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하얀빛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생겼음을 눈치챈 아이가 다급해졌다. 긴장한 얼굴로 가방을 다른 손에 바꿔 들고는 그 침묵을 향해 걸어갔다. 침묵도 아이를 향해 힘껏 달려왔다. - P260
아이가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걸음을 조금 늦췄지만 사람들 사이로 뒤편의 시커먼 잿더미와 진흙 덩이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그러고는 사람들의 쥐죽은 듯한 침묵 속으로, 마치 그 죽어버린 공동묘지 같은 침묵을 깨버리기라도 하듯 달려왔다. - P267
달빛이 꼭 물 같았다. 밤이 깊고 조용해 졌다. 설이 가까웠음을 말해주는 하현달이 구름을 꿴 채로 하늘에서 움직였다. - P269
천막 안에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학자는 키가 큰 데다 일어서 있었고 아이는 원래가 왜소한데 앉아 있었다. 학자의 얼굴이 석판처럼 푸르스름하고 딱딱했다. 아이의 군복에서 나오는 위엄이 옅어졌다. 꼿꼿하고 태연하면서도 진지한 표정, 옷이 받쳐주고 있던 굳건함이 무너지고 내려앉았다. - P272
마음이 텅 비고 쓸쓸한 게 사람들에게 걷어차인 뒤 황야에 던져진 상갓집 개 같았다. 맥없이 웅덩이의 모래 언덕에 기대 누워서, 용광로 불가로 가서 오줌에 젖은 옷을 완전히 말린 다음에 판잣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다. 비통함과 체념에 한바탕 울어야 할 것 같았다. 분명 내가 울고 있으려니 생각하며 손으로 눈가를 더듬어보다가 양쪽 눈이 눈물 자국 하나 없이 말라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흘러넘치던 오줌마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오각별이 전부 불탔고 흠씬 두들겨 맞은 데다 젊은 죄인 넷이 내 머리에서 얼굴로 오줌을 누고 생식기로 머리를 치며 마지막 오줌 방울까지 털었는데, 두 눈이 오줌에 흠뻑 씻겼는데, 혀로 오줌의 지린 맛과 짠맛을 느낄 정도였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슬프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이 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느껴졌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이 온몸에 퍼지는 게 정말 이상했다. - P292
춘삼월의 밤, 황허 옛길의 광야는 싸늘했지만 밤바람 속에서 초목이 소생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병원의 소독약 냄새처럼 코와 정신을 일깨우며 일망무제의 사방으로 퍼졌다. 분명 나무를 찾아 볼 수 없는데도 어디에선가 버들개지가, 그 시기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콧구멍으로 날아들었다. 사람들이 전부 잠들었다. 몇 줄로 늘어선 건물들이, 학자가 보라색 물약으로 뭔가를 쓰느라 불을 켜놓은 곳만 빼놓고, 나머지는 전부 소등해 달빛 속에 녹아들었다. 마당 바깥의 초목에서 파릇파릇 연두색 움트는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밤벌레 우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전해졌다. 나는 그 소리를 밟으며 대문까지 걸어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땅에 떨어진 달빛이 수면처럼 고요하다가 가볍게 흔들리며 물결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 밀밭에서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밀싹들이 은색 달빛을 받아 희뿌옇게 빛났다. - P299
동남쪽 몇 리 밖으로는 99구에서 여러 날 동안 조성한 밀밭이 있고 서남쪽으로는 밀밭 몇 뙈기와 소금웅덩이가 있었지만 동북과 서북쪽 방향으로는 소금웅덩이와 끝없는 황무지만 펼쳐졌다. 봄이 되어 황무지의 소금땅에서 염기에 강한 쑥과 타터우차오가 연두와 검푸른 빛을 내기 시작하자 소금땅의 강렬하고 유황 섞인 짠내가 야생초의 비릿하고 싱싱한 내음으로 바뀌었다. 모래땅 정상에 올라 보니 동남쪽의 밀밭이 비단처럼 매끈하고 반지르르하게 펼쳐졌다. 한편 서북쪽 황무지는 들쑥날쑥하게, 아직 녹색으로 완전히 덮이지 못해 거친 흰색을 띠는 게 겨우내 미처 빨지 못한 이불을 대지 위에 펼쳐놓은 것 같았다. - P305
내 평생 가장 쓸쓸하고 조용한 삶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덟 배미의 땅을 가꾸고 김을 매고 물을 뿌리면서, 양지바른 밭머리에 앉아 밀이 보이지 않게 자라고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가할 때면 모래땅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른 새벽에는 모래땅 정상에 서서 일출을 바라보고 황혼에는 모래땅 비탈에 앉아 일몰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남쪽 언덕에 누워 햇볕을 쬐다가 이마에서 땀이 흐르면 태양을 등진 채 드러누워 광야의 바람을 쐬었다. 하늘 위 구름의 변화와 한밤중 달과 별이 움직이는 발걸음과 울림을 뚫어져라 바라 보기도 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여덟 배미의 밀밭 가장 자리에 누우면 펜을 들어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두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곤 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잠재우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차가운 모래땅을 꽉 움켜쥐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면 펜을 잡고 싶다는 열정에 가늘게 떨리는 손을 사람에게 잡힌 두 마리 토끼처럼 진정시킬 수 있었다. - P307
"재배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자신 있게 대답하면서 다시 아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하얀빛을 마주한 아이의 얼굴에서, 그 매끈하고 부드러운 피부에서, 마치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 겉면에 시간이 흐르면서 생긴 얇은 껍질처럼 이상하게 굳어 있는 기운을 발견했다. 그의 입술 위에는 우윳빛 솜털이 반짝이는데 그의 이마에는 아주 분명한, 하루 종일 흔들린 물결무늬 같은 흔적이 있었다. 나이 어린 모습은 예전과 똑같았지만 하루 종일 고단하게 일한 시골 아이 같았다. - P310
태양이 솟아오르자 지난겨울 황허 강변에서 솟구치던 불꽃처럼 동쪽이 붉어졌다. 황허 옛길에 일망무제로 펼쳐진 사막 평원이 태양 아래에서 초록 풀과 야생화로 눈부시게, 반지르르하게 빛났다. 나는 일출 속에서 야생풀을 밟고 뛰어다니며, 동쪽 하늘 아래 태양이 평원에 뿌리는 금빛 물속으로 한걸음에 뛰어갈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아, 아" 하는 거칠고 격한 외침이 살바람처럼 입을 뛰쳐나가 펑펑거리며 광야로 흩어졌다. 나는 단숨에 수십 걸음을 내달렸다. - P313
하늘에서 꾀꼬리 몇 마리가 꾀꼴꾀꼴하며,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검은 돌 같은 그림자를 던지고 날아갔다. 샘물에서 축축한 냉기가 올라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수건으로 몸을 덮은 것 같았다. 나는 글을 써야 했다. 반드시 써야 했다. 벌써 진짜 책의 제목과 첫머리를 생각해두었다. 지난밤 내내 잠들지 못하다가 마침내 제목과 첫머리를 결정했기 때문에, 그래서 비로소 봄꽃이 피고 대지가 녹색을 띠기 시작했다고 해야 옳았다. 나는 책 제목을 ‘옛길‘이라고 확정했다. - P314
"고목에 파인 상처가 결국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되는 것처럼, 위신구는 이 나라에서 가장 독특한 풍광과 역사를 갖고 있다." 『옛길』의 첫머리를 그렇게 적었다. 나는 시작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 문장을 다시 한 번 조용히 읽어본 뒤 길게 숨을 내뱉고 가슴과 팔을 넓게 펼쳤다. 이어서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신발을 꺾어 신고는 모래땅 무덤의 꼭대기에 섰다. 그때 나는 내가 거인처럼 느껴졌다. 가장 힘겨운 전투에서, 초반에 기세를 휘어잡은 것 같았다. 동녘의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넓은 벌판에 흐르던 붉은 물결이 사라졌다. 사막평원에 눈부신 노란빛이 흘러넘쳤다. 태양이 어느새 장대 높이만큼 올라갔다. 밤사이 녹색과 꽃으로 뒤덮인 황야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랑비 소리가 주위를 꽉 메운 것 같은, 촉촉하게 속살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P315
나는 더 이상 씨알 맺히는 소리가 반갑지 않았다. 심지어 짜증이 났다. 땅에서 몸을 뒤집어 혐오스럽다는 눈초리로 수십 포기의 갈대 같고 수수 같은 밀을 쳐다보다가 초막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일어서서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걷고 싶지 않았다. 기어가서 밀들에게 내가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내놓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자식들의 이해를 받으려고 통증을 과장하는 부모의 심정 같은 것이었다. - P340
사람들이 오만한 것을 보고 신이 노했다. 큰 비가 내려 홍수가 났다. 밤새 비가 내린 다음 날, 모두들 자신의 옥수수로 뛰어갔다가 팔뚝만큼 굵은 옥수숫대가 빗물에 고꾸라진 것을 발견했다.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각자의 이름을 적었던 종이판이 작은 배처럼 빗물 위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어차피 허벅지만큼 굵은 옥수수 이삭이 패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몇 달 내내 손가락에서 흘린 피가 아쉬울 뿐이었다. 오직 아이만이 울었다. 하늘을 원망하고 비탄해했다. 슬픔이 구름처럼 아이의 마음을 뒤덮었다. 아이가 울면서 소리쳤다. "어떻게 도성에 가지?" "이제 어떻게 도성에 가느냐고!" - P363
무척 추워서 건물 안이 광야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뼛속을 파고들고 마음까지 파고들었다. 추위와 배고픔에 누군가 밖으로 나가 빛이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음산하니 추웠다. 사람들은 옷이란 옷을 전부 껴입었다. 어디든 이불로 몸을 둘둘 말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배가 고파서 더 추웠다. 추워서 더 배가 고팠다. 추위와 허기가 극에 달하자 누군가 내일은 관두고 오늘이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왕 내일 죽을 거면 오늘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싶지 않다며 양치통에 반쯤 들어 있던 잡곡가루를 바람도 사람도 없는 곳에서 전부 끓였다. 죽을 만들어 전부 먹었다. 그릇에 붙은 찌꺼기까지 손가락으로 긁어 먹고 혀로 싹싹 핥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 끼를 먹자 몸이 따뜻해졌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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