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는 브라이트빌을 어깨에 올려놓고 둥지로 향했다.
"내가 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엄마." 브라이트빌이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엄마랑······ 엄마랑 같이 날고 싶어요." 어린 기러기는 금세 쌔근쌔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냈다. - P128

날씨 좋은 저녁에는 모두 바깥에 앉아서, 깜빡거리면서 호수 주변을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구경했다. 등을 대고 누워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저기 크고 동그란 게 달이야 그리고 저기 작은 불빛은 별이라고 해 한번은 별이 몇 개나 있나 세어 봤어 그런데 나는 열 까지밖에 못 세거든 그래서 열까지 세고 또 세었어 별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지만 열 개보다 많다는 건 알아." 칫챗이 말했다.
"저기 보이는 불빛들이 모두 별은 아니란다. 몇몇은 행성이야." 로즈가 말했다.
"행성이 뭐예요?" 칫챗이 물었다.
"행성은 붙박이별 주위를 도는 별 무리로, 천체의 일부란다."
"천체가 뭐예요?"
"외계에 존재하는 물체들이지."
"외계가 뭐예요?"
"외계란 우리 행성의 대기 바깥에 있는 우주 공간이야."
"우주는 뭔데요?"
"우주는 세상 모든 것과 모든 장소를 포함하는 곳이야." - P133

"그럼 이제 엄마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걸까요?" 브라이트빌이 물었다.
"네가 나를 뭐라고 부르든, 나는 여전히 네 엄마 역할을 할 거야."
"그럼 계속 엄마라고 부를게요."
"그럼 나도 널 계속 아들이라고 부를게."
"우리는 이상한 가족이에요. 그렇지만 이런 식도 좋은 것 같아요."
브라이트빌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로즈가 말했다. - P130

엄마가 로봇이라면 분명 힘든 점이 있을 것이다. 브라이트빌에게 가장 힘든 것은 로즈를 둘러싼 미스터리였다. 엄마는 어디에서 왔을까? 로봇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 엄마가 언제까지나 내 옆에 있어 줄까? - P139

"엄마도 단추가 있네요! 그동안 전혀 몰랐어요."
"나도 몰랐어." 로즈가 말했다.
어린 기러기가 깔깔거렸다.
"엄마도 스스로에 관해 배울 게 있네요." - P147

"나는 내 단추를 누르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 같아. 네가 한 번 해 볼래?" 로즈가 말했다.
"누르면 어떻게 되는데요?"
"아마도 난 작동을 멈추겠지. 하지만 네가 단추를 한 번 더 누르면 다시 작동할 거야."
"네? ‘아마도‘라고요? 만약에 엄마 생각이 틀리면요? 엄마가 깨어났는데 다른 로봇이 되어 있으면요? 아예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해요? 엄마가 작동을 멈추는 거 싫어요!" 로즈는 머리를 원래대로 돌렸다. 브라이트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로즈는 브라이트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렇게 걱정되면 하지 않아도 된단다. 겁먹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나. 괜찮니?" - P148

"브라이트빌, 그거 아니? 우리가 너희 엄마를 처음 봤을 때, 네 엄마는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단다. 어떤 푹신한 것에 싸여서 말이야."
브라이트빌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때 네 엄마가 얼마나 작아 보였는지 믿기 힘들 거야. 상자 안에 한껏 접혀 있었지······. 브라이트빌이 코를 훌쩍거렸다.
"우리는 네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우리가 다가가자 갑자기 살아나서는 번쩍이는 괴물처럼 상자를 뚫고 나왔단다.
브라이트빌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로즈가 브라이트빌을 안아 주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괜찮니?"
"오늘 로봇에 관해서는 충분히 배운 것 같아요." 브라이트빌이 엄마에게 속삭였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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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비틀거리며 걷던 로즈는 평평하고 탁 트인, 솔잎이 폭신하게 뒤덮인 땅을 발견했다. 안전한 장소 같았다. 안전이야말로 로봇이 정말 원하던 것이었다. 로즈는 그곳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울퉁불퉁 불규칙한 자연의 형상과 어울리지 않는 완벽한 선과 각을 가진 존재가 숲에 온 것이다. - P27

갑자기 로즈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로즈는 초점을 다시 맞춰 계속 관찰했다. 산기슭의 작은 언덕 위 하늘에서 독수리들이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고, 멀리 떨어진 바위에서는 도마뱀들이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딸기 덤불에는 오소리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무스 한 마리가 개울을 건너고 있었다. 참새들은 열을 맞추어 나무 위를 날아다녔다. 섬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섬에 새로운 종류의 생명이 나타났다. 아주 낯설고 인공적인 생명이. - P34

로즈는 자기가 어떻게 섬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모른다. 자신이 공장에 서 만들어진 것도, 창고에 쌓여 있다가 화물선에 실려 바다를 건넜다는 것도 모른다. 폭풍에 배가 난파되었다는 것도, 섬에 닿기 전까지 며칠씩이나 나무 상자에 실려 파도에 떠밀려 다녔다는 것도 모른다. 호기심 많은 해달이 우연히 자기를 작동시켰다는 것도 모른다. 로즈는 섬을 둘러볼 때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로즈에게 섬은 고향이었다. - P35

대벌레는 몸이 가늘고 길었다. 색도 모양도 진짜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작은 두 눈과 가느다란 더듬이가 있었다. 대벌레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다. 로봇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둘은 잠시 그렇게 앉아서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로즈는 대벌레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주 중요한 걸 가르쳐 주었어요. 위장술이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 말이에요. 분명 제 생존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 P51

로즈는 꽃들이 태양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로즈는 들쥐들이 수풀 사이를 기어 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로즈는 솔향이 배어 있는 촉촉한 아침 공기를 맡았다.
로즈는 몸에 바른 진흙 속에서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일주일이 지나자 식물 다발은 사라졌다. 그리고 바닷가에 새로운 해초 더미가 생겼다. 그리고 일주일 뒤, 해초 더미는 사라지고 산에 새로운 딸기나무 덤불이 생겼다. 그다음에는 강 기슭에 새로운 통나무가, 그다음에는 숲에 새로운 바위가 생겼다. - P54

구름이 하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미가 정교하게 거미줄을 짰다.
딸기 열매가 배고픈 입들을 유혹했다.
여우가 토끼를 쫓았다.
버섯이 낙엽 더미에서 돋아났다.
거북이가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이끼가 나무뿌리 위에 퍼졌다.
독수리가 죽은 동물 앞에 등을 구부리고 앉았다.
파도가 해안선에 부딪혔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고, 애벌레는 나비가 되었다.
위장한 로봇은 이 모든 것을 관찰했다. - P55

로즈는 박새가 아침마다 같은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고,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오후마다 종달새가 같은 바위를 스쳐 날아가고,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도 알아챘다. 저녁마다 까치 두 마리가 같은 언덕에서 서로를 향해 지저귄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몇 주 동안 관찰한 뒤에 로즈는 어떤 새가 노래하는지, 언제 노래를 하는지, 왜 노래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로봇은 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로즈는 고슴도치와 도롱뇽과 딱정벌레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온갖 동물이 하나의 공통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표현 방식은 서로 달랐다. - P56

"안녕하세요? 저는 로즈예요." 동물들은 깜짝 놀랐다.
"괴물이야!"
올빼미 스우퍼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전 괴물이 아니에요. 전 로봇이에요." 로즈가 말했다.
참새 떼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우리를 내버려 둬! 어떤 끔찍한 곳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족제비 다트가 수풀 속에 몸을 숨기며 말했다.
"제 고향은 여기예요. 전 평생을 이 섬에서 보냈어요." 로즈가 말했다.
"그럼 왜 더 일찍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거야?" 높은 나뭇가지에 앉은 올빼미가 소리쳤다.
"그동안은 동물의 언어를 몰랐거든요."
로즈가 말했다. - P61

"그래서 우리한테 바라는 게 뭐야?" 여우 핑크가 으르렁댔다.
"저는 많은 동물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관찰 했어요. 당신들의 생존 기술을 제게 가르쳐 주세요." 로즈가 말했다.
"난 너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넌 정말······ 자연스럽지 않아!" 높은 곳에서 올빼미가 소리쳤다.
"저 괴물은 우리를 모조리 잡아먹고 말 거예요!" 마멋 다운이 소리를 지르며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저는 아무도 잡아먹지 않아요. 전 먹을 필요가 없거든요." 로즈가 말했다. - P62

"로즈, 제발! 빨리 좀 뽑아! 진짜 아프단 말이야!"
로즈는 재빨리 두 번째 가시를 뽑았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핑크는 눈을 질끈 감고,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옆에 가시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핑크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고마워, 로즈, 네게 신세졌어" 핑크는 살짝 웃어 보이고는 절뚝거리며 떠났다. - P67

"아까 당신이 한 행동 말이에요. 정말 굉장했어요. 눈을 돌릴 수가 없었어요." 로즈가 말했다.
"굉장했다고? 정말?"
기묘한 생물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혓바닥 내밀 때 무리를 좀 하긴 했지."
"진짜 죽은 줄 알았어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아까 정말로 죽었던 거예요?"
"물론 아니지! 죽었다가 살아나는 건 아무도 할 수 없어. 난 그냥 연기한 것뿐이야!"
"이해가 안 돼요."
"간단해. 내가 그럴 듯하게 죽은 척을 하면, 그 늙은 오소리가 더럽다고 가 버릴 걸 알고 있었거든. 실제로 그렇게 됐잖아.
우리 주머니쥐는 모두 타고난 연기자야." - P75

"그런데 왜 연기를 하는 거예요?" 로즈가 물었다.
"재미있잖아! 그리고 그게 살아남는 데 도움이 돼. 너도 봤잖아. 혹시 알아? 네 생존에도 도움이 될지." 로봇의 뇌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연기가 생존 전략이 될 수 있다니! 주머니쥐가 죽은 척 연기를 할 수 있다면, 로봇도 살아 있는 척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덜 기계적이고, 더 자연스럽게. 로즈가 친근하게 행동한다면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친구들은 로즈가 더 오래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정말 훌륭한 계획이었다. - P78

"네, 새끼 기러기가 살아남길 바라요. 하지만 어떻게 엄마인 척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로즈가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새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쉴 곳을 마련해 주면 돼요.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거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되, 지나친 응석은 받아 주면 안 돼요. 걷고, 말하고, 헤엄치고, 날고, 다른 기러기들과 어울리고, 스스로를 돌보도록 가르치면 그게 바로 엄마인 거죠." 로즈는 그저 새끼 기러기를 내려다보았다. - P87

"안녕하세요? 저는 로즈예요. 그리고 이 아이는 브라이트빌이에요. 겁내지 마세요. 저는 아무도 헤치지 않아요." 로즈는 나무를 내밀었다.
"선물로 나무를 가지고 왔어요. 아름다운 댐을 짓는 데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난 괴물한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을······."
비버 씨가 말하는데, 비버 부인이 끼어들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저렇게 훌륭한 자작나무를 버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는 확고하다오." 비버 씨가 말했다.
비버 부인이 남편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무례하게 굴거나, 고집을 피울 때 말려 달라고 했던 거 기억하죠? 지금 당신이 딱 그래요!" - P92

"엄마, 안아 줘요!"
로즈는 브라이트빌을 안아 주었다. 로봇의 몸은 딱딱한 기계였지만, 그만큼 튼튼하고 안전했다. 새끼 기러기는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브라이트빌은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엄마의 품 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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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은 알고 있었을까? 이미 예전부터 애니가 그를 얼마나 심하게 협박했는지, 애니가 그의 본질적인 자아에, 영혼을 움직이는 간과 허파 같은 중요한 부분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내놨는지 그가 정말 알았던 것일까? 끊임없는 공포 속에 갇혀 있음은 알았지만, 예전에는 당연한 줄로만 여기고 단단히 소유했던 자신만의 고유한 주체성이 그때까지 얼마나 많이 지워져 나갔는지도 알았던 것일까? - P433

폴은 한 가지만은 어느 정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 글을 써 오면서 없어진 글쇠나 열병이나 뚝뚝 끊어지는 기억이나 배짱을 잃어버린 것 말고도 잘못된 점이 많았던 것처럼, 혀가 마비된 것 말고도 자신에게 잘못된 점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끔찍했지만 모두 사실이었고 너무나 뚜렷했다. 아주 무서우리만치 뚜렷했다. 폴은 조금씩 죽어 가고 있었지만, 그렇게 죽는 것도 두려워 했던 만큼 고약하진 않았다. 그러나 죽어가는 동시에 희미해지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무서운 일이었다. 오직 멍청한 녀석들이나 희미해져서 사라지는 법이므로. - P433

폴은 그 이름 모를 청년에게 무섭고도 가슴 아픈 연민을 느꼈는데, 슬그머니 또 다른 감정이 끼어들었다. 그 감정을 면밀히 살피고 나서 그것이 질투임을 알았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그 경찰이 혹시 가정을 꾸렸다면 다시는 아내와 자식들 품으로 돌아갈 수 없을 터였지만, 한편으로 애니 윌크스에게서는 벗어났기 때문이다. - P444

애니는 악마의 행운을 가지고 있었고, 궁지에 몰릴 때마다 대체로 악마같이 영악하게 잘도 빠져 나왔다. ‘대체로‘ 그랬다. 볼더에서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대부분 운이 좋아서였다. 이제 또다시 궁지에서 탈출했다. 폴은 방금 그 과정을 눈으로 확인했다. 애니는 잔디 깎이 차에 묻은 피는 씻어 냈지만 차 밑면에 붙은 회전 칼날까지는 씻지 않았다. 칼날 틀 자체에는 손도 안 댄 것이다. 나중에 실수를 기억해 낼 수도 있겠지만 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급했던 순간이 지나고 일단 과거가 되어 버리면, 애니의 마음에서는 그 일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폴은 사람의 마음과 잔디 깎이차가 서로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겉으로만 보면 둘 다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들을 뒤집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날카로운 칼날을 자랑하는 피투성이 살인 기계임을 알 수 있다. - P448

‘나를 죽이러 왔구나.‘
폴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느낀 유일한 감정은 피로 끝에 찾아온 안도감뿐이었다. - P450

"내일 경찰들이 잃어버린 불쌍한 어린 양을 찾으러 들를 때를 대비하는 거야. 정상에서 벗어난 꼴을 경찰이 보면 안 되잖아. 그렇지, 폴?"
‘야, 그 사람들 보고 잔디 깎이 밑이나 뒤져 보라고 해. 일단 보면 정상에서 벗어난 것들이 우글우글할 테니까.‘ - P466

애니가 웃었다. 웃음보를 더욱더 화끈하게 터뜨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철컥 소리가 났고, 지하실 전등이 모두 꺼졌다. 애니는 계속 웃고만 있었고, 폴은 비명 지르지 않겠다고, 구걸하지 않겠다고 혼자서 맹세했다. 비명 지르고 구걸할 기회는 이미 지났으므로. 하지만 어둠이 깔린 축축한 밀실과 울려 퍼지는 애니의 웃음소리는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것들이었고, 폴은 제발 이러지 말라고, 나를 내버려 두지 말라고 애니를 향해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애니는 계속 웃기만 했고,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작아지기는 했지만 웃음소리는 여전히 들려왔고, 그 소리는 문 반대쪽에 머무른 채 작아졌고, 또다시 자물쇠가 철컥 잠기며 또 다른 문이 닫히자 웃음소리는 더욱 줄어들었고(그러나 여전히 존재했고), 또 다른 자물쇠가 철컥 잠기고 빗장이 걸리자 웃음소리가 집 밖으로 움직였고, 애니는 순찰차를 몰고 가다가 차에서 내려 찻길을 가로질러 쇠사슬을 묶어 두고는 다시 차를 타고 웃음 천국을 향해 가 버렸지만, 폴은 여전히 애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웃고 웃고 또 웃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 P471

빌어먹을 만치 생생한 폴의 상상력이 공포를 안겨다 주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일단 그런 경우가 생기면 상황은 하느님이 보우해야만 할 정도로 심각했다. 공포의 상상력이 일단 달아올랐다 하면 하느님만이 폴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상상력이 달아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계점까지 치솟아 맹렬하게 날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상상력을 발동한다는 것은 철없는 짓에 불과했다. 어둠 속에서 이성은 어리석음이 되고 논리는 한낱 꿈이 되어 버린다. - P472

‘폴, 너 자신을 속이려 들지 마. 개떡 같은 진실을 말해. 너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던 남자가, 모두에게 거짓으로 꾸며 낸 이야기를 들려주던 남자가, 이제 와서 자기 자신한테까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거야. 우습지만 사실이야. 한번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타자기는 안 보이는 데다가 치워 버리고 공인중개사 자격증 시험 따위나 준비하는 게 인생에 도움이 될 거다. 인생이 똥통 속으로 추락한 거나 같은 꼴이니 앞으로 먹고 살 궁리를 해야지.‘ - P479

내면의 소리가 속삭였고, 폴은 약간 놀랐다. 내면의 소리가 말 한 대로 된다면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졸면서도 생각했다. 그럴 거라고, 몹시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과속 차량』 원고가 연기 속에 사라질 때 느꼈던 고통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심각할 거라고 생각했다. 애니가 그의 육체에 편집권을 행사하며 도끼로 발을 절단 낼 때 느꼈던 고통을 요로 감염에 걸려 겪는 따끔거리는 고통과 비교하는 것처럼 말이다.
폴은 동시에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그런 일이 생길 경우 애니가 어떤 기분을 느끼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 P481

‘애니, 이 소설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야. 편지에다 ‘당신의 넘버원 팬‘ 이라고 이름을 적어 보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니야. 작가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그 수많은 팬들은 은하계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리고 작가는 신경도 안 써. 이 소설은 나의 전처들이나 우리 어머니나 우리 아버지를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니야. 애니, 작가들이 거의 매번 작품 앞에다 누구누구한테 감사한다는 헌사를 집어넣는 이유는, 작품을 독차지하려는 자신의 이기심에 결국에는 작가 스스로도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이란다.‘ - P506

한동안 자신이 이룩한 성과물을 감상했다. 작품을 완성 할 때마다 매번 느꼈던 기분을 그때도 그대로 느꼈다. 매번 이상하게 속이 빈 것처럼 허탈했고, 작은 성공을 위해 어리석은 일에 힘을 쏟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똑같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똑같았다. 몇 개월 동안 정글 속에서 헤매다 겨우겨우 언덕을 올라 정상에 있는 평지로 나왔더니 눈앞에 그저 널찍한 고속도로만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좋은 일 했다고 놀리는 건지 몰라도 고속도로에는 주유소나 볼링장 같은 곳이 몇 군데 붙어 있을 뿐이었다. - P520

‘그 논픽션은 사실에서 출발할 거야. 그러다 그 논픽션에 허구를 덧붙이기 시작할 거고······ 처음에는 아주 조금만······ 그러다 좀더 많이······ 그러다 좀 더 많이. 나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고(어쩌면 그런 의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니를 더욱 추하게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야(더 이상 추해질 것도 없지만.) 단순히 극적 완결성을 만들어 내기 위한 짓이지. 나 자신을 소설로 각색하고 싶지는 않아. 글쓰기는 자위행위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짓만큼은 자신을 잡아먹는 행위라 하여 금지하셨다고.‘ - P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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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 자신에게까지 세헤라자데 행세를 했어.‘
‘폴, 네가 만들어 낸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려줄 거지? 누구한테 들려줄 거야? 애니한테?‘
물론 그렇지 않았다. 폴이 원고 용지 속에 나타난 구멍을 들여다본 것은 애니에게 이야기를 보여 주거나 애니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니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칠 듯한 가려움도. 구름이 점점 엷어지기 시작하더니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폴은 방 안을 흘끗 둘러보았다. 지독했다. 애니를 흘끗 보았다. 더욱 지독했다. 계속 살아 보겠다고 결심했다. 어릴 적 애니가 그랬듯이 연속극 영화에 중독되어 버린 폴은 소설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눈으로 확인 할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고 결심했다. - P402

‘알고 싶어.‘ 그 느낌은 스트립쇼 술집에서 자위하는 것만큼이나 역겹고, 세계에서 가장 솜씨 좋은 콜걸에게 봉사받는 것만큼이나 황홀하다.
‘오 얘야 그것은 나쁜 것이고 오 얘야 그것은 좋은 것이고 오 얘야 결국에 가서는 얼마나 야만적이든 얼마나 노골적이든 전혀 문제가 안된단다. 결국에 가서는 잭슨스가 부르는 노래 제목이랑 똑같아지니까.‘
‘만족할 때까지는 멈추지 마라.‘ - P406

폴은 개리의 행동이 단순한 오류 이상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친구의 행동은 고상하게 잘난 척하는 짓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똥 폼 잡는 짓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쭉 지내던 폴은 1983년에 『가아프가 본 세상』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실수로 그만 주인공 가아프의 어린 아들이 변속기 손잡이에 눈을 꿰뚫려 죽는 장면을 자러 가기 직전에 읽고 말았다.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몇 시간을 뒤척거렸다. 그 슬픈 장면이 마음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 혼란스러운 가운데 허구의 인물 때문에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 너무나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그때 폴이 느낀 감정은 분명히 깊은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감정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고, 오히려 개리가 자신보다 반 데르 발크에게 더 크고 진실한 정을 주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만 불러일으켰다. - P418

이유야 어찌됐든 무엇인가가 폴이 꿈속에서 보았던 매혹적인 형상들을 어지럽혔고, 무엇인가가 그가 들여다보던 원고용지 속의 구멍을 날려 버렸다. 한때는(맹세코 거짓말이 아니다!) 링컨 터널 구멍만큼이나 커 보이던 구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사장에 뭐 재미있는 일 없나 하고 구부정하게 서서 엿보는 담장에 난 작은 구멍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렇게 작은 구멍으로 재미있는 것들을 보려면 눈을 크게 뜨고 목을 길게 빼야 하는데, 대개 진짜 중요한 볼거리들은 눈에 보이는 범위 바깥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구멍으로 보이는 시야가 아주 좁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사실도 아니었다. - 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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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실상 승산이 없었다.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우리는 어둠을 가르며 맹렬히 가라앉았고 냉기가 내 목을 타고 올라와 입술과 뺨에서 핏기를 앗아갔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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