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 자신에게까지 세헤라자데 행세를 했어.‘ ‘폴, 네가 만들어 낸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려줄 거지? 누구한테 들려줄 거야? 애니한테?‘ 물론 그렇지 않았다. 폴이 원고 용지 속에 나타난 구멍을 들여다본 것은 애니에게 이야기를 보여 주거나 애니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니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칠 듯한 가려움도. 구름이 점점 엷어지기 시작하더니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폴은 방 안을 흘끗 둘러보았다. 지독했다. 애니를 흘끗 보았다. 더욱 지독했다. 계속 살아 보겠다고 결심했다. 어릴 적 애니가 그랬듯이 연속극 영화에 중독되어 버린 폴은 소설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눈으로 확인 할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고 결심했다. - P402
‘알고 싶어.‘ 그 느낌은 스트립쇼 술집에서 자위하는 것만큼이나 역겹고, 세계에서 가장 솜씨 좋은 콜걸에게 봉사받는 것만큼이나 황홀하다. ‘오 얘야 그것은 나쁜 것이고 오 얘야 그것은 좋은 것이고 오 얘야 결국에 가서는 얼마나 야만적이든 얼마나 노골적이든 전혀 문제가 안된단다. 결국에 가서는 잭슨스가 부르는 노래 제목이랑 똑같아지니까.‘ ‘만족할 때까지는 멈추지 마라.‘ - P406
폴은 개리의 행동이 단순한 오류 이상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친구의 행동은 고상하게 잘난 척하는 짓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똥 폼 잡는 짓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쭉 지내던 폴은 1983년에 『가아프가 본 세상』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실수로 그만 주인공 가아프의 어린 아들이 변속기 손잡이에 눈을 꿰뚫려 죽는 장면을 자러 가기 직전에 읽고 말았다.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몇 시간을 뒤척거렸다. 그 슬픈 장면이 마음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 혼란스러운 가운데 허구의 인물 때문에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 너무나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그때 폴이 느낀 감정은 분명히 깊은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감정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고, 오히려 개리가 자신보다 반 데르 발크에게 더 크고 진실한 정을 주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만 불러일으켰다. - P418
이유야 어찌됐든 무엇인가가 폴이 꿈속에서 보았던 매혹적인 형상들을 어지럽혔고, 무엇인가가 그가 들여다보던 원고용지 속의 구멍을 날려 버렸다. 한때는(맹세코 거짓말이 아니다!) 링컨 터널 구멍만큼이나 커 보이던 구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사장에 뭐 재미있는 일 없나 하고 구부정하게 서서 엿보는 담장에 난 작은 구멍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렇게 작은 구멍으로 재미있는 것들을 보려면 눈을 크게 뜨고 목을 길게 빼야 하는데, 대개 진짜 중요한 볼거리들은 눈에 보이는 범위 바깥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구멍으로 보이는 시야가 아주 좁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운 사실도 아니었다. - P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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