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가 도박을 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카드를 접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질문들은 놓아 버린다. 루시는 샘에게 왜 그 짐을 혼자 지려고 했는지, 왜 기회가 있을 때 털어놓지 않았는지, 왜 그렇게 우라지게 오만한지 물을 수도 있다. 왜 그렇게 고집이 센지. 그렇지만. 이 모든 게 반다나나 부츠와 마찬가지로 샘의 일부다. 남들과 다른, 고집스러운 규칙에 따라 사는 샘—엄청난 부를 손에 넣었다가 바다에 던져 버릴 수 있는 샘. 루시는 분노와 공포를 접어 누른다. 남아 있는 것은 기나긴 여행 끝에 더러운 집에 도착했을 때의 익숙한 피로감이다. - P341
루시는 눈을 감고 보려고 애쓴다. 루시는 샘을 본다. 반짝이는. 일곱 살 때의 샘, 드레스와 땋은 머리 차림으로 반짝이는. 열한 살 때의 샘, 상실과 검댕 속에서 반짝이는. 열여섯 살 때의 샘, 이 신념, 단단히 자란 뼈. - P342
루시는 금을 본다. 샘이 버린 금이 아니라, 다른 것. 이 언덕. 이 개울. 그런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속 조각 이상의 가치로 빛나는. 이곳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겼다. 그럼에도 이 땅은 아름답다. 이곳은 그들의 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샘은 샘 나름의 방식으로 이 땅에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 주려 한 거다. - P342
샘의 턱이 올라간다. 샘의 고집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루시는 긴 세월 속으로 몸을 기울여 샘의 뺨을 친다. 갈매기들이 까악거리며 단단하고 맑은 하늘로 솟아오른다. 갈매기 날개 그림자가 샘의 뺨에 그늘을 만든다. 샘의 눈에. 갈매기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도 그늘이 남아 있다. 루시는 최고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떻게 몸을 돌려 어떻게 후려치는지. 어떻게 온몸과 멀쩡한 다리와 나쁜 삶의 무게를 다 싣는지. 배[腹] 속 침니[沈泥] 속 금만큼 무거운 슬픔에 짓눌린 삶의 무게를 어떻게 손바닥에 전부 싣는지. 그러고 난 다음 어떻게 고함을 치며 말로 사람을 무너뜨리고 움츠러들고 주눅 들게 만드는지. 네가 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해? 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 건 나야. 넌 가치가 없어. 가. 등신. 어떻게 그런 다음 뺨을 쓰다듬어 주는지. 바오베이. - P346
벽 앞에 선 루시는 이야기와 역사책을 두고 샘과 벌였던 어리석은 말다툼을 생각한다. 루시가 진실이 하나뿐이라고 믿을 만큼 어리석었을 때. 루시는 소리 없이 미안하다고 말한다. - P348
루시는 한참 앉아서 물이 빠지는 걸 본다. 루시 자신도 비워진다. 자기와 닮은 얼굴들 사이에 있더라도 혼자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 P351
새로운 곳, 새로운 언어가 있을지는 몰라도—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사람이 손대지 않은 야생의 땅은 남지 않았다. 루시는 파란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걸 읽어 보아야 이제 의미가 없다. - P352
코가 낯설고, 여위고 조용해진 얼굴이 낯설다. 루시가 반짝반짝 빛나는 미모를 갖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남자들이 보면서 가슴앓이를 하게 만들, 마치 탐사봉을 든 것처럼 이끌리게 만들 어떤 아름다움을 지니게 될 것이다. 루시가 잘라 버린 머리카락이 귀신처럼 다시 돌아왔다. 루시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하얀 목은 루시의 것이다. 흠 없는 얼굴은 루시의 것이다. 이제 아무도 루시를 다치게 할 수 없다. 루시의 육신은 불멸이다. 아니 너무나 많은 남자의 이야기 속에서 너무나 여러 번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루시는 이 몸 안에 깃든 귀신이다. 자기가 과연 죽을 수나 있을까 싶다. - P353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일렁이는 빛. 누가 그걸 손에 넣을 수 있는가, 그 거대하 고 미치게 하는 빛, 영원히 멀어지는 신기루, 누구의 소유가 되거나 한곳에 고정되기를 거부하고 빛의 각도에 따라 변하던 풀을. 누가 그걸 알 수 있나, 이 땅이 누구에게 무엇인지를, 죽었거나 살았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운이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무수한 삶이 태어나고 파괴되게 만든 이 땅의 공포와 아량을.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이 그토록 떠돌아다닌 게 아닌가? 가난 때문도 절박함 때문도 탐욕 때문도 분노 때문도 아니고, 눈앞에 땅이 펼쳐지는 한은, 계속 찾아 헤매는 한은 영원히 탐색자이고 패배자가 아닐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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