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을 만들면 뭘 하실 건가요?"
"고향에 다녀오려고요." 그이가 한참 침묵하더니 혼 잣말 같은 투로 다시 말했다. "그래요, 고향에."
그이를 보니 어쩐지 어머니가 생각났다.
나는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그림 몇 점이 있는 피나코테카 미술관에 가고 싶었다. 전날 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직전에 나는 어린 시절에 알게 된 흥분, 내가 침대에서 자고 있어도 바다는 여전히 거기 있고 밤새도록 거기 있을 것이며 내가 잠에서 깨어날 아침에도 내내 거기 있으리라는 걸 전율하는 확신으로 알게 됐을 때의 흥분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불 꺼진 피나코테카 전시실에 있는 그 그림들을 상상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른 아침 광장에, 내가 시에나에 오기를 고대하던 시간에 거의 맞먹는, 사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집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여성 옆에 앉아 있으니, 아직은 그 그림들을 만나러 가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 P68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도시가 깨어나 분주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사람을 멀찍이서 따라다녀 보기도 했다. 이 이상하고 남부끄러운 행동을 나는 현지인들이 시에나를 누비는 방법을 알아보고 그들의 일상을 일별하려는 거라고, 말하자면 현지인들을 따라 살아 보려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진실은 더 간단하고, 정신적이라기보다는 육체적이며, 개념보다는 리듬과 더 관계가 깊다. 나는 그저 거친 석판에 대고 끌을 가는 채석공처럼 이 도시에 대고 나 자신을 벼리고 싶었다. - P69

내 나침반은 이 도시에만, 이 도시의 꼬불꼬불한 길과 모퉁이, 이 도시의 책략과 결정, 이 도시의 취향과 의도에만 이끌려야 했다. 시에나는 내 나침반의 북극성이었다. 그리고 세심하게 애쓰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통제 욕구를 가지게 되기 마련이듯, 내가 느끼기에 그날의 시에나는 나의 자유와 충성심을 염려하는 듯했다. 그처럼 결연하고 그처럼 의도가 충만하고 그처럼 나의 존재에 관심이 많은 곳은 일찍이 가 본 적이 없었다. 어느 길로 접어들든, 내 걸음의 속도와 방향은 시에나가 결정하는 듯했다. 그때 기분으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처럼 오랫동안 가고 싶어 했던 그 낯선 도시에서 평생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P70

문이 하나 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공동묘지였다. 작은 도시공원만 했다.
묘석 대부분에 망자의 초상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 […] 일부는 몇십 년 전에 세상을 떴고, 몇몇은 백 년도 전에 별세했지만, 아직도 후손들이 들여다보고 있음이 명백한 것이, 무덤들이 세심하게 관리된 데다, 가져다 놓은 싱싱한 꽃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묘석에 새겨진 여성들의 얼굴이 낯익었다. 어릴 때 보던 여성들과 똑같이 근심 어린 얼굴들이었고, 그건 앞서 두오모(대성당) 광장에서 만난 나이지리아 여성의 얼굴이기도 했다. 걱정하는 얼굴, 전망을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시에나 여성들은 사진이 찍힐 때 자신을 포착한 그 이미지가 자신보다 오래 살리라고 이미 짐작했던 것만 같다. 그들은 지친 듯이 마지못해 시키는 대로 카메라를 쳐다본다. 나는 그 사진들에 깊이 감동했고, 그 때문에 좀 놀랐다. - P75

끝까지 가면 탁 트인 교외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잘하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경계까지 걸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내가 있던 곳은 공동묘지에서도 비좁은 옛 묘역이었다. 이제 눈 아래로 드넓은 묘역들이 펼쳐졌다. 일개 대대 수준의 묘석들이 층층 이 이어졌다. 규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한 무덤을 깊이 생각하는 것과 끝을 모르는 죽음의 식욕을 일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망자들의 숫자가 산 자들을 압도한다. 현재란 검은 천 가장자리에 두른 금색 테두리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도한가. 그런 생각이 우리 종족에 대한 더없는 열광과 음울한 자긍심과 함께 밀려왔다. 생이 계속될 수 없다는 증거, 어떤 갑옷을 두르든 예외 없이 모든 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대면하고도, 우리는 얼마나 용감하고 영웅적인가. - P76

문득 등 뒤에 누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돌아섰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바깥을 향해 놓인 벤치가 보였다. 벤치에는 오후의 마지막 햇살이 감돌았고, 은밀하면서도 탁 트여 사방으로 열린 시골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는 흔치 않은 이점이 있었다. 경계하기에 좋은 자리로군, 나는 생각했다. 숨기에 좋은 곳, 울기에 좋은 곳. 나는 벤치에 앉아 그 벤치가 절대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했다.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벤치가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말이다. - P77

이탈리아어 강좌에 등록했다. 책과 책 사이에 주어지는 이 맹렬하고 우울한 자유로 고통받는 머리에는 뭐라도 배우려고 매달리는 편이 나을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 세번째 수업 중간쯤에 새로운 단어들이 연달아 들이닥치자 나는 쩔쩔매다가 거의 뛰쳐나갈 뻔했다. 벽에 부닥친 느낌이었다. 그러나 고비는 지나갔다. […]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로, 왜 이 경험이 이처럼 불편한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정오가 되어 풀려났다. 아마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경험이 우리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때, 배가 고프다거나 춥다거나 그냥 당황스럽다는 의사를 전달할 수단이 없었던 때를 상기시키고, 우리 안에 그 곤혹스러움의 흔적이 남아 의사를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적마다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건 열한 살 나이에 모국어인 아랍어를 두고 영어로 옮겨 가야 했던 나의 특정한 경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이동을 한 번 하고 나면 뒤에 오는 여하한 분열도 치명적인 위험을 뜻하게 될 수 있다. - P78

이곳의 많은 것이 익숙했다.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방식, 공공연한 애정 표현, 엮어서 말린 고추, 어릴 때 리비아에서 먹던 것과 똑같은 회향 씨앗이 든 비스킷, 돈을 다루는 신중함, 집과 음식에 대한 자부심, 일부 우아하고 친절한 여성 들의 정중한 태도, 일부 잘난 체하는 젊은 남자들의 자신만만함, 일부 나이 든 이들의 결연한 우아함, 일부 중년 남성들이 나를 보는 방식과 우리가 인식과 상호 이해의 시선을 교환하는 방식, 점심 식사 뒤의 시간, 소리와 침묵과 침묵의 소리, 모든 것의 표면에 새겨진 성, 취약성, 뺨들이 붉어지는 방식, 내게 신문을 판 여성과 빵집 주인과 식료품점 주인이 장 본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고는 하나같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슨 요리를 할 셈인지, 어떻게 요리할 작정인지를 묻고 자기 의견을 보태 주고 싶어 했다는 사실. - P82

잠시 후에 묘지로 들어서면서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 가족이 보였다. 부부와 딸이었다. 다들 허리를 굽혀 묘석을 닦고 주변 꽃들에 물을 주면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딸은 열두 살쯤 되어 보였다. 나는 아이가 부모에게 품은 고요한 애정 같은 걸 알아차렸다. 아이의 태도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제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제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어서 기뻐요.‘ 순식간에 간파한 것들이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왠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내 눈을 단속해야 할 듯했다. 잠시 앉아서 새소리를 들으려고 눈에 띄지 않게 계곡을 훤히 볼 수 있는 비밀 벤치 쪽으로 향하면서 그 가족이 묘지 없는 애도자인 나를 보지 못했기를 빌었다. 그제야 나는 시에나에 그림을 보러 온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홀로 애도하러, 새로운 지형을 살피며 여기서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알아내러 온 것이었다. - P92

눈이 어둠에 익지 않아서 그가 어디로 가는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높은 천장 가장 자리를 두른 장식용 나무 들보들이 보일 만해지자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고, 이내 제 오빠를 쫓아 햇빛 가득한 안마당을 뛰어다니는 살마가 보였다. 동생보다 한 살 정도 많은 듯한 카림이 움켜잡으려는 동생의 손을 능란하게 피했다. 동생이 가까이 올 때마다 아이는 몹시 즐거워했다. 아이는 낄낄낄 웃었는데, 나는 그게 그 아이 특유의, 제 안의 기쁨이 불에 부채질이라도 하는 듯이, 온화하면서도 불꽃이 튀는 듯한 소리가 빠르게 이어지는 그런 웃음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둘이 달려와 차례로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뛰어다니느라 상기된 얼굴들이 나를 다시 만나 기쁘다는 기색이었는데, 둘이 어린아이라 아직 사회적 겉치레 요령을 완전히 익히지 못했음을 고려하면,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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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찾아?" 그녀의 남편이 물었다.
"그 집이 폭파된 곳."
"그건 저쪽 길 아니야?"
"아냐, 그건··· 아, 여기다." 마지가 차를 세우며 말했다. 폭파사건이 있은 뒤로 새로 지은 집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마지가 FBI의 기록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다. 폭파사건이 있던 날 밤, 그녀의 아버지와 고모와 몰리가 스미스의 집에서 밤을 보낼 계획이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우보이의 귀가 심하게 아파와서 그들은 그냥 집에 있었다. "그래서 그 세 사람은 무사할 수 있었어요. 운명이죠." 마지가 말했다. 나는 한순간 멈칫한 뒤에야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평생 알고 있었어요." 마지가 말했다. - P360

역사는 무자비한 판관이다. 우리의 비극적인 실수와 멍청한 부주의를 낱낱이 드러내고, 우리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폭로하며, 처음부터 미스터리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는 오만한 탐정처럼 아는 척을 한다. 나는 역사기록들을 샅샅이 훑으면서, 몰리가 남편에게서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한 오세이지족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와 결혼한 사람이 돈을 노리고 내 가족을 죽일 거라고 의심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화이트가 로슨의 거짓 자백이나 후버의 못된 저의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 P361

버트는 자신이 오세이지족에게 사기를 치고 있음을 감추기 위해 괴상한 회계방법을 도입했다. 조지 빅하트가 사망한 뒤 유언 검인 청문회에서 한 변호사는 버트의 은행에서 오세이지족에게 대출되었다는 돈이 어째서 버트의 개인 수표로 발행되었는지 모르겠다며 당황스러운 심정을 표출했다. 버트는 자신이 "굳이 숨겨야 하는 거래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인신공격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버트 씨. 하지만 이것이 조금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일합니다." - P368

나는 여러 날 동안 문서보관소를 드나들며 빅하트의 살인사건에 경제적 동기가 얽혀 있는지 조사해봤다. 그의 죽음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유언 검인 기록도 살펴봤다. 마사는 내게 보낸 이메일에서 "우리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처럼 돈을 따라가면 돼요"라고 썼다. 하지만 헤일이든 버트든 아니면 다른 백인 남자든 빅하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는 증거가 없었다. 그의 재산은 빅하트의 아내와 어린 딸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빅하트의 딸에게 후견인이 있었으므로, 그 남자가 돈을 좌우했을 것이다. 나는 자료들을 훑어본 끝에 결국 그 후견인의 이름을 찾아냈다. H.G. 버트. - P370

하지만 버트가 빅하트와 보건의 살인사건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여전히 정황증거뿐이었다. 보건이 기차에서 내던져질 때 누가 그와 함께 있었는지도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옛날 신문들을 뒤지던 중 <포허스카 데일리 캐피털>에 실린 보건의 장례식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 중간쯤에 버트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보건과 함께 기차에 올랐으며, 보건이 자리에서 사라졌을 때도 기차 안에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신문의 또 다른 기사에 따르면, 보건이 사라졌다고 신고한 사람도 버트였다.
나는 포트워스의 문서보관소를 떠나기 전에, 수사국 정보원과의 면담 내용이 실린 서류철을 우연히 발견했다. 헤일과 가까운 사이였던 이 정보원은 다른 살인사건들에서 헤일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그는 보건의 살인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있습니다. 허브 버트가 그 일을 했을 겁니다." - P371

나는 또한 뉴멕시코의 어떤 도서관에서 페어팩 스 연방보안관과의 인터뷰 중 일부를 우연히 찾아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이 인터뷰의 주인공은 오세이지 살인사건들을 직접 수사한 사람이었다. 그는 버트가 보건의 살인사건과 관련되어 있으며, 신흥도시 중 한 곳의 시장(그 일대에서 활동하던 불량배)이 버트를 도와 보건을 기차 밖으로 던졌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한 1925년에 수사국이 오세이지 살인사건들을 수사 중일 때 버트가 겁에 질린 나머지 도주를 생각했다는 말도 했다. 실제로 버트는 그해에 갑자기 캔자스로 이주했다. 마사는 내 설명을 모두 들은 뒤 가만히 있다가 작게 흐느꼈다.
"죄송합니다." 내가 말했다.
"아뇨, 마음이 놓여서 그래요. 우리 집안사람들 마음에 아주 오랫 동안 걸려 있던 일이니까요." - P372

톰 화이트가 나타나 수사를 시작한 1925년에 수사국은 화이트혼 사건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버거 요원은 이것이 "별개의 사건"이라면서 조직적인 살인사건들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썼다. 이 사건은 오세이지 살인사건들에 대해 수사국이 세운 극적인 가설, 즉 이 모든 살인사건을 한 사람이 주도했으며, 헤일 일당을 체포하면 오세이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가설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헤일이 화이트혼 사건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바로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가 된다. 레드 콘의 할아버지가 수상쩍은 죽음을 맞이했듯이, 화이트혼의 살인사건과 그의 아내를 죽이려다 실패한 음모는 공포시대의 비밀스러운 이면을 보여준다. 사악한 헤일이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 - P385

루이스의 살인사건을 기록한 이 원고를 다 읽은 뒤 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석유가 매장된 땅에 대한 균등 수익권 때문에 1918년에 살해되었다는 것. 대부분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오세이지족의 공포시대는 헤일이 애나 브라운을 살해한 1921년 봄에 시작해서 헤일이 체포된 1926년 1월에 끝났다. 하지만 루이스의 살인사건은 석유의 수익금을 노린 살인사건이 그보다 적어도 3년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레드 콘의 할아버지가 1931년에 정말로 독살된 것이라면, 헤일이 체포된 뒤에도 살인이 계속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사건들은 석유 수익금을 노리고 오세이지족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 사람이 헤일뿐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헤일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잔혹하게 피해자들을 살해한 인물일 수는 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살인사 건들이 존재했다. 그 사건들은 공식적인 추정치에 포함되지도 않았으며, 몰리 버크하트의 살해된 가족들이나 루이스의 경우처럼 조사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중 일부는 아예 살인사건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다. - P392

나는 포트워스의 문서보관소를 다시 찾아가서 곰팡내가 나는 수 많은 상자와 서류철을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
그런데 한 상자에 천으로 된 표지가 너덜너덜한 일지가 들어 있었다. 인디언실이 공포시대 동안 후견인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자료였다. […]
나는 이 시기에 오세이지족의 후견인으로 활약한 다른 사람들도 찾아보았다. 한 후견인은 오세이지족 열한 명을 맡았는데, 그중 여 덟 명이 사망했다. 또 다른 후견인은 열세 명을 맡았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맡은 다섯 명의 피후 견인이 모두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기록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너무 엄청난 숫자라서, 자연스러운 사망률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이 죽음들은 대부분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죽음을 맞은 사람이 정확히 몇 명인지 파악하기가 불가능했다.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 P395

또 다른 오세이지족 피후견인인 흘루아토미는 공식적으로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서류들 속에 한 정보원이 연방검사에게 보낸 전신이 섞여 있었다. 흘루아토미의 후견인이 고의로 그녀의 치료를 막고, 그녀를 병원에 보내는 것도 거부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후견인은 "그녀가 그곳에 가야만 살 수 있으며, 그레이호스에 남아 있으면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정보원은 흘루아토미가 죽은 뒤 후견인이 스스로 그녀의 재산관리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 P397

수사국은 오세이지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스물네 명으로 추정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음이 분명하다. 수사국은 헤일 일당을 잡은 뒤 수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수사국 내에서도 적어도 일부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살인사건들이 조직적으로 은폐되어 알려 지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 오세이지 카운티의 여러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도 수상쩍은 죽음의 원인이 ‘소모성 질병‘이나 ‘원인불명‘으로 잘못 처리되는 일이 일상이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이 살인사건들을 파헤쳐본 학자들과 수사관들은 오세이지의 사망자 수가 설사 수백 명 단위는 아니더라도 수십 명 단위는 된다고 보고 있다.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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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알아······ 만약 내가 없었다면, 그 아이들 모두 거기에 있을 수 없었다는 걸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고. 나는 좋은 경찰이니까. 엄청 많은 걸 해결할 수 있어서 좋은 경찰이라는 게 아니야. 난 그렇진 못하거든. 내가 좋은 경찰인 건 어느 한쪽을 완전히 편들어주기 때문이지. 나는 어느 한쪽을 지지한다고. 올바른 쪽 편을 든다는 소리야. 내가 매사에 올바르진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올바른 쪽 편을 들긴 한다고. 아이들 편을 말이야. 너하고 반대편을. - P157

아니, 난······ 네 이야기도 몇 개는 아주 괜찮아. 몇 개는 아주 마음에 들어.

어떤 거요?

‘필로우맨‘에는 뭔가 마음에 남는 게 있었어. 뭔가 다정하다고나 할까. (사이) 그리고 만약에 아이가 죽는다면, 혼자서 말이야, 교통사고 같은 걸로, 그래도 아이가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이렇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아이 곁에 있어 주고, 손도 잡아 주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어쩐지 그건 아이의 선택이었다는 생각도 들어. 그게 어쩐지, 안심이 되기도 해. 아주 형편없는 쓰레기는 아니었어.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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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사람들이 모든 걸 망쳐 버릴 거야. 그 사람들이 우리를 없애 버릴 거야, 그 사람들이 내 이야기들을 없애 버릴 거야. 그 사람들이 모든 걸 망쳐 버릴 거야. - P106

왜 결말을 행복하게 하지 않았어? 현실에서처럼 말이야.

현실에선 행복한 결말이 없어. - P115

형이 죽었을 때 손에 뭘 쥐고 있었지? 이야기였어. 내가 쓴 그 어떤 이야기들보다 훌륭한 이야기. 봐봐, ‘작가와 작가의 형제‘에서······ 형은 작가였어. 나는 작가의 형제였고. 그 이야기는 형한테 행복한 결말이었어.

하지만 난 죽었잖아.

죽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뭘 남기느냐가 중요한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지금 당장 그 사람들이 날 죽이든 말든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죽이는 건 안 돼. 내 이야기를 죽이는 건 안 돼. 나한텐 내 이야기들이 전부야. - P117

어떤 이야기를 살려 줄까? 내가 쓴 4백 개 중에서, 어떤 이야기들의 목숨을 살려 줄래?

어, ‘작은 초록 돼지‘ 이야기. 그건 착한 이야기야. 그건 아무도 누굴 살인하게 만들지 않을 거야, 지 — 인 — 짜······ 그리고······ 그리고······ 사실 그게 전부인 것 같아. ‘작은 초록 돼지‘ 이야기. - P119

형이 실행에 옮기려고 고른 이야기 세 편이 하필이면 실행으로 옮기기에 가장 혐오스러운 이야기라는 사실만 아니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 세 편의 이야기는 형이 우연히 먼저 접한 이야기가 아니었어. 형의 역겹고 비열한 마음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던 거지. - P120

아기 돼지는, 그 돼지는 자기가 초록색인 게 정말 좋았어. 평범한 돼지들의 색깔이 싫은 건 아니었고, 분홍색도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아기 돼지가 좋아한 건 자기가 다른 돼지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 약간 특이하다는 거였어. 하지만 주위의 다른 돼지들은 초록색인 아기 돼지를 좋아하지 않았어. 돼지들은 초록 돼지를 시기하고 괴롭혔고 초록 돼지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어······.

비참하게······. - P124

그래서 작은 초록 돼지는 말했어. ( 돼지 목소리로 )‘오 하느님, 제발 부탁드려요, 이 사람들이 저를 다른 돼지들처럼 만들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요. 저는 조금 특이한 존재로 있는 게 행복해요.‘

‘저는 조금 특이한 존재로 있는 게 행복해요.‘ 돼지가 하느님에게 말해. - P125

저는 모든 걸 솔직하게 자백했습니다. 제가 약속한 대로요. 그래서 형사님들이 제 이야기들을 전부 제 사건 파일과 함께 보관하고, 제가 죽은 뒤 50년이 지날 때까지 개봉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형사님들이 약속하신 대로요. - P152

저는 형사님을 믿을 수 있어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모릅니다. 형사님에겐 그런 뭔가가 있어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 P155

난 증오를 느끼면서 잠에서 깨. 증오가 날 깨워. 증오가 날 버스에 태워서 직장에 데려다 줘. 증오가 나한테 속삭여. ‘그 새끼들 절대 못 빠져나가.‘ 난 출근을 일찍 해. 서류들은 깔끔하게 철해져 있는지, 전기 장치는 제대로 작동하는지 전부 확인해야 하거든. 그래야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니까.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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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리안. 나는 씨발 전체주의 독재 국가의 고위직 경찰 간부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말을 믿는 건데? - P46

하지만······ 저는 형사님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제가 아동 살해를 소재로 하는 이야기를 쓰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현실 세계에서 아동 살해 사건이 일어나니까? - P50

처음 악몽이 시작된 날은 소년의 일곱 번째 생일날 밤이었습니다. 소년의 옆방은 늘 빗장과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지만, 소년은 결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의문을 품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릴로 구멍을 뚫을 때처럼 낮게 윙윙 거리는 소리, 볼트를 조이는 것 같은 끼익끽 긁는 소리, 뭔지 모를 전기 장치가 둔탁하게 쉭쉭거리는 소리, 입에 재갈이 물린 작은 아이의 숨죽인 비명 소리가 두터운 벽돌 벽 사이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마다요. 매일매일 길고 절망적인 밤을 뜬눈으로 보내고 나면, 소년은 ( 어머니에게, 소년의 목소리로 ) ‘어젯밤 그 소리들은 다 무슨 소리였어요, 엄마?‘ ( 보통 목소리로 ) 하고 물었고, 그러면 어머니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 우리 아가, 그 소리는 아주 멋진 네 상상력이 네게 심하게 장난을 친 거란다.

( 소년의 목소리로 ) 아. 저 같은 꼬마들은 모두 밤마다 그런 끔찍한 소리를 듣는 건가요? - P63

곧이어 그들은 이사를 했고, 악몽 같은 소리들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이야기들은 여전히 기이하고 비틀린 동시에 훌륭했으며, 소년은 자신에게 기괴한 경험을 선사해 준 부모에게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몇 년 뒤, 그의 첫 번째 책이 출판되던 날, 그는 이사한 후 처음으로 어릴 때 살던 집을 다시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침실을 서성거렸습니다. 장난감과 그림 들이 모두 여전히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옆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먼지 앉은 낡은 드릴들과 자물쇠들, 전기선이 여전히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미친 짓이었는지 떠올리며 미소를 짓다가, 이내 미소를 잃었습니다. 무언가가 언뜻 눈에 들어왔는데······ - P66

잠깐 생각 좀 할게. 잠깐 생각 좀······

넌 생각하는 걸 좋아해, 그치?

우리 왜 이렇게 멍청한 거지? 왜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는 거야?

왜?

이건 꼭 스토리텔링 같은 거야. - P83

우리가 아는 건, 어떤 남자가 방으로 들어와서 다른 남자한테 ‘너네 어머니가 죽었다‘라고 말했다는 게 전부라고. 우리가 아는 건 그게 전부란 말이야. 스토리텔링의 첫 번째 법칙,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다.‘ - P84

이런 세상에. ‘전체주의 국가에 사는 어떤 작가가 심문을 받는다. 그가 쓴 짧은 이야기들에 담긴 섬뜩한 내용이 그가 사는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 건의 아동 살해 사건 정황과 유사하다는 이유에서다. 몇 건의 아동 살해 사건은······ 사실상 아예 일어난 적이 없다.‘ 지금 펜이 있다면 좋을 텐데. 이번 일로 괜찮은 이야기 한 편을 쓸 수도 있겠어. 우리가 한 시간 안에 사형당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든, 마이클, 뭘 하든, 절대로 서명하면 안 돼. 그 사람들이 형한테 무슨 짓을 하든, 절대로 서명하지 마. 내 말 알겠어? - P85

그래, 필로우맨은 이렇게 생겨야 했어, 부드럽고 안전해 보여야 했지, 그가 하는 일 때문에 말이야. 그가 하는 일은 아주 슬프고 아주 어려운 일이었거든······. - P90

필로우맨이 하는 일은 아주 아주 슬픈 일이었어. 왜냐하면 필로우맨이 하는 일은 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거였거든.
그 아이가 나중에 겪을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피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냥 놔둬봤자 어차피 결국엔 같은 상황에 놓일 거였지. […] 필로우맨은 항상 비극적인 사고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자살할 수 있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제안해 줬어. - P91

필로우맨은 누굴 죽인 적이 없어, 마이클. 그리고 죽은 아이들은 모두 어차피 끔찍한 삶을 살 예정이었어.

네 말이 맞아. 모든 어린이는 끔찍한 삶을 살게 될 거야. 그 아이들을 골치 아픈 상황에서 구하는 편이 나아.

모든 어린이가 끔찍한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니야.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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