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은 알고 있었을까? 이미 예전부터 애니가 그를 얼마나 심하게 협박했는지, 애니가 그의 본질적인 자아에, 영혼을 움직이는 간과 허파 같은 중요한 부분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내놨는지 그가 정말 알았던 것일까? 끊임없는 공포 속에 갇혀 있음은 알았지만, 예전에는 당연한 줄로만 여기고 단단히 소유했던 자신만의 고유한 주체성이 그때까지 얼마나 많이 지워져 나갔는지도 알았던 것일까? - P433

폴은 한 가지만은 어느 정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 글을 써 오면서 없어진 글쇠나 열병이나 뚝뚝 끊어지는 기억이나 배짱을 잃어버린 것 말고도 잘못된 점이 많았던 것처럼, 혀가 마비된 것 말고도 자신에게 잘못된 점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끔찍했지만 모두 사실이었고 너무나 뚜렷했다. 아주 무서우리만치 뚜렷했다. 폴은 조금씩 죽어 가고 있었지만, 그렇게 죽는 것도 두려워 했던 만큼 고약하진 않았다. 그러나 죽어가는 동시에 희미해지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일이었다. 오직 멍청한 녀석들이나 희미해져서 사라지는 법이므로. - P433

폴은 그 이름 모를 청년에게 무섭고도 가슴 아픈 연민을 느꼈는데, 슬그머니 또 다른 감정이 끼어들었다. 그 감정을 면밀히 살피고 나서 그것이 질투임을 알았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그 경찰이 혹시 가정을 꾸렸다면 다시는 아내와 자식들 품으로 돌아갈 수 없을 터였지만, 한편으로 애니 윌크스에게서는 벗어났기 때문이다. - P444

애니는 악마의 행운을 가지고 있었고, 궁지에 몰릴 때마다 대체로 악마같이 영악하게 잘도 빠져 나왔다. ‘대체로‘ 그랬다. 볼더에서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대부분 운이 좋아서였다. 이제 또다시 궁지에서 탈출했다. 폴은 방금 그 과정을 눈으로 확인했다. 애니는 잔디 깎이 차에 묻은 피는 씻어 냈지만 차 밑면에 붙은 회전 칼날까지는 씻지 않았다. 칼날 틀 자체에는 손도 안 댄 것이다. 나중에 실수를 기억해 낼 수도 있겠지만 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급했던 순간이 지나고 일단 과거가 되어 버리면, 애니의 마음에서는 그 일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폴은 사람의 마음과 잔디 깎이차가 서로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겉으로만 보면 둘 다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들을 뒤집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날카로운 칼날을 자랑하는 피투성이 살인 기계임을 알 수 있다. - P448

‘나를 죽이러 왔구나.‘
폴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느낀 유일한 감정은 피로 끝에 찾아온 안도감뿐이었다. - P450

"내일 경찰들이 잃어버린 불쌍한 어린 양을 찾으러 들를 때를 대비하는 거야. 정상에서 벗어난 꼴을 경찰이 보면 안 되잖아. 그렇지, 폴?"
‘야, 그 사람들 보고 잔디 깎이 밑이나 뒤져 보라고 해. 일단 보면 정상에서 벗어난 것들이 우글우글할 테니까.‘ - P466

애니가 웃었다. 웃음보를 더욱더 화끈하게 터뜨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철컥 소리가 났고, 지하실 전등이 모두 꺼졌다. 애니는 계속 웃고만 있었고, 폴은 비명 지르지 않겠다고, 구걸하지 않겠다고 혼자서 맹세했다. 비명 지르고 구걸할 기회는 이미 지났으므로. 하지만 어둠이 깔린 축축한 밀실과 울려 퍼지는 애니의 웃음소리는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것들이었고, 폴은 제발 이러지 말라고, 나를 내버려 두지 말라고 애니를 향해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애니는 계속 웃기만 했고,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작아지기는 했지만 웃음소리는 여전히 들려왔고, 그 소리는 문 반대쪽에 머무른 채 작아졌고, 또다시 자물쇠가 철컥 잠기며 또 다른 문이 닫히자 웃음소리는 더욱 줄어들었고(그러나 여전히 존재했고), 또 다른 자물쇠가 철컥 잠기고 빗장이 걸리자 웃음소리가 집 밖으로 움직였고, 애니는 순찰차를 몰고 가다가 차에서 내려 찻길을 가로질러 쇠사슬을 묶어 두고는 다시 차를 타고 웃음 천국을 향해 가 버렸지만, 폴은 여전히 애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웃고 웃고 또 웃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 P471

빌어먹을 만치 생생한 폴의 상상력이 공포를 안겨다 주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일단 그런 경우가 생기면 상황은 하느님이 보우해야만 할 정도로 심각했다. 공포의 상상력이 일단 달아올랐다 하면 하느님만이 폴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상상력이 달아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계점까지 치솟아 맹렬하게 날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상상력을 발동한다는 것은 철없는 짓에 불과했다. 어둠 속에서 이성은 어리석음이 되고 논리는 한낱 꿈이 되어 버린다. - P472

‘폴, 너 자신을 속이려 들지 마. 개떡 같은 진실을 말해. 너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던 남자가, 모두에게 거짓으로 꾸며 낸 이야기를 들려주던 남자가, 이제 와서 자기 자신한테까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거야. 우습지만 사실이야. 한번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타자기는 안 보이는 데다가 치워 버리고 공인중개사 자격증 시험 따위나 준비하는 게 인생에 도움이 될 거다. 인생이 똥통 속으로 추락한 거나 같은 꼴이니 앞으로 먹고 살 궁리를 해야지.‘ - P479

내면의 소리가 속삭였고, 폴은 약간 놀랐다. 내면의 소리가 말 한 대로 된다면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졸면서도 생각했다. 그럴 거라고, 몹시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과속 차량』 원고가 연기 속에 사라질 때 느꼈던 고통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심각할 거라고 생각했다. 애니가 그의 육체에 편집권을 행사하며 도끼로 발을 절단 낼 때 느꼈던 고통을 요로 감염에 걸려 겪는 따끔거리는 고통과 비교하는 것처럼 말이다.
폴은 동시에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그런 일이 생길 경우 애니가 어떤 기분을 느끼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 P481

‘애니, 이 소설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야. 편지에다 ‘당신의 넘버원 팬‘ 이라고 이름을 적어 보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니야. 작가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그 수많은 팬들은 은하계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리고 작가는 신경도 안 써. 이 소설은 나의 전처들이나 우리 어머니나 우리 아버지를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야. 애니, 작가들이 거의 매번 작품 앞에다 누구누구한테 감사한다는 헌사를 집어넣는 이유는, 작품을 독차지하려는 자신의 이기심에 결국에는 작가 스스로도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이란다.‘ - P506

한동안 자신이 이룩한 성과물을 감상했다. 작품을 완성 할 때마다 매번 느꼈던 기분을 그때도 그대로 느꼈다. 매번 이상하게 속이 빈 것처럼 허탈했고, 작은 성공을 위해 어리석은 일에 힘을 쏟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똑같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똑같았다. 몇 개월 동안 정글 속에서 헤매다 겨우겨우 언덕을 올라 정상에 있는 평지로 나왔더니 눈앞에 그저 널찍한 고속도로만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좋은 일 했다고 놀리는 건지 몰라도 고속도로에는 주유소나 볼링장 같은 곳이 몇 군데 붙어 있을 뿐이었다. - P520

‘그 논픽션은 사실에서 출발할 거야. 그러다 그 논픽션에 허구를 덧붙이기 시작할 거고······ 처음에는 아주 조금만······ 그러다 좀더 많이······ 그러다 좀 더 많이. 나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고(어쩌면 그런 의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니를 더욱 추하게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야(더 이상 추해질 것도 없지만.) 단순히 극적 완결성을 만들어 내기 위한 짓이지. 나 자신을 소설로 각색하고 싶지는 않아. 글쓰기는 자위행위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짓만큼은 자신을 잡아먹는 행위라 하여 금지하셨다고.‘ - P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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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 자신에게까지 세헤라자데 행세를 했어.‘
‘폴, 네가 만들어 낸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려줄 거지? 누구한테 들려줄 거야? 애니한테?‘
물론 그렇지 않았다. 폴이 원고 용지 속에 나타난 구멍을 들여다본 것은 애니에게 이야기를 보여 주거나 애니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니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칠 듯한 가려움도. 구름이 점점 엷어지기 시작하더니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폴은 방 안을 흘끗 둘러보았다. 지독했다. 애니를 흘끗 보았다. 더욱 지독했다. 계속 살아 보겠다고 결심했다. 어릴 적 애니가 그랬듯이 연속극 영화에 중독되어 버린 폴은 소설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눈으로 확인 할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고 결심했다. - P402

‘알고 싶어.‘ 그 느낌은 스트립쇼 술집에서 자위하는 것만큼이나 역겹고, 세계에서 가장 솜씨 좋은 콜걸에게 봉사받는 것만큼이나 황홀하다.
‘오 얘야 그것은 나쁜 것이고 오 얘야 그것은 좋은 것이고 오 얘야 결국에 가서는 얼마나 야만적이든 얼마나 노골적이든 전혀 문제가 안된단다. 결국에 가서는 잭슨스가 부르는 노래 제목이랑 똑같아지니까.‘
‘만족할 때까지는 멈추지 마라.‘ - P406

폴은 개리의 행동이 단순한 오류 이상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친구의 행동은 고상하게 잘난 척하는 짓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똥 폼 잡는 짓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쭉 지내던 폴은 1983년에 『가아프가 본 세상』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실수로 그만 주인공 가아프의 어린 아들이 변속기 손잡이에 눈을 꿰뚫려 죽는 장면을 자러 가기 직전에 읽고 말았다.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몇 시간을 뒤척거렸다. 그 슬픈 장면이 마음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 혼란스러운 가운데 허구의 인물 때문에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 너무나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그때 폴이 느낀 감정은 분명히 깊은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감정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고, 오히려 개리가 자신보다 반 데르 발크에게 더 크고 진실한 정을 주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만 불러일으켰다. - P418

이유야 어찌됐든 무엇인가가 폴이 꿈속에서 보았던 매혹적인 형상들을 어지럽혔고, 무엇인가가 그가 들여다보던 원고용지 속의 구멍을 날려 버렸다. 한때는(맹세코 거짓말이 아니다!) 링컨 터널 구멍만큼이나 커 보이던 구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사장에 뭐 재미있는 일 없나 하고 구부정하게 서서 엿보는 담장에 난 작은 구멍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렇게 작은 구멍으로 재미있는 것들을 보려면 눈을 크게 뜨고 목을 길게 빼야 하는데, 대개 진짜 중요한 볼거리들은 눈에 보이는 범위 바깥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구멍으로 보이는 시야가 아주 좁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사실도 아니었다. - 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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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실상 승산이 없었다.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우리는 어둠을 가르며 맹렬히 가라앉았고 냉기가 내 목을 타고 올라와 입술과 뺨에서 핏기를 앗아갔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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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절대 얼굴을 붉히질 않는군.
나는 뭐라고 대꾸하면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남편은 그만큼 힘주어 나를 꼭 붙잡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더는 얼굴을 붉히지 않아, 그게 문제야. 맨날 미안하다고 말은 하지만 얼굴은 붉히지 않아. 이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건가?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 P32

나를 침대에 눕히고 횃불을 들어 내 목에 남은 벌건 자국과 팔과 가슴에 자주색으로 남은 자신의 손자국을 비춰보았다. 멍이 아니라 얼룩이라도 되는 듯이 그걸 문질렀다.
"색이 완벽하네. 이것 좀 봐." 그가 말하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신처럼 귀한 캔버스는 없어." - P33

"나 임신했어요."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 나는 둥그렇게 나온 것처럼 보이도록 배를 살짝 내밀었다. 어쨌든 그는 여자들이 임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랐다. 이상해 보인다는 것 말고는.
내 배를 본 그의 얼굴이 하얘졌다. 거의 나만큼 하얘졌다.
"의사한테 아무 얘기도 못 들었는데."
"의사한테는 안 보여줬어요. 당신한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어서. 여보, 나 정말 기뻐요. 우리한테 둘째가 생기는 거잖아요. 앞으로 셋째도 낳고 또—" 하지만 이미 문이 닫혔다. - P37

문을 열자 작업실 한복판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그 여자아이가 보였다. 돌이야. 나는 살짝 떨렸기 때문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이고, 깨어날 리 없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옅은 진주빛이었고 입술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눈은 감았고 돌로 만든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파포스보다 어려 보였다. 동글동글 귀여운 리본에서 금색으로 칠한 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몸에 딱지도 앉지 않았고 손톱에 모래가 끼지도 않았다. 이 아이는 염소를 따라다니지도 말을 안 듣지도 않을 것이다. 두 뺨 위로 홍조가 보일 것만 같았다. - P42

비단을 담요처럼 두르고 있기에 벗겼다. 손목에 꽃 팔찌를 끼고 있기에 떼어냈다. 아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딸아, 미안."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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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방에서 나갔고 남편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이의 태도에 이를 갈았다.
"당신은 나보다 저 아이를 더 좋아하지?"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요. 나는 골똘히 생각하느라 손질을 하지 않아 떡이 진 그의 긴 머리칼을 쓸어 내렸다. 애가 지금 있는 여선생은 감당을 못 할 정도로 똑똑해서 그래요. 그래서 심심해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가르쳐줄 수가 없으니까요.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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