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산만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핀잔을 듣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길을 잘못 들거나 지갑을 잃어버리는 일 따위는 적어도 문학의 세계에서는 대개 걱정거리라기보다 웃어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예컨대 키르케고르는 산만함을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다양한 면면을 즐거운 마음으로 섬세하게 감지하는 일이라며 예찬했다. 베르그송은 산만함이란 우리의 인식을 날카롭게 벼릴 수 있는 도구라고 말했다. 프루스트는 앞만 보고 곧장 나아갈 때가 아니라 이리저리 방황하고 헤맬 때 비로소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 P27

다윈처럼 돌연 아름다움에 무감해지는 증상을 ‘쾌감상실증‘이라 하는데, 이런 상태에 빠지면 예술을 경험할 때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습관의 법칙들」이라는 글에서 이 기이한 증상을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미묘하고 다양한 감정의 층위를 느끼기 위해서는 아무런 목적성 없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이것은 곧 습관이 된다고 말했다. 뇌가 음악, 시, 그림과 같이 무용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이나 정보 탐색에만 몰두하면 감정을 표현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뇌의 유연성은 퇴행하고 만다. - P33

윌리엄 제임스는 우연히 다윈의 자서전을 읽고 학생들에게 지식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그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깊고 풍부한 사고를 하려면 감정의 충격파가 집중력을 자극해야 한다. - P33

프랑스 인류학자 알베르 피에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존재 방식은 고릴라나 침팬지와 다르다. 인간은 ‘존재와 부재‘,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동시에 처리하며 일종의 ‘유익한 산만함‘을 실행한다. 이런 ‘불완전한 부분‘ 때문에 인간은 현재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고, 쓸데없는 행동을 하거나 불현듯 딴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 P41

알베르 피에트는 오직 인간만이 한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딴생각에 빠지며, 처음에 품었던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일에는 기꺼이 뒤로 물러설 줄 안다고 말했다. - P43

비극을 겪으면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산만하다가도 심오한 생각에 빠지는 능력을 갖춘 인간은 진지하면서도 가벼울 수 있고, 무언가에 몰두하다가도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기에 균형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 P43

프랑스인에게 ‘산만한 사람‘은 고루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실히 제 역할을 하기보다 몽상에 빠져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는 덤벙거리기는 하지만 매력적인 사람으로 인식된다. 반면 미국인은 산만함을 부정적이고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왜 발터 베냐민이 말한 즐겁고 유쾌한 게으름, "자의적으로 잇따라 일어나는 감각"에 자신을 내맡기는 일에서 그토록 멀어지게 되었을까? - P54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게으름을 휴식의 한 방식으로 보았다. 그는 과도한 집중이 유발하는 긴장감을 해소하고, 세상을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잠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게으름이나 휴식이 수면만큼이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휴식은 "노동이나 쾌락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약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의 자아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고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해준다. 게으름은 "만족감을 주기는 하지만 과도한 몰입으로 결국 정신을 지치게 하는 활동"에 제동을 걸어 집중과 휴식의 균형을 맞춰준다. 따라서 산만함은 악덕이 아니라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산만함이 없으면 정신은 결코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없고, "그 가능성과 역량"을 확장할 수도 없다. - P55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산만함과 집중력의 상호작용, 그 열려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과 담론이 통제 없이 자유롭게 오가며 사람들을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게 할 때, 민족, 자유, 평등과 같은 몇몇 단어들은 그들을 움직이게 한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자유롭게 부유하는 말과 생각의 세계에서 우리는 디지털 기기가 유발하는 산만함과는 전혀 다른 산만함을 경험한다. 이런 산만함의 세계는 우리를 여러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데, 이때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다 해도, 각각의 방향에서 깊이 있는 사유를 하게 된다. 이런 긍정적인 산만함의 핵심은 바로 만족 지연에 있다. 미래의 더 큰 만족을 위해 현재의 즉각적인 즐거움을 뒤로 미룰 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자유롭게 순환한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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