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는 수묵화야. 선배가 말한다. 수묵화 중에서도 남종화에 가깝지. 소리보다 침묵이 더 아름다운 악기이기도 하고 여백의 미를 감추고 있다고 할까. 한 음 뜯고 난 후 그 다음 음이 나올 때까지의 침묵을 즐길 줄 알면 거문고는 다한 거라지. 반면에 가야금은 지나치게 음이 많고 자잘해, 대금이나 해금 같은 관악기는 음이 끊이질 않고, 그래서 거문고를 선비의 악기라고 하는 거겠지.
단발머리 동기가 묻는다. 그런데 왜 형은 그 좋은 거문고를 안 하고 대금을 부세요? 선배가 답한다. 내겐 그 침묵이 버거워.
그때의 당신은 알지 못했다. 음과 음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지, 그 간극을 감당하는 자만이 인생의 여백에 시라도 한 수 적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인생 자체가 하나의 간극임을, 그때는 정녕 알지 못했다. - P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