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비틀거리며 걷던 로즈는 평평하고 탁 트인, 솔잎이 폭신하게 뒤덮인 땅을 발견했다. 안전한 장소 같았다. 안전이야말로 로봇이 정말 원하던 것이었다. 로즈는 그곳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울퉁불퉁 불규칙한 자연의 형상과 어울리지 않는 완벽한 선과 각을 가진 존재가 숲에 온 것이다. - P27

갑자기 로즈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로즈는 초점을 다시 맞춰 계속 관찰했다. 산기슭의 작은 언덕 위 하늘에서 독수리들이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고, 멀리 떨어진 바위에서는 도마뱀들이 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딸기 덤불에는 오소리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무스 한 마리가 개울을 건너고 있었다. 참새들은 열을 맞추어 나무 위를 날아다녔다. 섬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섬에 새로운 종류의 생명이 나타났다. 아주 낯설고 인공적인 생명이. - P34

로즈는 자기가 어떻게 섬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모른다. 자신이 공장에 서 만들어진 것도, 창고에 쌓여 있다가 화물선에 실려 바다를 건넜다는 것도 모른다. 폭풍에 배가 난파되었다는 것도, 섬에 닿기 전까지 며칠씩이나 나무 상자에 실려 파도에 떠밀려 다녔다는 것도 모른다. 호기심 많은 해달이 우연히 자기를 작동시켰다는 것도 모른다. 로즈는 섬을 둘러볼 때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로즈에게 섬은 고향이었다. - P35

대벌레는 몸이 가늘고 길었다. 색도 모양도 진짜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작은 두 눈과 가느다란 더듬이가 있었다. 대벌레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다. 로봇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둘은 잠시 그렇게 앉아서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로즈는 대벌레를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주 중요한 걸 가르쳐 주었어요. 위장술이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 말이에요. 분명 제 생존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 P51

로즈는 꽃들이 태양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로즈는 들쥐들이 수풀 사이를 기어 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로즈는 솔향이 배어 있는 촉촉한 아침 공기를 맡았다.
로즈는 몸에 바른 진흙 속에서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일주일이 지나자 식물 다발은 사라졌다. 그리고 바닷가에 새로운 해초 더미가 생겼다. 그리고 일주일 뒤, 해초 더미는 사라지고 산에 새로운 딸기나무 덤불이 생겼다. 그다음에는 강 기슭에 새로운 통나무가, 그다음에는 숲에 새로운 바위가 생겼다. - P54

구름이 하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미가 정교하게 거미줄을 짰다.
딸기 열매가 배고픈 입들을 유혹했다.
여우가 토끼를 쫓았다.
버섯이 낙엽 더미에서 돋아났다.
거북이가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이끼가 나무뿌리 위에 퍼졌다.
독수리가 죽은 동물 앞에 등을 구부리고 앉았다.
파도가 해안선에 부딪혔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고, 애벌레는 나비가 되었다.
위장한 로봇은 이 모든 것을 관찰했다. - P55

로즈는 박새가 아침마다 같은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고,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오후마다 종달새가 같은 바위를 스쳐 날아가고,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도 알아챘다. 저녁마다 까치 두 마리가 같은 언덕에서 서로를 향해 지저귄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몇 주 동안 관찰한 뒤에 로즈는 어떤 새가 노래하는지, 언제 노래를 하는지, 왜 노래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로봇은 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로즈는 고슴도치와 도롱뇽과 딱정벌레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온갖 동물이 하나의 공통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표현 방식은 서로 달랐다. - P56

"안녕하세요? 저는 로즈예요." 동물들은 깜짝 놀랐다.
"괴물이야!"
올빼미 스우퍼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전 괴물이 아니에요. 전 로봇이에요." 로즈가 말했다.
참새 떼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우리를 내버려 둬! 어떤 끔찍한 곳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족제비 다트가 수풀 속에 몸을 숨기며 말했다.
"제 고향은 여기예요. 전 평생을 이 섬에서 보냈어요." 로즈가 말했다.
"그럼 왜 더 일찍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거야?" 높은 나뭇가지에 앉은 올빼미가 소리쳤다.
"그동안은 동물의 언어를 몰랐거든요."
로즈가 말했다. - P61

"그래서 우리한테 바라는 게 뭐야?" 여우 핑크가 으르렁댔다.
"저는 많은 동물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관찰 했어요. 당신들의 생존 기술을 제게 가르쳐 주세요." 로즈가 말했다.
"난 너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넌 정말······ 자연스럽지 않아!" 높은 곳에서 올빼미가 소리쳤다.
"저 괴물은 우리를 모조리 잡아먹고 말 거예요!" 마멋 다운이 소리를 지르며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저는 아무도 잡아먹지 않아요. 전 먹을 필요가 없거든요." 로즈가 말했다. - P62

"로즈, 제발! 빨리 좀 뽑아! 진짜 아프단 말이야!"
로즈는 재빨리 두 번째 가시를 뽑았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핑크는 눈을 질끈 감고,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옆에 가시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핑크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고마워, 로즈, 네게 신세졌어" 핑크는 살짝 웃어 보이고는 절뚝거리며 떠났다. - P67

"아까 당신이 한 행동 말이에요. 정말 굉장했어요. 눈을 돌릴 수가 없었어요." 로즈가 말했다.
"굉장했다고? 정말?"
기묘한 생물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혓바닥 내밀 때 무리를 좀 하긴 했지."
"진짜 죽은 줄 알았어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아까 정말로 죽었던 거예요?"
"물론 아니지! 죽었다가 살아나는 건 아무도 할 수 없어. 난 그냥 연기한 것뿐이야!"
"이해가 안 돼요."
"간단해. 내가 그럴 듯하게 죽은 척을 하면, 그 늙은 오소리가 더럽다고 가 버릴 걸 알고 있었거든. 실제로 그렇게 됐잖아.
우리 주머니쥐는 모두 타고난 연기자야." - P75

"그런데 왜 연기를 하는 거예요?" 로즈가 물었다.
"재미있잖아! 그리고 그게 살아남는 데 도움이 돼. 너도 봤잖아. 혹시 알아? 네 생존에도 도움이 될지." 로봇의 뇌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연기가 생존 전략이 될 수 있다니! 주머니쥐가 죽은 척 연기를 할 수 있다면, 로봇도 살아 있는 척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덜 기계적이고, 더 자연스럽게. 로즈가 친근하게 행동한다면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친구들은 로즈가 더 오래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정말 훌륭한 계획이었다. - P78

"네, 새끼 기러기가 살아남길 바라요. 하지만 어떻게 엄마인 척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로즈가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새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쉴 곳을 마련해 주면 돼요.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거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되, 지나친 응석은 받아 주면 안 돼요. 걷고, 말하고, 헤엄치고, 날고, 다른 기러기들과 어울리고, 스스로를 돌보도록 가르치면 그게 바로 엄마인 거죠." 로즈는 그저 새끼 기러기를 내려다보았다. - P87

"안녕하세요? 저는 로즈예요. 그리고 이 아이는 브라이트빌이에요. 겁내지 마세요. 저는 아무도 헤치지 않아요." 로즈는 나무를 내밀었다.
"선물로 나무를 가지고 왔어요. 아름다운 댐을 짓는 데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난 괴물한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을······."
비버 씨가 말하는데, 비버 부인이 끼어들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저렇게 훌륭한 자작나무를 버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는 확고하다오." 비버 씨가 말했다.
비버 부인이 남편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무례하게 굴거나, 고집을 피울 때 말려 달라고 했던 거 기억하죠? 지금 당신이 딱 그래요!" - P92

"엄마, 안아 줘요!"
로즈는 브라이트빌을 안아 주었다. 로봇의 몸은 딱딱한 기계였지만, 그만큼 튼튼하고 안전했다. 새끼 기러기는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브라이트빌은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엄마의 품 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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