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이 뒤에 올라탔고, 소년들은 비로소 953번 지방 도로로 나섰다. 앙토니는 커브를 돌며 한쪽 다리를 쭉 뻗은 다음 앞으로 나가면서 속력을 냈다. 속도가 높아지자 눈물이 찔끔 나오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젊고, 사고를 낼 깜냥조차 없는 두 소년은 열기가 식은 도로 위를 헬멧도 없이 세차게 달렸다. 어느 순간 사촌이 속도 좀 줄이자고 말했다. - P60

앙토니는 혼자가 되었다. 스테파니와 친구는 여전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앙토니는 초조함을 감추려 새 맥주 캔을 땄다. 다섯 캔째였고 이미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마침 오줌이 마려웠고, 화장실을 찾느니 차라리 수영장으로 내려가 호젓한 구석을 찾아보기로 했다. 저 위에는 달빛이 환했다. 앙토니는 비교적 기분이 좋고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내일 그리고 몇 주 동안은 아직 방학이었다. 앙토니는 가슴 가득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결국 삶은 그다지 나쁠 게 없었다. - P64

더 이상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뻘쭘해진 앙토니가 잇새로 침을 뱉었다. 소녀들이 자기들끼리 뭔가 눈짓을 주고받자 앙토니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윽고 소녀들은 앙토니를 내버려 두고 테라스로 돌아가 버렸다. 소년은 멀어지는 소녀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좁은 어깨, 청바지에 가려진 엉덩이, 새처럼 가느다란 발목, 어딘지 오만한 움직임을 따라 유연하게 흔들리는 포니테일. 마리화나 기운이 조금씩 퍼지면서 불쾌감, 현기증,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조금 전의 흥분 대신 앙토니의 몸을 엄습했다. - P65

노동자들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산업화가 해제되어 버린 도시마다, 가난한 마을마다, 이렇다 할 꿈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이면 누구나 시애틀 출신의 그룹 너바나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들었다. 머리를 제멋대로 기른 이 그룹은 일렁이는 마음을 분노로, 우울을 데시벨로 바꿔 주었다. 낙원은 완전히 사라졌고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이제 남은 일은 온몸으로 힘껏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 P79

집 안에 들어가 보니 1층에선 끼리끼리 모여 여전히 나지 막하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머리칼이 젖은 채, 얼마나 소리를 질러 댔는지 거친 목소리로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폭신한 비치 타월을 몸에 둘둘 만 여자애들은 남자 친구에게 몸을 바싹 기댔다. 공기 속에 수영장 락스 냄새가 떠다녔다. 이제 새벽이 올 테고, 앙토니는 이어질 슬픔, 그를 기다리는 창백하고 괴로운 아침을 생각해 보았다. 엄마에게 된통 야단맞을 일만 남았다. - P80

청소년기에서 벗어난 이들은 대부분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거나 카글라스 또는 전자 제품 전문점 다르티 같은 데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했다. 기차역 근처에 케밥 가게를 새로 열었다는 사미가 지나가자, 아이들은 장사가 잘되는지 물었다. 낯빛이 썩 나쁘지는 않았으나, 아이들 모두 지난 번 도산 이후 강박적으로 그를 따라다니는 고민의 실체를 짐작 못 하는 바 아니었다. 한때 이 동네에서 제일 잘나가던 약 도매 상이었으나 이제는 낡은 푸조 205를 끌고 다녔다. 머쓱해진 소년들이 나중에 한번 들르겠다고 한마디씩 거들자, 사미는 올랭 피크 드 마르세유 유니폼 셔츠 아래로 삐져나온 뱃살과 두 명의 아이와 채무를 이끌고 다시 케밥 가게로 떠났다. 그러고 나자 수영장에 갔던 조무래기들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했다. 희미한 농지거리가 오고갔지만, 다들 회전목마가 문 여는 시간을 기다릴 뿐 대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종종 한낮의 열기와 권태가 알코올 효과처럼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와 주먹다짐조차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면 치명타 같은 고요가 다시 내려앉았다. - P93

오후 3시가 좀 넘어가면서 시간은 밀가루 반죽처럼 한없이 늘어졌다. 매일이 똑같았다. 오후의 빈 구멍 사이로 산만한 무력감이 신시가지 전체를 장악했다. 집집마다 창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이들 소리도 TV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시가지 한복판에 우뚝 선 타워들도 오후의 열기가 만들어 낸 안개 같은 적막 속에서 비틀거리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이따금 세발자전거를 연습하는 꼬마 여자아이가 정적의 모퉁이를 도려냈다. 소년들은 눈을 끔벅끔벅하다가, 야구 모자에 얼룩을 남기며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쳤다. 그 안에서 아이들의 신경질이 푹푹 익어 갔다. 다들 반수면 상태였고, 뭔가를 증오했으며, 혀끝으로 담배의 신맛을 느꼈다. 여기 말고 다른 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 같은 데 일자리를 얻으면 짱일 텐데. 아니면 바다도 좋고. - P95

놀이동산에 전기 차단기가 내려지고, 마지막 손님들도 어둠 속에서 하나 둘 흩어졌다. 매표소의 두 모녀도 소년들에게 잘 가라고 손짓하며 이동식 금고를 들고 떠났다. 고층 아파트들이 일렬로 푸른빛을 뿌렸고, 신시가지의 시간이 밤 속으로 흩어졌다. 남은 건 형체 없는 사람들 무리와 모서리, 불 켜진 창, 여전한 권태뿐이었다. - P107

탐욕스러운 공장의 몸체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버텼다. 선택의 기로에서 공장은 출퇴근길과 노동자들에게 쌓인 피로를 쥐어짜 연명했으며, 물건들이 일단 부려졌다가 무게 단위로 팔려 나간 다음에는 이 도시에 잔인한 출혈만 남긴 운송망들이 공장을 먹여 살렸다. 유령 도시처럼 변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이곳은 벽을 창백하게 뒤덮은 항의 문구, 산탄이 곰보처럼 박힌 표지판의 기억에 의지하며 잡초에게 먹힌 자갈처럼 살아갔다. - P139

클레망아데르 거리에 막 접어들 무렵부터 앙토니는 기분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불안이 다시 엄습하면서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억압, 유년, 치러야 할 대가고 뭐고 전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순간순간 기분이 너무 나쁜 나머지, 이런저런 생각이 화살처럼 빠르게 머릿 속을 통과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 균형 잡힌 머릿속과 몸에 잘 맞는 옷, 자가용까지 두루 갖춘 사람들이 잘도 등장하건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앙토니는 자책감이 들었다. 학교에선 꼴찌에 뚜벅이 신세, 여자 친구 하나 없고 별일 없이 지내는 일 조차 서툴기 짝이 없는 신세가 미워졌다. - P155

한 모금 빨았을 뿐인데 앙토니의 입안이 건조하고 텁텁해졌다. 스테파니에게 권한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고 곧 후회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무래도 그녀에게 키스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체념에 사로잡혔다. 스테파니의 팔찌, 흠잡을 데 없는 머릿결, 부드러운 피부를 곁눈질하며 앙토니는 그녀가 속한 굳게 닫힌 멋쟁이들의 세상을 그려 보았다. 여름 별장, 가족사진, 덱 체어, 벚나무 아래에 자리 잡은 덩치 큰 개 등 언젠가 치과 대기실에서 훑어본 잡지 속의 ‘클린‘ 하고 ‘해피‘한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혼란스러우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부러워졌다. 스테파니는 앙토니가 가질 수 없는 여자였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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