼴이었다. 친구가 말을 이었다. "목적을 이루는 순간 욕망은 죽어. 어떤 사람, 어떤 것에 대한 우리 열정을 살아 있게 해 주는 건 달성의 가능성이지." […] "욕망이 원하는 완전한 정복과 욕망이 계속 존재하는 데 필요한 불가사의, 즉 알 수 없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있어. 욕망은 영양실조를 통해서만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동물이야. 진화적 측면에서 보면, 실패는 욕망의 필요조건이고 좌절은 그 모체지." 이처럼 설득력 있게 얘기되다 보니, 나는 친구의 논 제에서 일말의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 열정과 추상적 개념들과 과장들에서 진심으로 큰 환희를 느꼈다. 쏘아 올린 돌멩이가 곧바로, 잘못하면 우리 머리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몇 시간씩 별을 향해 새총을 쏘던 어릴 적에는 늘 이러지 않았던가? - P37

콘래드가 쓴 바로는 "호기심은 자기 현시의 한 형태로서, 체계적으로 무관심한 인물은 늘 얼마간 불가사의한 존재로 남는다." 이 장면이 아마 소설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욕망의 순간이다. 정체를 숨기는 데 도움이 되었던 위니의 의심하지 않는 성격이 자신에게도 작동해 기묘하게도 그녀를 더 원하도록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벌록이 깨닫는 것도 이때다. - P39

"이렇게 보는 전망이 정말 멋져." 아내는 그전에 다른 도시들에서도 그런 말이나 그 비슷한 말을 했지만, 지금 로렌체티의 정치적 의도에 둘러싸여 생각하기로, 로마에서의 그날에 그런 말을 한 것이 더없이 적절했던 건, […] 우리가 그날 오전 대부분을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앞에 말없이 서서, 혹여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을세라 멀찍이 든 자신의 전리품, 그 거대한 몸통 없는 머리통을 꼴사납다고 여기는 듯한, 비극적인, 거의 후회하는 듯한 다윗의 표정을 보며 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골리앗의 노회한 눈은 먼 곳을 응시한다. 어떤 꿈속에 사로잡힌 듯이, 또는 반대로 죽음 때문에 고요히 이어지던 나날에서 깨어난 듯이, 충격받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다. 어느 쪽이든, 골리앗은 우리로서는 볼 수도 없고 본 적도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 - P41

우리가 골리앗을 보는 다윗을 보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골리앗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려질 수도 없다. 골리앗은 이제 우리 경험의 범위 바깥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모든 것을, 과거와 미래와 특히 다윗 자체를 덜 안전하게 만든다. 다윗은 그걸 예민하게 느낀다. 우리는 다윗이 새로운 진실을 이해하고 그에 저항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복수가 골리앗에게 우위를 주었다는 진실, 우리가 적을 처형하는 순간 적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으로 달아나 버린다는 진실, 또는 내세의 부재 속에서 적의 일대기는 마감되었고, 그러므로 더는 변경될 수 없다는 진실을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폭군들이 가장 맹렬한 적을 감금 상태로 살려 두는 쪽을 더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여기 골리앗의 경우처럼 죽은 자의 마지막 주장이 그 침묵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다윗의 얼굴에 후회의 기색이 비치겠는가? 아마도 골리앗을 살해한 것이 그에게 새로운 연민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다윗은 승리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의 어린 생에서 아마 처음으로 자기 행위의 여파를, 다른 사람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룬 자기 성취의 규모를 명확하게 가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 P44

비관론자냐는 질문을 받은 영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본드 (Edward Bond)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게 희망의 몸짓이 아니라면 내가 왜 당신과 얘기를 하고 있겠소?" 로렌체티의 〈좋은 정치의 알레고리>,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그리고 실로 예술사 전체가 그렇게 읽힐 수 있다. 희망의 몸짓이자 욕망의 몸짓으로서, 사랑하는 이와 이어지려는, 아내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려는, 의도와 발화 사이에 존재하는 남모를 비극적 거리를 건너뛰어 마침내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는,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어떤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보이기 위해, 인식되기 위해, 다른 누군가로 오인되지 않기 위해, 우리를 제일 잘 아는 이들에게 동일성을 인정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변화하려는, 인간 정신이 품은 비밀스러운 야망의 작용으로서 말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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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내에서 헤일에 대한 신경검사와 심리검사가 시행되었다. 검사 담당자는 헤일에 게 "억압이나 명백한 정신이상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지극히 사악한 요소들이 그의 기질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헤일은 문명인의 껍데기로 야만성을 감춘 채,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나라를 일구는 데 기여한 미국의 개척자 행세를 했다. 검사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뻔히 드러난 죄를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의 형편없는 판단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의 정서는 적절하지 않다. 그가 혹시 수치심이나 후회를 느꼈다 해도, 이미 그런 감정들을 잊어버렸다." 화이트는 헤일의 심리를 분석한 검사자의 글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과학을 뛰어넘는 사악함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헤일은 교도소 규정을 잘 따르면서도 계속 석방을 도모했다. 항소심을 맡은 법원에 뇌물을 주려고 시도했다는 말도 있었다. 이런 노력이 실패한 뒤에도 그는, 검사 담당자가 보고서에 썼듯이, "영향력 있는 친구들을 통해 석방 될 가능성이 높다"고 자랑했다. - P322

몰리의 인생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녀와 오세이지족은 부패한 후견인 제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줄곧 투쟁한 끝에 1931년 4월 21일 법원으로부터 몰리가 더 이상 주정부의 피후견인이 아니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법원은 또한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판결한다. 오세이지 분할 토지 285번 소유주인 상기 몰리 버크하트는 (…)이로써 법적인 능력을 회복할 것이며, 따라서 그녀에게 법적인 능력이 없다고 판결한 명령은 철회된다." 몰리는 마흔네 살에야 비로소 자신의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온전한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 P323

후버는 곧 수사국과 동의어가 되었다. 대통령이 몇 번이나 바뀌 었어도, 그는 예전과 달리 허리가 굵어지고 불도그처럼 턱살이 늘어진 모습으로 계속 자리를 지켰다. "시선을 들어 보니 저 멀리 높고 조용한 발코니에 J. 에드거 후버가 있었다. 그는 대통령이 바뀌어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그의 안개 왕국을 등 뒤에 두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잡지 〈라이프〉의 기자가 쓴 글이다. 후버의 권력남용 실태는 1972년에 그가 세상을 떠 난 뒤에야 밝혀졌다. 화이트는 눈치가 빠른 편인데도 보스의 과대 망상증, 수사국의 정치화, 그가 공공의 적으로 점찍은 사람들에 대한 편집증 환자 같은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점점 늘어나기만 하던 후버의 공공의 적 명단에는 미국 인디언 활동가들도 포함되었다. - P330

포허스카에도 버려진 건물들이 가득하다. 그래도 포허스카는 아직 도시로서 남아 있기는 하다. 지금은 이런 도시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현재 포허스카에는 3,600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학교도 있고, 법원도 있다(어니스트 버크하트의 재판이 열린 바로 그곳이다). 맥도널드를 포함한 식당도 여러 곳 있다. 또한 포허스카는 여전히 활기찬 오세이지족의 중심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오세이지족은 2006년에 자기들만의 새로운 헌법을 비준했다. 현재 2만 명 규모인 오세이지족은 자체적인 투표를 통해 구성한 정부도 갖고 있다. 대다수의 오세이지족은 오클라호마주와 미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오세이지 카운티에도 약 4,000명이 남아 있다. 오세이지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루이스 F. 번스는 자기 부족이 "갈기갈기 찢어진" 뒤 "과거라는 재 속에서" 다시 일어났다고 말했다. - P342

이 박물관에서 가장 극적인 사진 하나가 전시실 한 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1924년에 어떤 행사에서 찍은 이 파노라마 사진에 는 오세이지 부족원들과 이 지역의 저명한 백인 사업가들, 지도자들이 모두 있었다. 이 사진을 훑어보면서 나는 한 부분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마치 누가 가위로 잘라낸 것 같았다. 레드 콘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에 전시하기에는 너무 고통 스러워서요."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사진의 빈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악마가 바로 저기에 서 있었거든요."
그녀는 잠시 사라졌다가 사진에서 사라진 부분을 가지고 돌아왔다. 조금 흐릿해진 작은 조각 속에서 윌리엄 K. 헤일이 차가운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세이지족이 그의 모습을 잘라낸 것은 대다수 미국인들처럼 그 살인사건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 P344

역사연구가인 번스는 언젠가 이런 글을 썼다. "오세이지족이 그런 시련 속에서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남았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다. 우리가 그때 어떻게든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한 것들은 그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더욱 소중해졌다. 사라진 것들은 바로 예전 우리의 모습이므로 역시 귀중하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모아 우리의 존재 속에 깊숙이 보존해두고 내일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우리는 지금도 오세이지족이다. 우리는 선조들을 위해 노년에 이를 때까지 살아간다." - P346

그해 말에 어니스트 버크하트가 가석방되었다. 오세이지 부족위 원회는 결의안을 통해 "그토록 사악하고 야만적인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범죄현장에 다시 자유로이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항의했다. <캔자스시티 타임스>는 사설에서 이렇게 지적했 다. 오클라호마주 교도소에서 어니스트 버크하트가 가석방되면서 남서부의 역사상 아마도 가장 대단한 살인사건, 즉 오세이지족 인디언들이 석유와 관련된 권리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한 사건을 되새기게 되었다. (…) 그 냉혹한 음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범 인이 종신형 중 고작 10여 년을 복역한 뒤 석방되었다는 사실에서 가석방 제도의 고질적인 약점 중 하나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 P350

마지는 어니스트가 석방된 뒤 어떤 오세이지족의 집에 침입해 강도짓을 하는 바람에 다시 감옥에 갇혔다고 말했다. 1947년에도 어니스트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으나, 헤일은 리븐워스에서 20년을 복역한 뒤 석방되었다. 가석방 위원회의 관리들은 헤일의 나이(일흔두 살)가 고령이라는 점과 모범적인 복역기록을 감안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오세이지족의 한 지도자는 헤일이 "저지른 죗값으로 교수형을 당해야 마땅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오세이지 부족원들은 가석방 위원회의 결정이 헤일의 정치적 영향력의 마지막 흔적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다시 오클라호마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그의 친척들에 따르면 그가 그들을 찾아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망할 놈의 어니스트만 입을 다물었다면 우리는 지금 부자가 됐을 거야."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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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일은 거의 없다." 〈털사 트리뷴〉에서 나온 기자는 이렇게 썼다. "잘 차려입은 사업가들이 서 있을 자리라도 확보 하려고 부두노동자들과 다툰다. 사교계 여성들이 화려한 담요를 걸친 인디언 여자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챙 넓은 모자를 쓴 카우보이들과 구슬로 장식한 옷을 입은 오세이지족 추장들이 증언에 홀린 듯 귀를 기울인다. 여학생들은 자리에 앉은 채로 증언을 더 잘 들으려고 목을 쭉 뺀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이곳, 오세이지 왕국의 다양한 사람들이 피와 황금의 드라마를 보려고 모여들었다." 지역 역사가는 나중에 오세이지 살인사건 재판이 그 전해에 테네시에서 주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학교가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이 합법적인가를 놓고 벌어진 ‘원숭이 재판‘보다 더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고까지 말했다. - P286

판사와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들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지만 재판 진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질문이 하나 있었다. 백인 남성 열두 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미국 인디언을 죽인 백인 남성에게 벌을 줄 것인가? 한 기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개척지의 목부들 이 순혈 인디언을 대하는 태도는 (…)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 오세이지 부족의 한 유력인사는 이보다 노골적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배심원단이 이번 사건을 살인사건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가 문제다. 그들은 백인이 오세이지족 인디언을 죽인 사건이 살인인지, 아니면 단순히 동물학대 행위인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 P304

7월 29일에 증언의 무대가 마련되자 수많은 사람이 방청석에 자리를 확보하려고 일찌감치 법원으로 나왔다. 바깥 기온은 32도였 고, 법정 안에서도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검찰 측에 합류한 변호사 존 리가 일어나서 모두진술을 했다. "배심원 여러분, 윌리엄 K. 헤일은 헨리 론의 살해를 교사하고 도운 혐의로 기소되었고, 존 램지는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리는 이 보험금 살인사건에서 이 미 밝혀진 사실들을 사무적인 말투로 간략히 설명했다. 한 방청객은 "법정 싸움의 베테랑인 그는 법정에서 감정을 폭발시키거나 과장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조용하고 과묵한 태도가 그의 의도를 더욱 강렬히 강조해주었다"‘고 지적했다. 헤일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주 흐릿한 미소를 지었지만, 램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부채질을 하면서 이쑤시개를 씹어댔다. - P305

8월 7일에는 검찰 측이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곧 피고 측이 헤일을 증언대에 올렸다. 그는 배심원들을 향해 고집스럽게 말했다. "저는 론을 살해하는 계획을 짠 적이 없습니다. 그의 죽음을 바란 적도 없습니다." 헤일은 증인으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화이트는 검찰 측이 혐의를 충분히 입증했다고 자신했다. 버크하트 외에 화이트도 램지의 자백에 대해 증언했으며, 헤일이 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거짓말을 동원했다고 증언한 증인도 여럿 있었다. 로이 세인트루이스 검사는 헤일을 가리켜 "무자비한 죽음의 약탈자" 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인디언 부족이 백인 남자들의 불법적인 사냥감이 되었습니다. 인디언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재판에는 위대한 원칙이 걸려 있습니다. 미국 국민들도 언론을 통해 이 재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제 배심원 여러분이 맡은 바 역할을 할 때입니다." - P307

재판 장이 배심원들에게 물었다. "평결에 합의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배심장이 일어서서 말했다."없습니다." 재판장은 검찰 측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세인트루이스가 벌게진 얼굴로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심원 여러분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배심원들 중 적어도 한 명이 매수당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말을 이었다.
[…]
화이트는 기가 막혔다. 수사국이 3년 넘게 매달리고, 그가 1년 넘게 노력한 사건이 막다른 길에 가로막혀 있었다. 브라이언 버크하트가 애나 브라운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재판에서도 배심원들은 의견불일치로 평결을 내리지 못했다. 미국 인디언을 살해한 백인 남자에게 유죄평결을 내릴 백인 남자 열두 명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같았다. 오세이지족은 분노했다. 심지어 범인들에게 직접 벌을 내리자는 이야기도 오갔다. 화이트는 요원들을 보내 헤일을 보호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정당한 법의 처벌이 그에게 내려지기를 그토록 절박하게 바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 P307

화이트는 교도소의 환경을 개선하려고 애썼다. 나중에 그의 휘하에서 일했던 교도관은 이렇게 회상했다. "소장은 수감자들에게 엄격했지만, 그들에 대한 가혹행위나 조롱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화이트가 러든스키에게 쪽지를 보냈다. "자신이 오랫동안 나아가던 방향을 바꾸는 데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용기가 당신에게 있다면, 이제 그것을 보여줄 때입니다." 러든스키는 화이트의 이런 응원 덕분에 "희망의 빛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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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면서 많은 동물이 얼어 죽었다. 눈이 녹자 죽은 동물들의 사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야생은 때때로 이렇게 흉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속에서 아름다움이 피어난다. 그들의 몸은 대지로 스며들고, 땅을 비옥하게 한다. 그리고 찬란하게 아름다운 봄꽃을 피운다. - P210

"록마우스는 강에서 살았대요.
비버들이 어기적거리며 다가오자 로즈가 말했다.
"그런데 여러분이 댐을 쌓는 바람에 이곳에 갇히게 되었대요. 그것 때문에 계속 화가 나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고 내 아들을 해칠 권리가 있는 건 아니잖소!" 비버 씨가 소리쳤다.
"당연하죠!" 비버 부인이 소리쳤다.
"저라도 기분 나빴을 거예요. 집에서 멀리 떨어지는 건 정말 싫잖아요. 록마우스 씨,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패들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록마우스는 낙담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어‘라는 의미였다. - P213

"당연하죠! 다들 엄마를 좋아해요! 엄마는 내가 본 로봇 가운데 가장 멋진 로봇이에요. 정말이에요. 전 로봇을 많이 봤잖아요." 아들이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브라이트빌은 겨울을 나는 동안 수많은 로봇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로즈와 달랐다. 그들은 로즈처럼 동물의 언어를 배우거나, 혹독한 추위로부터 동물을 구해내거나, 어미 잃은 새끼 기러기를 입양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브라이트빌은 동물을 닮은 엄마의 말과 몸짓을 보면서, 엄마가 얼마나 특별한 로봇인지 새삼 깨달았다. - P228

로즈는 일어나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팔다리가 없는 로봇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로즈는 그저 말만 할 뿐이었다.
"제발 저를 비활성화하지 말아 주세요." 레코 1은 로즈의 말을 무시했다. 커다란 손이 로즈의 얼굴을 지나 뒤통수에 있는 무언가를 눌렀다.
딸깍. - P264

안개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파도가 바위를 때렸다.
갈매기들이 그 위를 빙빙 돌았다.
아니, 갈매기가 아니었다. 독수리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뭔가를 발톱으로 꽉 부여잡은 채 땅으로 내려왔다. 레코 3의 소총이 바닷가에 철커덕 떨어졌다. 기러기와 해달들이 재빨리 소총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레코 1을 향해 소총을 겨누었다.
사냥꾼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동물들이 소총을 갖고 있는 거지? 총 쏘는 법을 알고나 있는 걸까?
동물들은 알고 있었다.
기러기들은 방아쇠를 당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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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아요. 내가 다시 봄을 맞는다면 운이 좋은 것이겠죠. 날 가엾게 여길 필요는 없어요. 난 나름대로 괜찮은 삶을 살았으니까. 하지만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어요. 내가 다시 살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을 돕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겠다고요. 내가 평생 한 일이라고는 굴을 판 것밖에 없어요. 꽤나 멋진 굴도 팠죠. 하지만 나 말고 다른 이들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어요. 심지어 이런 겨울에는 나한테조차 쓸모가 없죠. 하지만 비버들은 이런 문제를 멋지게 해결했죠. 그들은 아름다운 댐을 만들었어요. 그 덕분에 커다란 호수가 생겼고, 많은 동물의 삶이 윤택해졌죠.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일 거예요." - P204

"맞아요! 로즈, 당신은 오두막을 지어 섬에 사는 동물의 절반 이상을 살렸어요. 우리가 당신을 괴물이라고 불렀는데도 말이죠. 내가 죽기 전에 이 빚은 꼭 갚겠어요." 딕다운이 말했다.
"당신의 우정이면 충분해요." 로즈가 말했다.
"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당신의 우정으로 충분해요. 친구는 서로 돕는 거니까요. 저는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 몸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답니다. 전 영원히 살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가능한 한 오래 살고 싶어요. 그건 친구들의 도움 없이는 힘들 거예요."
동물들은 로즈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힘겹게 싸우는지 생각했다. 야생의 삶은 모두에게 가혹했다. 그 사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물은 없었다. 하지만 로즈가 그 힘겨움을 조금 덜어주었다. 그리고 동물들도 할 수 있다면 로즈를 도울 것이다. - P204

늙은 거북이 크렉이 아주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모두가 귀를 열고 크렉의 말을 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겨울은 더 추워지고, 여름은 더 더워지고, 폭풍은 더 거세졌다는 거요."
"예전보다 바다가 더 높아졌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이해가 안 돼요 그 많은 물은 다 어디서 왔을까요?" 칫챗이 말했다.
"맞아. 해수면이 더 높아졌지. 우리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 이곳은 섬이 아니었다는구먼. 평지로 둘러싸인 산이었지. 그런데 땅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흘러들면서 서서히 섬으로 바뀌었다는군. 많은 동물이 홍수를 피해 산으로 도망쳤지.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동물이 모여든 탓에, 섬은 먹이가 충분하지 않았을 걸세. 전쟁과 질병, 기아가 섬을 휩쓸고 지나간 후 천천히 섬에 균형이 찾아왔고, 지금까지 우리는 그 균형을 지키며 살고 있는 거지." 크렉이 말했다. - P205

"전 제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전 그 말에 동의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집짓기를 잘 하니까!"
"로즈는 정원도 잘 가꿔요."
"로즈는 브라이트빌을 돌보는 게 목적일 거예요."
"아마도 제 목적은 다른 친구들을 돕는 건가 봐요."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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