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경우에는 분명한 해답이 나온다. 그곳은 원래 가축화· 작물화에 적합한 동식물이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곳보다 몇천 년 일찍 출발할 수 있었지만, 일단 그 선발 간격을 추월당한 뒤에는 더 이상의 지리적 이점이 없었다. 이 같은 간격이 사라져간 과정은 강성한 제국들이 점차 서쪽으로 옮겨진 경로를 통해 상세히 더듬어볼 수 있다. B.C. 4000~3000년경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국가들이 탄생한 후 처음에는 힘의 중심이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의 제국들 사이를 번갈아 이동하면서 줄곧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머물러 있 었다. 그러다가 B.C. 4세기 말 알렉산더대왕 치하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로부터 동쪽으로 인도까지 정복하면서 드디어 힘의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돌이킬 수 없는 첫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B.C. 2세기에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힘의 중심은 서쪽으로 더 이동했고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다시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이동했다. - P624

사실 콜럼버스가 다섯 번째 시도에서 수백 명이 넘는 유럽의 군주 가운데 한 명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은 바로 유럽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하자 다른 유럽 국가들도 스페인으로 흘러드는 부를 목격할 수 있었고, 그중 6개국이 아메리카의 식민지화에 더 가담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전개는 유럽의 대포, 전기 조명, 인쇄술, 소화기 등등 무수한 혁신의 경우에도 마찬 가지였다. 그 모두가 처음에는 유럽 일부 지역에서 무시당하거나 희한한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지만, 일단 한 지역에서 채택만 되면 결국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 P629

중국은 통일되어 있을 때가 많았고 유럽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었는데, 두 경우 모두 역사가 깊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지역들은 B.C. 221년에 처음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고, 그때부터 대체로 그 상태를 유지했다. 중국에서는 문자가 처음 생길 때부터 문자 체계라고는 하나 뿐이었으며, 장장 2000년 동안이나 문화적 통일성을 지켜왔다.
그러나 유럽은 먼발치에서조차 정치적 통일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유럽은 14세기까지도 1000개에 달하는 독립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1500년에는 500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1980년대에는 최소 25개국까지 줄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늘어나서 내가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순간에는 40개국에 가깝다. 유럽에는 아직도 45개 언어가 존재하고 그 모두가 나름대로 변경시킨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는 더욱 다양하다. 유럽경제공동체BBC를 통해 조금이나마 통일을 꾀하려던 시도조차 좌절되고 말 정도로 유럽은 오늘날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 같은 현상은 유럽에 뿌리박혀 있는 분열 지향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 P630

중국이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내부의 장애물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은 처음에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북중국, 남중국 해안 내륙이 각각 다른 농작물, 가축, 기술, 문화적 특징을 낳아서 그 모두가 차후 통일된 중국에 보탬이 되었다. 예를 들자면 기장 재배, 청동 기술, 문자 등은 북중국에서 시작되었고 벼농사와 주철 기술 등은 남중국에서 발생했다. 이 책에서 나는 대체로 강력한 장애물이 없을 때 이루어지는 기술 확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의 연결성은 불이익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어느 한 폭군의 결정은 당장 혁신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럽의 지리적 분할 상태는 서로 경쟁하는 수십 또는 수백 개의 독립 소국과 혁신의 중심지들을 만들어냈다. 그중에서 어떤 국가가 특정 혁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국가가 그 일을 했고, 따라서 이웃 국가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정복당하거나 경제적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장애물들은 정치적 통일을 막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지만 기술과 아이디어의 전파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처럼 유럽 전역의 유통망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폭군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 P633

히틀러의 경우처럼 개인적인 특이성으로 역사에 분명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은 그 밖에도 많다. 몇 명만 꼽아본다면 알렉산더대왕, 아우구스투스, 석가, 예수, 레닌, 마르틴 루터, 잉카 황제 파차쿠티(15세기에 광대한 잉카제국을 건설함-옮긴이), 마호메트, 정복왕 윌리엄, 줄루 왕 샤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단순히‘ 어쩌다가 그 시기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과연 그들은 실제로 얼마만큼이나 상황을 변화시켰을까? 다음은 이 문제에 대한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의 극단적인 견해다.
"보편적인 역사, 즉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룩한 업적의 역사는 본질적 으로 여기서 활동했던 거인들의 역사다." 이것과 반대되는 극단적인 견해는 프로이센의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장으로, 그는 칼라일과 달리 정치의 내면세계를 오랫동안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정치가의 일이란, 역사 속에서 걸어가는 신의 발소리를 듣고 그가 지나갈 때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문화적 특이성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특이성도 역사를 예측 불가능하게 하는 한 요소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역사는 환경적 요인은 물론이고 그 어떤 원인으로도 일반화시켜 설명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취지에 비추어본다면 개인적 특이성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아무리 ‘거인 이론‘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라도 역사의 가장 광범위한 경향까지 몇몇 거인의 손에 좌우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P6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토록 분명하게 정지된 세계의 이면에
수많은 생명의 움직임
몽롱한 상태에서 파도치는 생각들
새심한 배려
날마다, 열심히 누비고 다녔던 여정
계절의 행렬
커다란 기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때로는 바로 옆에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나와 함께 있어요
거의 모든 순간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사헬 지대, 에티오피아, 서아프리카 등 아프리카 토종 농작물의 원산지가 모두 적도 이북이라는 점이다. 적도 이남산 아프리카 농작물은 단 1종도 없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미 적도 이북에서 발생한 니제르콩고계 언어의 사용자들이 적도 부근의 피그미족이나 적도 이남의 코이산족을 교체할 수 있었던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피그미족과 코이산족이 농업을 시작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농경민 자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남아프리카의 야생식물은 작물화 하기에 부적합했다는 우연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어온 반투족이나 백인 농경민들도 수천 년에 걸쳐 농경의 경험을 축적했으면서도 남아프리카의 토종 식물을 식량 작물로 개발하지는 못했다. - P598

아프리카의 가축 목록에서 뜻밖의 사실이 나타나는데, 그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특징이다. 그것은 오늘날 아프리카를 유명하게 만들며 그만큼 수효도 많은 얼룩말과 누(소와 비슷한 남아프리카 영양-옮긴이), 코뿔소, 하마, 기린, 들소 등의 대형 야생 포유류가 이 목록에는 단 1종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적도 이남 아프리카에 토종 농작물이 없다는 현실과 더불어 아프리카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 P599

아프리카에서 실제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연대와 장소에 대해 고고학은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가르쳐주고 있을까? 서양 문명사에 푹 빠져있는 독자들이라면 아프리카의 식량 생산이 파라오와 피라미드의 땅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어쨌든 B.C. 3000년경의 고대 이집트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복잡한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곳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자를 사용했던 중심지 중 하나라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아프리카에서 식량 생산에 대한 가장 앞선 연대의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는 곳은 바로 사하라사막이다. - P600

그렇다면 사라진 코이산족에게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수만 년 동안 코이산족이 살았던 땅에 지금은 반투족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다만 근대에 들어와서 강철을 가진 백인 농경민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나 캘리포니아 인디언 등 석기를 사용하던 수렵 채집민들이 충돌했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바탕으로 짐작할 수는 있다. 이 같은 경우에 수렵 채집민들은 여러 방법에 의해 신속하게 제거되었다. 쫓겨나고 남자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여자들은 신부감으로 약탈당했다. 또한 남녀를 불문하고 농경민들의 유행병에 감염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말라리아가 그러한 질병에 속하는데, 이것은 농경민들의 촌락 주변에서 번식한 모기가 옮기는 병으로, 침입해온 반투족은 이미 유전적 저항력을 갖고 있었지만 코이산족 수렵 채집민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 P610

야생동물이 가축화되기 위해서는 충분히 온순해야 하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하고, 먹이가 저렴해야 하고, 질 병에 면역성이 있어야 하고, 성장이 빨라야 하고, 감금 상태에서도 잘 번식해야 한다. 이 같은 시험을 모두 통과한 야생동물은 전 세계를 통틀어 얼마 되지 않는다. 유라시아 원산의 소, 양, 염소, 말, 돼지 등도 그 속에 포함된다. 반면에 그와 비슷한 아프리카 동물들(아프리카들소, 얼룩말, 강돼지, 코뿔소, 하마 등)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끝내 가축화되지 못했다. - P6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메리카에 생긴 최초의 유럽 정착촌들은 1492년 콜럼버스가 세운 정착촌을 필두로 서인도제도에 몰려 있었다. 이들 섬의 인디언 인구는 ‘발견‘ 당시 100만 명이 넘었지만 질병, 추방, 노예화, 전쟁, 무차별 살인 등 으로 대부분의 섬에서 전멸되고 말았다. 1508년경 아메리카 본토에서는 처음으로 파나마지협에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그 이후 본토의 대제국이 었던 아즈텍과 잉카가 정복되었는데, 각각 1519~1520년과 1532~1533 년의 일이었다. 두 경우 모두 유럽인들이 퍼뜨린 유행병(아마 천연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황제들을 포함하여 전체 인구의 많은 부분이 그 병으로죽었고 나머지는 말을 탄 스페인인들이 처리했다.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월성을 지녔으며 아울러 원주민들의 분열 상태를 교묘히 이용하는 정치적 기술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북부에 남아 있던 원주민 국가들마저 유럽에 정복당했다. - P576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살아온 기간은 그 어느 대륙보다도 훨씬 길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약 7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해부학적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도 아마 그곳에서 처음 발생했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상호작용을 한 덕분에 아프리카 선사시대의 역사 는 아주 흥미진진한데, 그중에서도 특히 반투족의 팽창과 인도네시아인의 마다가스카르 이주, 두 가지 사건은 지난 5000년을 통틀어 인구 이동의 가장 극적인 사례에 속한다. 과거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여전히 중요 성을 갖고 있다. 결국 누가 누구보다 먼저 어디에 도착했느냐는 문제가 오늘날의 아프리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 P582

A.D. 1000년 당시 이미 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주요 다섯 인종은 일반인들이 대충 흑인, 백인, 아프리카 피그미족, 코이산족, 아시아 인종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림 19-1은 그들의 분포 지역을 표시한 것이다.
이 책의 5장과 14장에 실린 사진들을 훑어보면 피부색, 머리카락의 태 및 색상, 얼굴 생김새 등에서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흑인은 아프리카에만 있었고 피그미족과 코이산족은 지금도 그곳에만 살고 있다. 백인과 아시아 인종의 경우에는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 다섯 인종 속에는 인류를 구분하는 주요 인종 중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그 친척들을 제외한 모든 인종이 포함되어 있다. - P582

아프리카에서 건너간 아메리카 흑인들은 주로 아프리카 서해안 출신으로 동아프리카(북으로는 수단, 남으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동남 해안까지)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인, 리비아인, 모로코인 등이 포함된 백인들은 아프리카 북해안 일대와 사하라 북부를 차지했다. 이 북아프리카인들은 백인이라고는 해도 푸른 눈에 금발을 가진 스웨덴 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지만 남쪽에 있는 ‘흑인‘들에 비하면 피부색도 밝고 머리카락도 직모에 가까운 편이므로 일반인들은 대개 그들을 ‘백인‘ 이라고 부른다. 아프리카의 흑인과 백인은 대부분 농경이나 목축, 또는 두 가지를 겸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 P585

남아프리카 일대의 코사어를 비롯한 일부 니제르콩고계 언어에도 흡착폐쇄음이 많다. 더욱 의외인 것은 흡착폐쇄음이나 코이산 어 족의 낱말들이 케냐의 흑인들이 사용하는 아프로아시아계 두 언어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인 것이다. 케냐는 탄자니아의 하자족이나 산다웨족보다도 현존 코이산족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곳임을 생각한다면 더욱 놀라운 사실이다.
이 모든 사실로부터 우리는 코이산족과 그들의 언어가 원래는 현재의 분포 지역인 남아프리카보다 훨씬 북쪽까지 뻗어 있었는데 피그미족의 경우처럼 흑인들에게 침탈당하여 지금은 언어에서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신체를 연구하는 것으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우며 오직 언어학적 증거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 P591

반투족의 이점에 대한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 우선 살아 있는 현재로부터 또 다른 유형의 증거(가축화· 작물화된 동식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증거)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앞의 여러 장에서 확인했듯이 이 같은 증거가 중요한 까 닭은 높은 인구밀도, 병원균, 기술, 정치조직을 비롯한 힘의 요소들이 바로 식량 생산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지리적 입지라는 우연으로 인해 식량 생산을 시작하거나 물려받게 된 민족들은 그 덕분에 지리적 혜택을 덜 받은 사람들을 침탈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5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