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스스로를 못 박았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아이가 예수처럼, 스스로를 붉은 꽃이 가득 깔린 십자가에 못 박았다.
손과 발목의 피가 십자가 나무를 따라 아래로, 봄꽃이 하얀 나무에 농염하게 피어난 것처럼 방울방울 떨어졌다. 물이 바다로 떨어지듯 피가 꽃 위로 똑똑 떨어졌다. 누런 흙이 대지에 섞이듯 흙에 똑똑 떨어졌다. 아이의 얼굴은 고통이나 비틀림 없이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옅은 미소를 담고 있어 커다랗게 만개한 붉은 꽃이 하늘에, 십자가 꼭대기에 피어난 것 같았다. - P518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십자가 아래에 서서 붉은 꽃과 볶은 콩, 오각별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십자가의 아이를 바라보자 십자가를 따라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햇빛이 투명하고 금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피가 하늘에서 알알이 떨어지는 붉은 구슬 같았다. 참새와 까치 떼가 날아왔다. 자주색 구름이 황무지의 가없는 하늘에서 피어올랐다. 자주색과 청백색의 천사같이 생긴 구름이 멀리에서 십자가 상공으로 불어오자 까치들이 담장과 창문, 건물과 마당에서 일제히 고개를 들고 사람들이 알듯 모를 듯한 노래를 불렀다. - P518

모두들 제자리에 섰다. 확실히 방금 지나간 사람은 실험이었다. 그래서 얼른 손을 입가에 나팔 모양으로 모으고 큰 소리로 실험의 이름을 부르면서 왜 안으로 들어가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일가족과 짐을 끌며 석양 쪽으로 멀어졌다. 마른풀이 가을 들판을 날아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일가가 석양에 녹아들었다. 그러다 뒤따라온 무리들이 말해 주었다.
"저기는 땅은 넓은데 사람은 적고, 봄이 되면 만물이 꽃을 피워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들 무리는 안으로 갔고 작가는 모두를 이끈 채 밖으로 나갔다. - P524

신이 시시포스에게 내린 벌은 하늘이 대지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준 것과 같다. 시간은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인류의 몇몇은 시간이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뒤로 물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들 논리에 따르면 내일, 모레의 도래란 그림책을 맨 뒷장부터 한 장씩 앞으로 젖히는 것처럼 예정된 법칙을 뒤에서 앞으로 하나하나 펼쳐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는 기억으로 간직되지만 미래는 무지와 예측으로 점철될 뿐이다. - P528

시시포스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형벌이라고 보는, 처음에는 그도 똑같이 불안과 재앙이라고 여긴 일에 이미 적응했다. 시간이 그 모든 것에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적응은 시간의 적이자 무기가 되어 시간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아침에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리기 시작해 저녁이 되면 바위가 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다음 날 다시 새롭게 밀어 올리지만 또 떨어지는, 고리처럼 계속해서 반복되는 과정을 시시포스는 이미 의무이자 소임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시간의 범주를 내려놓고 오히려 생명의 유실과 소모의 의미를 깨달았다. - P529

아이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이가 시시포스의 무의미한 반복에 새로운 존재와 의미를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또 바위의 반복이 없다면 그는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아이를 보기 위해 시시포스는 매일 바위를 올렸다 내리는 일을 기다리고 열정적으로 행했다. 원망이나 거부감, 불평 없이 열심히 움직이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매일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따라 황혼 속에서 아이에게 말을 걸고 대화하면서 시시포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와 찬란한 빛이 생겨났다. - P531

징벌이 주는 고통이나 변화, 무료함, 황당함, 죽음 등에 일단 협력하거나 적응하게 되면 징벌은 의미를 잃게 마련이다. 징벌은 태형으로서의 힘을 잃게 되고, 적응은 무기력 함과 부득이함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도출해내게 된다. 이것이 인류가 진화하면서 발전시킨 체념과 타성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성의 체념 역시 의미 있는 저항과 능력을 갖는다. 타성은 순응을 낳고 적응은 힘을 갖는다. - P533

시시포스는 신이 내린 역방향 형벌에서 자신에 대한 신의 분노와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뒤집힌 처벌과 징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원래 바위가 굴러 내려갈 때는 그래도 뒤에서 수월하게 산을 내려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바위를 내려 보낼 때 힘껏 밀어야 하는 데다 바위가 저절로 올라간 다음에 뒤에서 따라갈 때, 이미 힘을 쓴 다음에 또 힘겹게 산을 올라야 했기 때문에 두 배의 체력과 정력을 쏟아야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원래 바위를 밀어 올릴 때는 다리와 허리를 구부린 채 고개를 들면 하늘의 환한 빛을 볼 수 있어서 아래에서 위로 올릴 때마다 하늘, 신과 가까워지고 교류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제 밀어 내릴 때는 하늘의 빛이나 별을 볼 수 없어 신과 천당, 정신과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산의 다른 쪽에서 밀어 내리고 올라가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다시 징벌과 금기가 육체와 영혼에 미치는 고통과 메마름을 느낄 수 있었다. - P534

생각하다 지쳐버린 그는 더 이상 신이 내준 문제를 고민 하지 않았다. 또한 그 괴상한 문제를 풀고 싶다는 소망과 갈망도 사라졌다. 새로운 순응이 새로운 이유와 힘을 주었고, 생각을 멈추자 안정되고 편안해졌으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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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퉁퉁 부어 반질거리는 얼굴이 햇빛 아래에 이르자 허공에 걸린 물주머니 같았다. 한낮의 마당에서는, 겨울이었지만 바람이 없어서 지면 위로 나른하게 따뜻함이 흘렀다. 99구 바깥의 광야에서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햇살을 받아 눈부신 빛을 반사해냈다. 사람들은 허기 때문에 현기증이 나서 멀리까지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저 발밑의 반쯤 마르고 반쯤 젖은 회색 모래땅을 보고 위에서 내려온 가장 높은 상부의 헝겊신을 볼 뿐이었다. 입구가 뾰족하게 파이고 검은색인 신발은 손바느질로 꿰맨 밑창이 눈처럼 하얬고, 밑창 옆에 사람들이 눌러 죽인 이의 피처럼 붉은 모래알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자를 세워놓은 듯 똑바로 날이 선 회색 모직 바지를 입고 있었다. - P388

어두워지기 직전의 마지막 붉은빛이 땅에 피처럼 스며들었다. 배고픈 나비가 피 바닥 위를 나풀나풀 날아가는 것처럼 학자가 붉은 피를 밟으며 걸어갔다. 뱃속에서 위장이 전부 물에 휩쓸려 내려갈 듯 꼬르륵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배가 고프다 못해 장이 뜯기듯 아팠다. 학자는 배를 움켜쥐고 힘껏 눌러 온몸의 힘을 다리와 발로 모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참새 한 마리가 아이의 숙사 입구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학자는 참새를 통째로 삼키고만 싶었다. 그래서 침을 꿀떡 삼킨 뒤 걸음을 멈추고 돌을 하나 집어 참새에게 던졌다. 하지만 호두만 한 돌은 참새 근처는커녕 멀찍한 곳에 떨어졌다. 돌 하나를 제대로 던질 힘마저 없었다. 참새가 학자를 보며 비웃듯 짹짹 하고는 날아갔다. - P397

종교가 아이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오른손으로 성모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후벼 팠다. 정말로 성모의 눈에 구멍이 뚫리고 눈동자가 종잇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종교가 성모의 다른 눈동자를 파내려 할 때 아이의 붉누른 낯빛이 검푸르게 변했다. 아이가 몸을 비틀어 사발의 콩을 움켜쥐고는 종교의 몸과 얼굴에 던졌다. 종교가 성모의 두번째 눈동자를 파내기 전에 볶은 콩이 그의 얼굴과 몸에 부딪혀 방 안 곳곳으로 튀었다.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매섭게 종교의 손을 노려 보았다.
종교가 깜짝 놀라 눈동자를 후비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아이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황급히 꿇어앉아 콩을 줍기 시작했다. 줍는 동시에 입으로 집어 넣었다. 콩을 씹는 소리가 석판에 못을 박는 것처럼 울렸다. - P401

이미 6개월이나 밀가루를 맛보지 못한 터라 그게 어떤 맛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얀 만터우 반 개를 자세히 살필 새도 없이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마르고 딱딱한 만터우 덩어리에 목이 메었지만 이내 침이 딱딱한 만터우로 스며들자 회백색을 띠는 만터우의 볶은 참깨 같은 향기가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입속을 휘감았다. 잇몸과 혀끝, 온몸의 위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통에 나는 향기를 제대로 음미할 틈도 없이 마른 만터우를 덥석덥석 베어내 뱃속으로 삼켜버렸다. 하얀 만터우 반 개를 다 먹은 뒤 이 사이에 남은 만터우 부스러기에서 비로소 만터우에서 났던 게 참깨 향이 아니라 밀가루 녹말과 땅콩기름이 한데 섞인 새하얗고 새빨간 냄새였음을 알았다. 그 맛을 음미하면서 학자 침대 앞에 잠시 멍하니 있었다. 만터우를 먹고 나자 진귀한 물건을 잃어 버린 것처럼 아쉬웠다. - P415

아이의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그리고 음악이, 연기자가 무대 뒤편에서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오는 것처럼 그 문에서 나왔다. 나보다 한발 먼저 돌아온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방금 거친 벌판에서 돌아갈 때만 해도 그녀는 평소처럼 짙은 남색의, 소맷부리가 해져서 녹색으로 덧댄 낡은 웃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잠깐 동안 그녀는 짙은 남색의 낡은 웃옷을 벗고 용광로에 갈 때마다 입던 담홍색의 깃이 짧고 허리가 잘록한 제복에 능직으로 짠 바지를 입고 입구가 네모나고 끈으로 장식된 무명 벨벳의 검정 헝겊신을 신었다. 음악이 지나간 자리에 콜드크림 냄새가 8월 계수나무 꽃이 눈앞에 피어난 것처럼 남았다. - P420

나는 고개를 돌려 얼른 아이의 문을 바라보았다. 음악이 문을 닫는 순간, 꽃 때문에 불타는 듯 붉은 아이의 침대 위에 또 종이를 잘라 만든 커다란 붉은 꽃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아이의 여원 그림자가 침대에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경쾌하게 문이 닫혔다. 내 시선이 칼로 싹둑 잘린 것처럼 문밖에서 끊어졌다. 나는 다시 햇살 아래에서 꼿꼿하게 거니는 수면 위의 불그스름한 수양버들 같은 음악의 날씬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P420

음악에 대한 미움인지, 아니면 젊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질투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만터우나 식량이 있다는 것 때문에 앞쪽 담벼락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내 감정은 한여름 발효가 끝난 똥통에서 나는 냄새처럼 시큼하고 구린 데다 강렬하기까지 했다. - P421

너무 추워서 사람들은 풀씨를 찾아 황무지로 나가지 못했다. 벌판에서 바람이 불면 바람에 날려 황량한 들판에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만 같았다. 황허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낮에는 남자가 천지를 원망하며 우는 것처럼 웅웅 하는 회백색 소리를 냈고, 밤에는 여자가 무덤 앞에서 곡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를 냈다. - P430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을 만큼 바람이 거셌지만 땅에는 나무가 없었다. 풀뿌리를 전부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이었지만 주변 몇 리 내의 풀뿌리는 전부 사람들 뱃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은 땅 위의 모래만 말아 올릴 수 있어서 거대한 이불이 세상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태양이 사라지고 달도 사라졌다. - P431

"남자들, 누구든 와서 시체 드는 것 좀 도와주세요. 도저히 못 들겠어요!"
나와 학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함이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실에 매달려 하늘 위를 나풀거리는 연 같았다. - P438

음악이 지면의 냉기에 닿지 않도록, 또 사체가 꽁꽁 얼어붙지 않도록 일단 무덤에 뉘어 온기를 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을 구덩이로 옮기려 하자 어찌나 무거운지 들 수가 없었다. […] 푸르스름하게 얼은 음악의 얼굴을 살피다 아주 힘껏 이를 악 문 것처럼 음악의 치아가 꼭 맞붙은 것을 발견했다. 이 사이로 이를 가는 듯한 서늘한 소리마저 새어 나왔다. 또 그녀의 타원형이던 얼굴이 오이처럼 길어져 꼭 파란 오이에 얼음이 맺힌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수많은 원망과 근심이 보였다. 풀지 못한 일이 너무도 많은데 살아 있을 때는 말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얼굴에 전부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 얼굴의 의문들이 모두 내게로 향하는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지고 몸도 공연히 위축되었다. 그 비틀리고 달라진 얼굴을 마주한 채 반쯤 감긴 눈에서 모호하고 매혹적인 빛을 보면서, 마음이 얼어붙고 위축된 탓에 다리가 조금 떨려왔다. - P457

사실 나, 작가는 죽음도 두렵지 않고 시체 따위도 두렵지 않았다. 99구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굶는 것만 두려워할 뿐 더 이상 시체나 죽음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이 무덤가에서 굳어가면서 내가 옮기는 것을 거부한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파란 오이처럼 변하던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을 떨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음악 앞에서 멍하게 굳어 있다가 위로의 말을 몇 마디 했다. 땅거미가 지기 전의 서늘함이 느껴지고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갈 때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 또다시 떠올랐다. - P458

내 몸에서 살점을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이 일단 생겨나자 점점 강하게 나를 옥죄었다. 나는 목석처럼 멍하니 서서 내 살점을 베어내는 극심한 고통과, 뒤이어 따라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홀가분함이 내 몸에 급속히 퍼져 몸을 잠식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갑작스럽게 내 머릿 속으로 뛰어 들어온 그 생각을 꼭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생각에 얽매이면서 두 다리가 터질 듯 덜덜 떨림에도 불구하고 그 떨림 뒤에 올 쾌감과 홀가분함에 한겨울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듯 마음이 녹아내렸다. 내 마음과 몸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과 상념에 휩싸였다. - P462

나는 꼭대기의 밀알이 핏물 속에서 젖 달라고 우는 아이처럼 앵앵거리는 것을 보았고 밀 잎이 붉은 비 속에서 거문고를 뜯듯 핏물을 주르륵 쓸어냈다가 쓸어 올리는 소리를 들었다. 짙은 피비린내는 달콤하고 촉촉한 빗속에서 옅어진 뒤 가느다란 밀 내음에 섞여 산뜻한 향기가 되어서는 내 주위를 휘감으며 퍼져나갔다.
마침내 나 스스로에게 독수를 뻗쳤다. - P467

학자는 그렇게 고기를 씹고 국물을 마시면서 그릇에 콩을 한 줌 넣어 불리기까지 했다. 먹는 모습 따위는 신경도 쓰는 않는 게 전혀 학자답지 않았다. 그의 입에 시선을 맞추고 내 살이 그의 이 사이에서 찢기는 걸 보고 있을 때 은홍색 소리가 그와 나 사이에 울려 퍼졌다. 그의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입술 때문에 눈이 아파왔다. 눈가부터 시작해, 막 옅어졌던 통증이 다시 그의 이 사이에서 내 온 몸으로 퍼지고 두 다리로 떨어졌다. 내 두 다리가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척추에서 또다시 근육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 P473

방 안의 햇살이 누군가 침대보를 벗기는 것처럼 움직이고 흔들렸다. 창틀 아래의 불도 완전히 꺼져서 두꺼운 재 속에 붉은 기운만 남았다. 학자가 거의 먹고 마셨을 때 온몸의 떨림과 수축이 안정되면서 등뼈의 냉기와 비틀림도 따라서 옅어졌다. 목욕한 것처럼 몸이 상쾌해졌다. 그때 내 머릿속의 그 가시가 완전히 뽑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학자와 음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빌려 내 머릿속의 가시를 뽑기 위해서 였음을 알았다. 감격스럽고 따스해지면서 그들이 나를 구한 것같이 느껴졌다. - P474

햇살이 좋았다.
하늘에 하얀빛이 가득했다.
천사가 춤추는 것처럼 구름이 나풀거렸다. 그날은 날씨가 봄날처럼 따스하고 아득히 천만 리까지 보였다. 멀리 황허 강변으로는 호수의 침묵처럼, 대지에 깔린 비단처럼 적막이 떠다니고 가까이로는 먼지와 모래가 풀썩거리며 대지를 덮었다. 그렇게 땅의 일부가 되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길이 살포시 빛나는 끈 같았다.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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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하얀빛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생겼음을 눈치챈 아이가 다급해졌다. 긴장한 얼굴로 가방을 다른 손에 바꿔 들고는 그 침묵을 향해 걸어갔다.
침묵도 아이를 향해 힘껏 달려왔다. - P260

아이가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걸음을 조금 늦췄지만 사람들 사이로 뒤편의 시커먼 잿더미와 진흙 덩이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그러고는 사람들의 쥐죽은 듯한 침묵 속으로, 마치 그 죽어버린 공동묘지 같은 침묵을 깨버리기라도 하듯 달려왔다. - P267

달빛이 꼭 물 같았다. 밤이 깊고 조용해 졌다. 설이 가까웠음을 말해주는 하현달이 구름을 꿴 채로 하늘에서 움직였다. - P269

천막 안에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학자는 키가 큰 데다 일어서 있었고 아이는 원래가 왜소한데 앉아 있었다. 학자의 얼굴이 석판처럼 푸르스름하고 딱딱했다. 아이의 군복에서 나오는 위엄이 옅어졌다. 꼿꼿하고 태연하면서도 진지한 표정, 옷이 받쳐주고 있던 굳건함이 무너지고 내려앉았다. - P272

마음이 텅 비고 쓸쓸한 게 사람들에게 걷어차인 뒤 황야에 던져진 상갓집 개 같았다. 맥없이 웅덩이의 모래 언덕에 기대 누워서, 용광로 불가로 가서 오줌에 젖은 옷을 완전히 말린 다음에 판잣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다. 비통함과 체념에 한바탕 울어야 할 것 같았다. 분명 내가 울고 있으려니 생각하며 손으로 눈가를 더듬어보다가 양쪽 눈이 눈물 자국 하나 없이 말라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흘러넘치던 오줌마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오각별이 전부 불탔고 흠씬 두들겨 맞은 데다 젊은 죄인 넷이 내 머리에서 얼굴로 오줌을 누고 생식기로 머리를 치며 마지막 오줌 방울까지 털었는데, 두 눈이 오줌에 흠뻑 씻겼는데, 혀로 오줌의 지린 맛과 짠맛을 느낄 정도였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슬프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이 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느껴졌다.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이 온몸에 퍼지는 게 정말 이상했다. - P292

춘삼월의 밤, 황허 옛길의 광야는 싸늘했지만 밤바람 속에서 초목이 소생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병원의 소독약 냄새처럼 코와 정신을 일깨우며 일망무제의 사방으로 퍼졌다. 분명 나무를 찾아 볼 수 없는데도 어디에선가 버들개지가, 그 시기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콧구멍으로 날아들었다. 사람들이 전부 잠들었다. 몇 줄로 늘어선 건물들이, 학자가 보라색 물약으로 뭔가를 쓰느라 불을 켜놓은 곳만 빼놓고, 나머지는 전부 소등해 달빛 속에 녹아들었다. 마당 바깥의 초목에서 파릇파릇 연두색 움트는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밤벌레 우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전해졌다. 나는 그 소리를 밟으며 대문까지 걸어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땅에 떨어진 달빛이 수면처럼 고요하다가 가볍게 흔들리며 물결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 밀밭에서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밀싹들이 은색 달빛을 받아 희뿌옇게 빛났다. - P299

동남쪽 몇 리 밖으로는 99구에서 여러 날 동안 조성한 밀밭이 있고 서남쪽으로는 밀밭 몇 뙈기와 소금웅덩이가 있었지만 동북과 서북쪽 방향으로는 소금웅덩이와 끝없는 황무지만 펼쳐졌다. 봄이 되어 황무지의 소금땅에서 염기에 강한 쑥과 타터우차오가 연두와 검푸른 빛을 내기 시작하자 소금땅의 강렬하고 유황 섞인 짠내가 야생초의 비릿하고 싱싱한 내음으로 바뀌었다. 모래땅 정상에 올라 보니 동남쪽의 밀밭이 비단처럼 매끈하고 반지르르하게 펼쳐졌다. 한편 서북쪽 황무지는 들쑥날쑥하게, 아직 녹색으로 완전히 덮이지 못해 거친 흰색을 띠는 게 겨우내 미처 빨지 못한 이불을 대지 위에 펼쳐놓은 것 같았다. - P305

내 평생 가장 쓸쓸하고 조용한 삶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덟 배미의 땅을 가꾸고 김을 매고 물을 뿌리면서, 양지바른 밭머리에 앉아 밀이 보이지 않게 자라고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가할 때면 모래땅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른 새벽에는 모래땅 정상에 서서 일출을 바라보고 황혼에는 모래땅 비탈에 앉아 일몰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남쪽 언덕에 누워 햇볕을 쬐다가 이마에서 땀이 흐르면 태양을 등진 채 드러누워 광야의 바람을 쐬었다. 하늘 위 구름의 변화와 한밤중 달과 별이 움직이는 발걸음과 울림을 뚫어져라 바라 보기도 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여덟 배미의 밀밭 가장 자리에 누우면 펜을 들어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두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곤 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잠재우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차가운 모래땅을 꽉 움켜쥐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면 펜을 잡고 싶다는 열정에 가늘게 떨리는 손을 사람에게 잡힌 두 마리 토끼처럼 진정시킬 수 있었다. - P307

"재배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자신 있게 대답하면서 다시 아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하얀빛을 마주한 아이의 얼굴에서, 그 매끈하고 부드러운 피부에서, 마치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 겉면에 시간이 흐르면서 생긴 얇은 껍질처럼 이상하게 굳어 있는 기운을 발견했다. 그의 입술 위에는 우윳빛 솜털이 반짝이는데 그의 이마에는 아주 분명한, 하루 종일 흔들린 물결무늬 같은 흔적이 있었다. 나이 어린 모습은 예전과 똑같았지만 하루 종일 고단하게 일한 시골 아이 같았다. - P310

태양이 솟아오르자 지난겨울 황허 강변에서 솟구치던 불꽃처럼 동쪽이 붉어졌다. 황허 옛길에 일망무제로 펼쳐진 사막 평원이 태양 아래에서 초록 풀과 야생화로 눈부시게, 반지르르하게 빛났다. 나는 일출 속에서 야생풀을 밟고 뛰어다니며, 동쪽 하늘 아래 태양이 평원에 뿌리는 금빛 물속으로 한걸음에 뛰어갈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아, 아" 하는 거칠고 격한 외침이 살바람처럼 입을 뛰쳐나가 펑펑거리며 광야로 흩어졌다. 나는 단숨에 수십 걸음을 내달렸다. - P313

하늘에서 꾀꼬리 몇 마리가 꾀꼴꾀꼴하며,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검은 돌 같은 그림자를 던지고 날아갔다. 샘물에서 축축한 냉기가 올라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수건으로 몸을 덮은 것 같았다. 나는 글을 써야 했다. 반드시 써야 했다. 벌써 진짜 책의 제목과 첫머리를 생각해두었다. 지난밤 내내 잠들지 못하다가 마침내 제목과 첫머리를 결정했기 때문에, 그래서 비로소 봄꽃이 피고 대지가 녹색을 띠기 시작했다고 해야 옳았다.
나는 책 제목을 ‘옛길‘이라고 확정했다. - P314

"고목에 파인 상처가 결국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되는 것처럼, 위신구는 이 나라에서 가장 독특한 풍광과 역사를 갖고 있다."
『옛길』의 첫머리를 그렇게 적었다. 나는 시작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 문장을 다시 한 번 조용히 읽어본 뒤 길게 숨을 내뱉고 가슴과 팔을 넓게 펼쳤다. 이어서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신발을 꺾어 신고는 모래땅 무덤의 꼭대기에 섰다.
그때 나는 내가 거인처럼 느껴졌다. 가장 힘겨운 전투에서, 초반에 기세를 휘어잡은 것 같았다. 동녘의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넓은 벌판에 흐르던 붉은 물결이 사라졌다. 사막평원에 눈부신 노란빛이 흘러넘쳤다. 태양이 어느새 장대 높이만큼 올라갔다. 밤사이 녹색과 꽃으로 뒤덮인 황야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랑비 소리가 주위를 꽉 메운 것 같은, 촉촉하게 속살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P315

나는 더 이상 씨알 맺히는 소리가 반갑지 않았다. 심지어 짜증이 났다. 땅에서 몸을 뒤집어 혐오스럽다는 눈초리로 수십 포기의 갈대 같고 수수 같은 밀을 쳐다보다가 초막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일어서서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걷고 싶지 않았다. 기어가서 밀들에게 내가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내놓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자식들의 이해를 받으려고 통증을 과장하는 부모의 심정 같은 것이었다. - P340

사람들이 오만한 것을 보고 신이 노했다. 큰 비가 내려 홍수가 났다. 밤새 비가 내린 다음 날, 모두들 자신의 옥수수로 뛰어갔다가 팔뚝만큼 굵은 옥수숫대가 빗물에 고꾸라진 것을 발견했다.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각자의 이름을 적었던 종이판이 작은 배처럼 빗물 위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어차피 허벅지만큼 굵은 옥수수 이삭이 패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몇 달 내내 손가락에서 흘린 피가 아쉬울 뿐이었다. 오직 아이만이 울었다. 하늘을 원망하고 비탄해했다. 슬픔이 구름처럼 아이의 마음을 뒤덮었다. 아이가 울면서 소리쳤다.
"어떻게 도성에 가지?"
"이제 어떻게 도성에 가느냐고!" - P363

무척 추워서 건물 안이 광야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뼛속을 파고들고 마음까지 파고들었다. 추위와 배고픔에 누군가 밖으로 나가 빛이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음산하니 추웠다. 사람들은 옷이란 옷을 전부 껴입었다. 어디든 이불로 몸을 둘둘 말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배가 고파서 더 추웠다. 추워서 더 배가 고팠다. 추위와 허기가 극에 달하자 누군가 내일은 관두고 오늘이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왕 내일 죽을 거면 오늘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싶지 않다며 양치통에 반쯤 들어 있던 잡곡가루를 바람도 사람도 없는 곳에서 전부 끓였다. 죽을 만들어 전부 먹었다. 그릇에 붙은 찌꺼기까지 손가락으로 긁어 먹고 혀로 싹싹 핥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 끼를 먹자 몸이 따뜻해졌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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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중력 저하가 주로 나나, 여러분이나, 여러분 자녀의 개인적 실패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를 찾아냈다. 모두가 공격을 받고 있다. 우리를 공격하는 세력은 매우 강하다. 그러한 세력 중에는 거대 테크 기업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업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다. 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이 매일 우리의 주의력에 산을 들이붓고 있다는 것, 전 세계의 집중력이 타들어가는 와중에 우리는 자신을 탓하고 자기 습관을 바꾸라는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자 그동안 읽은 집중력 개선법에 관한 책들에 전부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청난 구멍이었다. 기존의 책들은 대부분 집중력 위기의 실제 원인을 다루지 않았고, 실제 원인은 대개 훨씬 거대한 세력에 있었다. 나는 그동안 알게 된 내용을 바탕으로 집중력을 훼손하는 12가지 강력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장기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가 이 힘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 힘이 계속해서 집중력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 P22

그때 머릿속 한 편에서 스페인의 작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Casset가 한 말이 떠올랐다.? "준비될 때까지 삶을 미룰 수는 없다··· 삶은 우리의 코앞에서 발사된다."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해. 그러면 죽기 직전에 인스타그램에서 ‘하트‘를 몇 개 받았는지 쳐다보며 누워 있게 될 거야. 나는 차에 올라탔고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 P36

나도 살을 뺄 때 이 방법을 썼다. 평소에는 탄수화물을 잔뜩 사다 두고 스스로에게 너는 천천히 적당량을 먹을 수 있을 만큼 강인하다고 말한 뒤, 결국 새벽 2시에 와구와구 먹곤 했다. 그래서 탄수화물을 사두지 않았다. 새벽 2시에 프링글스를 사러 나갈 생각은 없었다. 현재에 존재하는 나, 바로 지금의 나는 더 심오한 목표를 좇고 싶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자신이 실수를 할 수 있고 유혹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미래의 나를 구속한다. 선택지를 좁힌다. 돛대에 자신을 묶어놓는 것이다. - P37

갑자기 확신이 들었다(살면서 이런 확신은 몇 번밖에 경험할 수 없다). 내가 전적으로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 너무 오랫동안 내 시선을 트위터 피드처럼 아주 빠르고 일시적인 것에 고정하고 살았다. 속도가 빠른 것에 시선을 고정하면 근심에 빠지고 흥분하게 되며, 움직이고 손을 흔들고 고함치지 않으면 쉽게 휩쓸려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면 지금은 아주 오래되고 영속적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 바다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있었고, 나의 사소한 걱정이 잊힌 뒤에도 오래도록 이곳에 존재할 거라고. 트위터는 온 세상이 나 자신과 내 작은 자아에 푹 빠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세상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싫어하고, 지금 이 순간 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다는 온 세상이 온화하고 축축하고 우호적인 무관심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바다는 내가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결코 맞대응하지 않을 것이다. - P42

이상한 것들이 의식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어린아이였던 1980년대와 1990년대 노래의 도입부가 머릿속에 계속 울려 퍼졌다. […] 스포티파이spouty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노래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 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해변을 걸으며 직접 노래를 불렀다. 몇 시간마다 내 안에서 낯선 감각이 꿀렁꿀렁 흐르는 것이 느껴졌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뭐지? 아, 맞다. 평온함이었지. 하지만 내가 한 거라곤 두 개의 금속 덩어리를 놓고 온 것뿐이었다. 이게 왜 그렇게 생경할까? 마치 산통으로 악을 쓰는 두 아기를 몇 년 동안 안고 있다가 유모가 아기들을 대신 맡아주어서 아기들의 비명과 구토가 눈앞에서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 P45

갑자기, 물리적인 신문(범인이 목표물로 삼은 바로 그것)이 비범한 현대적 발명품이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발명품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이 공포를 유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달리 이 새로운 방식은 관점을 유도했다. - P46

그는 부끄러웠다. 수네는 물리학 교육을 받았지만, 곧 (그가 응용수학 및 컴퓨터공학과 교수로 있는 덴마크 공대에서) 물리학뿐만 아니라 본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조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제 집중력이 어떻게 사라지고 있는지에 사로잡혔어요." 그가 내게 말했다. "어째서인지 인터넷 사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죠." 그는 자신이 소셜미디어에서 미국 대선 같은 사건의 사소한 정보들을 몇 시간이고 생각없이 훑으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부모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수네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깨달은 건, 어떤 면에서 제 직업은 모두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일인데, 내가 모두와 똑같은 정보만 얻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는 것, 모두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 P47

연구팀은 매번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저 시스템에 정보를 더욱 채우기만 하면 되었다. 정보를 더 많이 주입할수록 사람들이 개별 정보에 집중하는 시간이 줄었다.
"왜 이러한 가속화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수네가 말했다. "그저 오늘날의 시스템에 정보가 더 많은 겁니다. 100년 전을 생각해보면, 뉴스가 이동하는데 말 그대로 시간이 걸렸어요. 노르웨이의 피오르에 크나큰 재앙이 발생했다면 피오르에 있는 사람들이 오슬로까지 내려와야 했고, 누군가가 그에 관한 기사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기사는 아주 천천히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 P51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수네는 자기 삶을 탈바꿈했다. 트위터를 제외한 모든 소셜미디어를 끊었고, 트위터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만 확인한다. 텔레비전 시청도 중단했다. 더 이상 소셜미디어로 뉴스를 보지 않고, 대신 신문을 구독했다. 책도 더 많이 읽는다. "아시겠지만, 자제력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한번 고친다고 영원히 고쳐지는 게 아니에요." 수네가 말했다.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하는 건 그게 계속되는 싸움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그는 이러한 노력이 삶을 대하는 방식에 철학적 변화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보통 우리는 쉬운 길로 가고 싶어 해요. 하지만 우리가 행복할 때는 약간 어려운 일을 할 때거든요. 핸드폰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늘 중요한 것보다는 쉬운 것을 제안하는 물건을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된 거예요." 수네가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나 자신에게 더 어려운 것을 선택할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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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오각별을 싼 이불을 풀고 비단을 열고 붉은 종이를 벗긴 뒤 오각별을 언덕 꼭대기에, 태양을 마주 보게 세웠다. 태양이 너무도 밝았다. 하늘이 시리도록 파랬다. 대지가 너무도 고요해 구름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오각별이 붉은빛을 뿌렸다. 직경 한 자 여덟 치 반에 두께 두 치 석 푼인, 새로 제철해 검푸른 색을 띠는, 뒷면에 아이의 이름과 생산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는 별. 앞면을 빨갛게 칠한 별. 옅게 풍기는 페인트 냄새와 붉은빛이 세상에 퍼지고 세상을 밝혔다. 오각별이 신기한 비탈 정상에서 세상의 불처럼 타올랐다. - P234

아이가 웃었다.
종교도 해보고는 "신기한 비탈입니다" 하고 말했다.
"아니야." 아이가 말했다. "아버지가 없는데 그 어머니가 어떻게 예수를 임신했는지 설명할 필요 없다." 그러고는 오각별을 종이와 비단, 이불로 싸고 수레를 끌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 P234

성장의 사무실은 생각만큼 넓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커다란 방 두 칸에 크고 오래된 붉은 책상. 책상 위에는 신문과 문서,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놓여 있었다. 창턱에 놓인 전화기, 하얀 회벽. 벽에 걸린 중국 전도와 세계 지도, 국가 최고 상부의 초상화. 그리고 소파와 침대. 생각했던 것만큼 널찍하거나 깔끔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게, 성장이 널찍하거나 깔끔한 걸 원하지 않기 때문임을 알았다. 원하기만 했다면 분명 널찍하고 깔끔했을 거였다. 성장인데, 성에서 가장 높은 상부인데, 그가 한마디 하자 성 전체가 강철 제련에 뛰어 들었는데, 또 한마디 하자 성의 나무가 전부 베어졌는데, 또 한마디 해서 방 두 칸을 깔끔하고 널찍하게 만드는 게 어려울까? - P249

성장이 걸상을 아이 앞으로 끌어당겨 아이의 눈을 똑바로, 친근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을 압박해 무당 1만 근을 생산할 수 있는 실험밭을 가꾸게. 밀 이삭을 조 이삭만큼 키우고, 밀 낟알을 옥수수 낟알만큼 키우면 자네를 데리고 헌납하러 도성에 갈 걸세. 그러고는 톈안먼과 창안제를 둘러보고 완리창청에 오르고 이허위안을 유람할 걸세. 쯔진청도 가고. 아, 중난하이 배도 있군. 자네 혹시 아는가? 국가 최고 상부는 전부 중난하이에 있다네. 거기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자지. 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모두 중난하이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라네. 하지만 자네가 무당 1만 근을 생산할 수 있는 실험밭에서 조 이삭보다 큰 밀 이삭을 재배하면 내가 자네를 데리고 베이징을 유람할 걸세. 쯔진청에 묵으면서 국가 최고 상부와 기념사진도 찍도록 도와주겠네."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아이는 방 안이 하얀빛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았다. 무수한 천사가 허공에 서 있고 사방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찬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다. - P253

아이가 귀로에 올랐다. 그렇게 광할한데 그 혼자뿐이었다. 마음이 언짢아서 더 넓게 느껴졌다. 나무들이 모두 베어져 세상이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마치 하늘에서 넘어진 것처럼 태양이 하늘에서 새어 나오듯 기울어졌다. 겨울이었지만 사람을 따뜻하게, 뜨겁게 달궈주었다.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눈에, 매끈하고 쓸쓸한 대지가 은백색과 황금색으로 빛났다.
땅이 발을 받쳐주어 아이가 돌아왔다. - P258

평평하게 넓은 대지를 노랗고 하얀빛이 가득 메웠다. 한 사람, 검은 점 하나가 점점 커졌다. 99구와, 광활한 들녘의 용광로와 연기는 여전히 처음처럼 서 있었다. 아이가 점점 가까이 갔고 대지가 그의 발을 받쳐주었다. 지난 보름이 몇 년 전처럼 느껴졌다. 성도에서의 일, 성에서 만난 상부 인사가 아이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정오 무렵이 되자 햇살이 정수리에서 고꾸라지며 몸을 덮쳐눌렀다. 아이의 몸이 온통 땀투성이가 되었다. 갈증에 사방을 둘러보던 아이가 광야의 움푹한 곳에서 어렵사리 눈을 찾아냈다. 눈으로 갈증을 푼 뒤 길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P259

하늘은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 순백은 황금색을 머금었다. 끓어오를 듯한 순백, 광활한 대지의 겨울 속에는 바람 한 점 없이 숨 막힐 듯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 적막 속에서 아이가 신기한 비탈에 앉아 잠시 쉬고 나자 하늘에서 하얀빛이 사그라졌다. 계곡 속 시냇물 같던 천사들의 노랫소리도 사라졌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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