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키 큰 소나무 그늘에 누웠다. 등에 닿는 풀밭이 시원하고 흔쾌했다. 머리가 가슴보다 낮아지자 피가 양 관자놀이 사이에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다이애나가 내 가슴을 베고 누웠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 흉곽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내 몸에 대한 일종의 불가사의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때의 기분을 살라 데이 노베에서 느끼고 있었다. 어떤 독자적인 의지가 내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시계 장치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내 장기들의 작동과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관통해 흐르는 피가, 내가 지금 ‘나‘라고 느끼는 무언가가, 내 생각이나 감정과는 동떨어진 어떤 다른 존재 질서에 속한다는 느낌 말이다. - P36

내 생각은 그때 로마로 오기 전에 며칠 묵었던 트리폴리에서 옛날 친구와 나눈 대화로 흘러갔다. ‘욕망과 욕망의 지속이 어떻게 동경과 충족되지 않은 소망과 좌절된 욕구에 의지하는가‘에 관한 대화였다. 친구가 그런 얘기를 하던 밤, 우리는 어릴 때 살던 도시를 거닐고 있었다. 최근의 혁명과 뒤이은 내분으로 파손된 건물들이 보였다. 예전에 살던 익숙한 곳이라고 돌아온 도시가 그새 완전히 달라져 낯선 장소가 되어 버린 꼴이었다. 친구가 말을 이었다. "목적을 이루는 순간 욕망은 죽어. 어떤 사람, 어떤 것에 대한 우리 열정을 살아 있게 해 주는 건 달성의 가능성이지." […] "욕망이 원하는 완전한 정복과 욕망이 계속 존재하는 데 필요한 불가사의, 즉 알 수 없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있어. 욕망은 영양실조를 통해서만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동물이야. 진화적 측면에서 보면, 실패는 욕망의 필요조건이고 좌절은 그 모체지." 이처럼 설득력 있게 얘기되다 보니, 나는 친구의 논 제에서 일말의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 열정과 추상적 개념들과 과장들에서 진심으로 큰 환희를 느꼈다. 쏘아 올린 돌멩이가 곧바로, 잘못하면 우리 머리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몇 시간씩 별을 향해 새총을 쏘던 어릴 적에는 늘 이러지 않았던가? - P37

콘래드가 쓴 바로는 "호기심은 자기 현시의 한 형태로서, 체계적으로 무관심한 인물은 늘 얼마간 불가사의한 존재로 남는다." 이 장면이 아마 소설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욕망의 순간이다. 정체를 숨기는 데 도움이 되었던 위니의 의심하지 않는 성격이 자신에게도 작동해 기묘하게도 그녀를 더 원하도록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벌록이 깨닫는 것도 이때다. - P39

"이렇게 보는 전망이 정말 멋져." 아내는 그전에 다른 도시들에서도 그런 말이나 그 비슷한 말을 했지만, 지금 로렌체티의 정치적 의도에 둘러싸여 생각하기로, 로마에서의 그날에 그런 말을 한 것이 더없이 적절했던 건, […] 우리가 그날 오전 대부분을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앞에 말없이 서서, 혹여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을세라 멀찍이 든 자신의 전리품, 그 거대한 몸통 없는 머리통을 꼴사납다고 여기는 듯한, 비극적인, 거의 후회하는 듯한 다윗의 표정을 보며 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골리앗의 노회한 눈은 먼 곳을 응시한다. 어떤 꿈속에 사로잡힌 듯이, 또는 반대로 죽음 때문에 고요히 이어지던 나날에서 깨어난 듯이, 충격받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다. 어느 쪽이든, 골리앗은 우리로서는 볼 수도 없고 본 적도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 - P41

우리가 골리앗을 보는 다윗을 보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골리앗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려질 수도 없다. 골리앗은 이제 우리 경험의 범위 바깥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모든 것을, 과거와 미래와 특히 다윗 자체를 덜 안전하게 만든다. 다윗은 그걸 예민하게 느낀다. 우리는 다윗이 새로운 진실을 이해하고 그에 저항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복수가 골리앗에게 우위를 주었다는 진실, 우리가 적을 처형하는 순간 적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으로 달아나 버린다는 진실, 또는 내세의 부재 속에서 적의 일대기는 마감되었고, 그러므로 더는 변경될 수 없다는 진실을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폭군들이 가장 맹렬한 적을 감금 상태로 살려 두는 쪽을 더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여기 골리앗의 경우처럼 죽은 자의 마지막 주장이 그 침묵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다윗의 얼굴에 후회의 기색이 비치겠는가? 아마도 골리앗을 살해한 것이 그에게 새로운 연민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다윗은 승리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의 어린 생에서 아마 처음으로 자기 행위의 여파를, 다른 사람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룬 자기 성취의 규모를 명확하게 가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 P44

비관론자냐는 질문을 받은 영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본드 (Edward Bond)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게 희망의 몸짓이 아니라면 내가 왜 당신과 얘기를 하고 있겠소?" 로렌체티의 〈좋은 정치의 알레고리>,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그리고 실로 예술사 전체가 그렇게 읽힐 수 있다. 희망의 몸짓이자 욕망의 몸짓으로서, 사랑하는 이와 이어지려는, 아내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려는, 의도와 발화 사이에 존재하는 남모를 비극적 거리를 건너뛰어 마침내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는,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어떤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보이기 위해, 인식되기 위해, 다른 누군가로 오인되지 않기 위해, 우리를 제일 잘 아는 이들에게 동일성을 인정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변화하려는, 인간 정신이 품은 비밀스러운 야망의 작용으로서 말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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