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꿈을 꾼다. 그녀는, 죽어버린 그녀의 아이거나, 논에서 일하는 소, 때때로 그녀는 논, 숲이다. 죽음의 갠지스강 물속에 몇 날 밤을 죽지 않고 머물러 있는 그녀, 나중에는 그녀가 물속에 빠져 죽는 꿈을 꾼다. - P76

그는 갑자기 다른 곳에 있는, 생소한 그녀를 본다, 춤추며 날아다니는 중에 붙잡혀 핀에 꽂힌 그녀를. 때때로 그녀의 딸들이 공부하는 동안, 오후에, 그렇다, 낮잠 시간의 적막 속에서, 그는 저택의 한구석에 숨어 있는 그녀, 버려져 쓰이지 않는 한 사무실에서 몸을 웅크린 채 엉뚱한 자세를 하고 책을 읽는 그녀를 본다. 그녀가 읽고 있는 것은······ 아니, 그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한다. 이러한 독서들, 델타의 별장에서 보내는 이 몇 밤들, 곧바른 자세는 흐트러지고, 무언가가 소모되고 표현되지만 이름 지을 말이 떠오르지 않는 그늘 속으로 사라진다. 빛을 동반하는 이 그늘, 그 안에 늘 안-마리 스트레테르가 나타나는 이 그늘은 무엇을 숨기고 있나? 찬데르나고르의 찌는 듯한 도로 위를 그녀가 딸들과 차로 달릴 때, 그녀의 쾌활함은 생소해 보인다. - P120

"요 몇 주간 그랬던 것처럼 만약 3년 내내 이런 식이라면," 샤를 로세트는 말한다. "당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내가 끝까지 견뎌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거의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아요. 이것이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것이 대단한 일이지요."
"아마도 어느 날······ 대단하다······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쓰셨습니까?"
"아녜요, 그건······ 아무것도 아녜요······ 여기서는, 이해하시겠어요, 사는 게 힘들지도, 쾌적하지도 않아요. 말하자면 그건 다른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쉽지도, 어렵지도 않아요. 아무것도 아녜요." - P121

안-마리 스트레테르와 춤을 추면서, 샤를 로세트는 텅 빈 테니스 근처에서 그가 본 것을 다른 누군가도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여름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부영사가 지나가는 순간의 텅 빈 테니스랑을 바라보았으리라는 생각이. 지금은 침묵하고 있는 그 누구. 아마도 그녀가.
사람들은 말한다. 필경 모든 것이 라호르에서 시작되었다고. - P129

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라호르에서 권태로워했어요. 아마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권태, 여기서는, 인도 전체 크기에 버금가는 거대한 포기의 감정이지요. 이 나라 자체가 그 분위기를 제공해요." - P130

안-마리 스트레테르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분명 궁금해할 것이다. 그녀가 다가온다. 샤를 로세트는 약간 당황한다. 이것은 지나치다, 너무 빠르기도 하다, 마치 미래가 처리되는 것처럼. 그는 사람들이 협회에서 말한 무언가를 기억해낸다. 대사가 과거에 소설을 쓰고자 했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말한다. 아내의 충고에 따라 그는 포기했지요, 그랬어요. 그에게는 체념한, 그러나 행복한 분위기가 있다. 그가 원했을 성공을 그는 가지지 못했다. 그는 다른 것을, 그가 원하지 않았던 것을, 그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던 것을 얻었다. 그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젊은, 그러나 그를 따라온 이 여인을 얻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 P155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아시아의 여러 수도에서 같이 살았다, 17년 전부터. 지금은 그들 삶의 마지막 구간이 시작되고 있다. 그들이 그다지 젊지 않았던 어느 날, 사람들은 소문을 듣는다,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시를 써서는 안 된다. 여기 이곳에, 중국에, 인도에 머무르자, 시는 아무도 모른다. 세기마다 수백만의 사람 중 10여 명의 시인만이 남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여기,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머물러 있자······ 그녀가 다가와 샴페인을 마신다. 그리고 방금 도착한 누군가에게 간다.
"당신을 봤소." 대사가 말한다. "라호르의 부영사에게 말을 건네더군요. 고맙소." - P155

"우린 서로 안면이 없군요." 마이클 리처드가 말한다.
그는 어디서 왔는가? 그는 캘커타에 살고 있지 않다. 그는 그녀를 보기 위해, 그녀 옆에 머물기 위해 이곳에 온다. 그는 생각보다 젊지 않다. 벌써 서른다섯 살. 샤를 로세트는 어느 저녁, 협회에서 보았음을 기억해낸다. 그가 이곳에 머문지는 아마도 일주일쯤 되었을 것이다. 무언가가 그 둘을 결속시킨다. 샤를 로세트는 생각한다. 안정적이고 결정적인 것이,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진행 중인 사랑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 그는 그가 들어올 때를 기억한다. 부영사의 흐느낌이 있기 훨씬 전이다, 검은 머리카락 밑의 어두운 눈. 사람들은 그들이 어느 저녁 ‘블루문‘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찬데르나고르의 호텔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여름 계절풍이 부는 동안이리라. 사람들은 말하리라.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에 대한 무관심에서라고. - P173

"불안하신가요?" 마이클 리처드가 샤를 로세트에게 말한다.
"오늘 밤 그에게 닥친 일은 매우 힘들군요."
"정확히 어떤 것이? 죄송하지만, 제가 그 자리에 없었어요······ "
"결정적으로······ 어디에선가······ 여기에서 제외된다는 것, 그 사실이 요지부동해 보였어요······ 내 생각에는요." 그는 안-마리 스트레테르에게 얘기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내 생각에는 그가 아침마다 단지 그 이유로, 테니스장에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 P176

"그는 테니스창 근처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을까?" 피터 모건이 묻는다.
"모르겠어." 그녀가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감미롭다. 마치 아픔을 주지 않는 바늘 끝처럼. 그녀는 샤를 로세트가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것을 본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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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만화 다 그렸잖아요. 초사쿠는
안 그려요. 왜죠?
–초사쿠 씨는··· 지금 고통 속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계십니다.
[…]
하지만, 티끌만 한 실마리라도 찾으면···
고통 속에서 그가 한 발짝이라도 내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이란, 고뇌라는 큰 과수에서 맺히는 열매다."
빅토르 위고가 한 말입니다. - P180

–드디어 완성한 거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한테 가닿은 거 같지?
–네. 이상적인 만화를 만들고자 사방팔방 뛰어다닌 끝에···
–그 책은 이제 당신의 보물이야···
–네.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책을 완성해야만,
그리고 그걸 많은 독자분들께 선보이고 감상을 들어야만 비로소 큰 기쁨을 얻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고통···
그 여정 속에야말로 진실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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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계속 그려내는 게 프로라면···
제게 그럴 힘은 없어요···
예전에 한번 큰맘 먹고 창작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워봤거든요.
그랬더니 만화 바깥의 모든 세계가 선명하게 보였어요.
무척 아름다운 곳이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납득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쪽 세계를 바라다보고 싶어졌어요.

8년간의 연재가 끝이 나도···
다음주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음 호가 진열되고···
그런 당연한 사실에 약간 상처받는 내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 - P150

–초사쿠 씨가 먼저 말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가 군에게 부탁해서 연재를 끝내셨다고···
–요즘 좀 궁지에 몰렸거든···
내 신세에 그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뭐 침울한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엄청난 해방감도 느껴··· - P151

–날이 갈수록··· 두려워집니다.
존경하는 작가님들께 돌이킬 수 없는 결례를 범하는 건 아닐까··· 불안해집니다.
수지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밀어붙인 것,
지금은 마음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설령 그 책이 나오지 못해도, 시오찡을 탓하는 사람은 없을걸.
다들 그럴 각오로 의뢰를 수락한 거야.
적어도 나는 시오찡이 나한테 제안해준 게 내심 기뻤어. - P153

–네코야마 쿠모타로···
그 사람 별일 없죠?
–네!
네코야마 선생님께서는 정정하십니다.
신작도 집필하고 계세요.
–그가 방금 이야기한··· 만화를 그리던 친구예요. - P164

–그 녀석, 평소에는 로맨틱하고 느긋하지만 만화를 그릴 땐 사람이 바뀌잖아요?!
–네! 정말 딴사람이 된 것처럼···
이번 작품도 대단히 집중해서 몰두하고 계십니다.
벌써 콘티도 네 번이나 다시 그리셨죠···
–그래요···
하나도 안 변했네··· - P166

나도 여기서 50년 동안 아내와 둘이 서점을 운영하면서···
아들이 대를 이어주길 바랐지만 집을 나가는 바람에··· 후후···
나름대로 좋은 일, 나쁜 일 참 많았죠
그리고 그동안
쿠모타로는 분명 본인이 가진 마법 전부를 만화에 쏟아온 거겠죠··· - P167

아까 작가 라인업을 보니 떠오르더군요.
시오자와 씨, 일전에 당신이 만들었던
『코믹 밤』···
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다음 책도 기대할게요.
힘내요. 시오자와 씨.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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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밤에는 토오루랑 둘이서 새벽 내내 만화를 그렸어···
눈이 온갖 소리를 빨아들여 적막하기 그지없는 밤에는···
마치 지구에 우리 둘 뿐인 듯한 기분이 들었지···
여름은 완전히 딴판이었어.
모든 게 눈부시게 빛을 발하니···
이곳의 여름은 마치 토오루처럼 빛났지. - P21

있잖아, 토오루···
이 세상에 우리 둘만 있던 건 아니었나봐··· - P29

하지만 그 녀석이 다시 잡지를 만든다는 소문을 들으니···
마음이 왠지 모르게 술렁거린단 말이죠.
응원하고 싶을 만큼 기쁘다가도···
잘될쏘냐 분한 마음이 일어서··· - P49

작년에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선생님의 『폰타의 일상』을 발견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예전과는 전혀 다른 울림이 있더군요···
진실된 작품은 읽는 이의 심경이나 성장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는 걸 새삼···
곱씹게 됐습니다.
정보가 넘쳐흐르는 요즘 같은 시대라서 더욱, 선생님의 작품이 꼭 필요합니다. - P54

–뭐라고 해야 하나··· 당했다고나 할까···
–당했다고요?
–나, 딴사람 만화는 잘 안 읽는데···
오는 길에 그 녀석 만화를 읽어 봤더니···
기세가 만만치 않더군.
한 꺼풀 벗은 느낌이라···
뭐랄까. 지금 나보고 이런 걸 그릴 수 있는지 묻는다면··· - P76

–팔리는 작가는 그런 생각을 하는군요···
대단 하세요···
–대단 하단 건 또 뭐야? 너도 그런 적 있을 거 아냐?
–글쎄요··· 저는 누가 봐도 사회 부적응자 라서···
좋아하는 만화를 하루종일 그릴 수 있고···
그걸 좋아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것만으로도 제겐 기적이에요···
고마운 마음뿐이라···
그외의 것들은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 P77

루나는 아빠 만화에 나오는 사람 중에 토고 씨가 제일 좋아.
덩치는 크면서 홈런은 한 번도 못 치구··· 수비도 구멍이잖아?
그래서 늘 벤치 신세인데도 항상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되게 멋있어. - P84

–꿈을 꾸는 듯 매일이 즐거웠어. 정말로..
평생 선생님의 어시로 일하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거든.
–할 만큼 하신 거 아닐까요?
그 시절 미키 선생님의 만화는 완벽하고 멋졌잖아요.
–고럼.
–두 분은 그때 이미 궁극의 만화를 만들어내신 거예요. 부럽습니다.
–핫··· 과연 그럴까?
어쨌든 난 엄청 좋아했어··· - P105

–···스스로 납득한 결정이야?
더이상 만화는 안 그린다는 거···
–마음이 식었다···
···라고 하면 좀 다른 의미일 수도 있는데요···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그려왔던 제 세계가
왠지 모르게 멀게만 느껴지더라고요.
제3자의 눈으로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
그렇게 된 지는 꽤 됐어요.
작품 속 인물들은 더이상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아요.
그들은 그저 꼭두각시일 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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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물건들이 환자 주변에 있었다. 약, 숟가락, 촛불, 그리고 벽지였다. 나머지 물건들은 떠나버렸다. 자신이 중병이 들었고 죽어간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는 사물의 세계가 얼마나 거대하고 다양한지 이해했고 자신의 권역 안에 남은 것이 얼마나 적은지도 이해했다. 하루가 다르게 물건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철도 승차권처럼 흔한 물건도 그에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머나먼 것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그로부터 멀리 있는, 주변부에 있는 물건들의 수가 줄어들었는데 다음에는 줄어드는 수가 중심 쪽으로, 그를 향해, 심장을 향해, 마당으로, 집으로, 복도로, 방으로 갈수록 빨리 다가왔다. - P9

그는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 위에서 죽음이 물건들을 무지막지하게 박살내고 있음을 알았다. 쓸데없이 엄청나게 많은 사물들의 총수량에서 죽음이 그에게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겨우 몇 가지 정도 였는데, 그마저도 그가 그렇게 할 힘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자기 집에 들여놓도록 놔두지 않을 물건들이었다. 그가 받은 건 은근한 찔러봄이었다. 그는 친지들로부터 무서운 방문과 시선을 받았다. 그는 평소 부탁해본 적도 없고,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 물건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 은근한 찔러봄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어찌해볼 수 없이 확고한 것이었다. 그는 사물을 선택할 권리를 잃었다. - P10

떠나가는 물건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름만을 남겼다.
세상에는 사과가 있었다. 사과는 잎사귀에 싸여 반짝거렸고 살짝 빙글 돌기도 했다. 낮의 한 조각과 정원의 하늘빛, 창틀을 움켜쥐고 자신과 더불어 회전시키기도 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나무 아래서, 검은 땅 위에서, 울퉁불퉁한 흙 위에서 사과를 기다렸다. 깨알같이 작은 개미들이 울퉁불퉁한 흙 사이로 기어 다녔다. 정원에는 뉴턴이 앉아 있었다. 사과 안에는 많은 원인들이 숨어 있었는데 더욱더 많은 결과들을 야기할 힘을 가진 원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들 중에 포노마레프를 위해 예정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 사과는 추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물의 물질적 구현이 자신에게 사라지고 추상만 남았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고통스러웠다. - P12

‘나는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내 눈과 청력이 사물을 다루는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존재하길 멈출 때 세상도 존재하길 멈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 내게서 모든 것들이 등을 돌리는 걸 똑똑히 보고 있어. 내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어째서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거지? 나는 내 뇌가 사물에 형태와 무게, 색깔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나를 떠나갔고 명칭들만 남았어. 주인을 잃은 쓸모없는 이름들만 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어. 이 이름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야?‘ - P12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환경을 갑자기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었고 그 광경이 나를 뒤흔들어놓았다. 모든 물건이 내게 혈연을 강요했다. 모든 물건이 내게 어떤 명령을 내렸다. 벽에 둥근 시계가 걸려 있었다. - P17

시계는 구전설화였고 전설이었다. 나한테 전설은 필요 없다. 나는 저 시계 소리를 들으며 죽고 싶지 않다. 나는 계속이고 싶지 않다. 나는 가구들의 가족협의회가 나를 에워싸고 있음을 돌연 분명히 깨달았다. 가구들이 내게 충고를 늘어놓고 어떻게 살 것인지 나를 가르친다. 찬장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네 인생 여정에 내가 함께할게. 네 뒤에 내가 서 있을 거야. 나는 오래 버틸 수 있어. 난 튼튼해, 두 세대가 내 안에 음식을 보관했어. 난 할 수 있어, 날 소중히 다뤄줘, 그러면 나는 네 아들과 네 손자 때까지도 유용할 거야. 나는 전설이 되는 거지." - P18

슈발로프는 벽 아래 누워 있었다. 구석이 바싹 다가왔다. 그는 벽지의 무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벽지에 난 전체 무늬의 저 부분, 그가 밑에 누워서 잠드는 벽의 그 부분이 이중의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하나는 보통의, 낮의, 전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화환들이고, 다른 하나는 밤의, 잠들기 오 분 전에 감지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아주 바싹 밀착하자 무늬의 일부가 커졌고 세밀해졌으며 변화했다. 막 잠이 들려고 할 때의 어린아이 같은 느낌과 비슷한 상태에서 그는 익숙하고 규정된 형태들이 변화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변화가 감동적이었음에야. 빙빙 돌아가는 나선형과 동그라미들 대신에 그는 염소와 요리사를 보았다···. - P26

그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자 그는 양옆을 돌아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지극한 행복의 소리가 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이 만난 첫날에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가 지난밤 사이 완성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의 눈부신 빛남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창턱을 보았을 때 거기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꽂힌 작은 꽃병들이 서 있었다. 렐랴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는데 등이 동그랗게 구부러져 있었고 피부 밑으로 척추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가는 갈대 줄기 같았다. ‘낚싯대, 대나무‘ 슈발로프가 생각했다. 이 새로운 땅에서는 모든 게 감동적이고 우스웠다. 열려 있는 창밖으로 목소리들이 날아다녔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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