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류 사회의 그와 같은 지리적 차이점을 연구하는 이유는 어느 한 사회 형태를 다른 것들 보다 우위에 놓고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고자 함이다. - P21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그곳에서 최소한 4만 년 이상 살면서도 금속을 사용하 지 못하는 수렵 채집민 부족으로 남아 있었다. 반면 백인 이주민들이 똑같은 대륙에서 금속기와 식량 생산을 기반으로 문자를 이용하고 산업화 되고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적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까지는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고부터 1세기밖에 안 걸렸다. 이것은 인류의 발전에 대한 두 차례의 연속적인 실험으로, 주어진 환경은 동일했으며 다만 유일한 변수는 그 환경을 차지한 민족들뿐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사회와 유럽인 사회의 차이는 바로 두 민족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는가?
그와 같은 인종주의적 설명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자면, 그것은 단순히 역겨울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기술적 차이에 병행하는 지능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 P22

기자들은 저자에게 한 권의 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 그와 같은 문장을 만들자면 다음과 같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 P32

문화적 요인들이 그렇게 많은 것은 실제로 기술의 세계적 경향을 이해하는 일을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쉽게 해준다.식량 생산으로 인하여 농경민들은 식량이 남아돌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농경민 사회는 식량을 생산하지 않고 기술에만 전념하는 전업 기능 전문가들을 뒷받침해줄 수 있었다. - P39

나로서는 이제 독자 여러분이 역사란 결코 어느 냉소주의자가 말했던 것처럼 ‘지겨운 사실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역사에는 광범위한 경향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을 설명하려는 탐구 과정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생산적이기도 하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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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하는 동안 벅트라우트 씨는 곤혹스러운 문제를 떠안은 나이 든 친구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레이디 슬레인의 한탄을 아주 의아하게 여기리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레이디 슬레인이 세상의 보편적가치에 동의하지 않음을 그저 사실로서 받아들였고, 따라서 연신 세속의 가치를 강요받아야 하는 친구의 고충을 자연스 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레이디 슬레인이 어렸을 때 어떤 꿈을 꾸었는지, 실제로 살아온 삶과 얼마나 다른 꿈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여러모로 단순한 성격인 벅트라우트 씨였지만 –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약간 미쳤다고 생각했다. – 그에게는 그만의 명료하고 편견 없는 지혜가 있었다. 그는 규범 을 개인의 삶에 맞춰야지, 개인의 삶을 기성의 규범에 욱여넣기란 흔하기는 해도 부조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꿈을 포기해야 했던 레이디 슬레인은 몸이 마비된 운동선수만큼 안타까웠다. 분명 일반적인 관점은 아니었지만, 버트라우트 씨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P196

그녀는 세상사에 초연한 노인으로서 이런 사소한 사건들을 저 먼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곱씹었고, 그러자 그녀가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이 덩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참 피곤하고, 단편적이고, 고루하고, 허무하지." 그녀는 지팡이와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혼잣말을 했고, 그 와중에 인생의 막바지에서 굳이 셰익스피어 말고 다른 것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 지 고민했다. 아니, 그렇게 치면 인생의 초반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어는 생명력과 성숙함을 모두 이해하는 작가였으니까.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심오한 통찰은 나이 든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 P200

그녀가 보기에 즐거움이란 전적으로 사적인 행위이자 은밀한 농담이었고, 가드니아 꽃잎처럼 화려하고 향긋하지만 멍들기 쉬웠다. - P202

레이디 슬레인은 담담하지만 철학적인 제누의 인생사를 들으며 마음이 동했다. 그간 제누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이토록 긴 세월 동안 제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다니! 그러나 제누의 다부진 가슴 속에는 풍부한 경험이 깃들어 있었다. 짚단을 깔고 자다가 두들겨 맞던 푸아티에 농장에서 휘황찬란한 총독 관저와 근사한 저택으로 오게 되었으니, 극적인 변화였을 것이다…… 제누의 인생에 비하면 증손주들의 인생은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레이디 슬레인의 인생도 얄팍한 데다 과도하게 다듬어져 있었으므로, 진정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듯 느껴졌다. 이루지 못한 꿈에 남몰래 애태운 그녀였지만, 새로 묻은 무덤에 몸을 던진 언니를 일으켜 세운 경험은 없었다. 가만히 서서 덤덤히 과거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제누를 바라보며, 레이디 슬레인은 자문했다. 현실이 찢어 놓은 너덜너덜한 자상, 그리고 상상이 남긴 깊지만 보이지 않는 멍 중에 어떤 것이 더 치명적일까? - P205

지금 느끼는 기쁨은 특히나 사적이었다. 예전처럼 또렷하지는 않았다. 또렷하기보다는 뿌옇고, 강렬하지만 막연했다. 그래서 그 정체를 밝혀낼 능력도,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이 그저 흠뻑 취할 뿐이었다. 어둠이 짙어지는 인생의 황혼기, 빛이 저물어 가는 노년기에서 돌연 요동치는 청년기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강가의 갈대처럼 흔들렸고, 바다 위의 작은 배처럼 저 멀리 나아가다가도 어귀의 잔잔한 물결 속으로 자꾸 밀려 들었다. 젊음! 젊음!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죽음에 이토록 가까이 다가선 지금, 그녀는 또다시 자기 앞에 위험한 모험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번에는 더 용감하게 직면하겠다고,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더 굳세고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다짐했다. - P213

그녀가 보기에 할아버지와 전 약혼자에게 재산과 귀족 작위는 1야드, 2야드, 100야드, 아니 1마일만큼 크고 중요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1인치, 어쩌면 0.5인치만큼 작고 보잘것없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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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다니 정말 희한했다. 죽기 전에 이런 막간의 즐거움을 맛보다니, 평생 살아온 삶에서 – 맡아 온 일에서, 자식들에게서, 헨리 에게서 – 멀찍이 물러선 끝에 이토록 흡족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새로운 생활을 얻다니! 이 같은 변화를 초래한 장본인은 레이디 슬레인 자신이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해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어쩌면,"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결국에는 자기가 원하던 것을 얻는 것이 인생인지도 몰라." 그러고는 오래된 책 하나를 꺼내서 아무 페이지나 펴고 읽기 시작 했다.

맹세하지 말라, 거창하게 장담하지 말라, 자만하지 말라, 과시하지 말라, 증오하지 말라, 모독하지 말라, 악행하지 말라, 질투하지 말라, 분노하지 말라, 음탕한 짓을 하지 말라, 사기 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혀를 놀려 험담하지 말라.

레이디 슬레인이 유념해 온 덕목들을 벌써 – 누군가가 그녀는 날짜를 확인했다. – 무려 1493년에 정리해 두었다니, 분명 굉장한 일이었다.
그녀는 다음 연도 읽었다.

피상적인 허위를 피하라, 혹독하게 휘발하는 혹취이므로.
포식자의 환심을 피하라, 희번지르르하므로.
버스러질 호감정을 피하라, 허황한 환담이므로.
패배자들의 폭력을 피하라, 편견이 흔하므로.
흥분한 폭군을 피하라, 표독함으로써 행복하므로.
허수아비의 허위를, 호의적인 환상을 피하라.
허무맹랑한 해찰을 피하라, 편녕하는 허구이므로. - P155

이토록 기이하고 무례하고 바보 같은 사랑 고백은 레이디 슬레인의 마음에 연쇄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남편을 향한 충심을 거슬렀고 노년의 평화를 방해했다. 유년의 혼란을 되살렸다. 그녀는 작은 충격을 느꼈고, 동시에 그것보다 큰 기쁨을 느꼈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제 그녀의 인생은 무수한 회고와 단 하나의 바람으로 채워지고 있었으니까. 피츠조지 씨는 마치 무엇을 느껴야 할지 이미 정해 놓은 그녀의 삶을 뒤흔들어 놓겠다는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의도를 품고 침입한 듯했다. - P164

케이를 좋아하시나요?" 레이디 슬레인이 물었다.
"좋아하냐고요?" 피츠조지 씨는 놀라서 되물었다. "글쎄요. 난 케이가 익숙하지요. 맞아요, 좋아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서로를 잘 이해하니 공연히 귀찮게 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서로 익숙한 사이입니다. 이쯤 해 두지요. 우리 나이에는 익숙한 것 말고 다 성가신 법이니까." - P171

과거의 나날은 세월이라는 장막을 드리우고 바라보아도 그녀의 약해진 시력에는 지나치게 밝았지만. - P172

케이는 우물쭈물 창가로 가서 피츠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비교했다. 두 사람은 실로 다른 삶을 살았다. 피츠는 세상을 비웃었고, 자기만의 비밀스럽고 사적인 삶을 살았으며, 내면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아무한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껏 케이는 그가 화내는 모습을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웬 신문에서 런던의 괴짜들에 관한 기사를 냈을 때였다. "세상에!" 그가 말했다. "사생활을 지키며 산다고 괴짜라니?" 그는 자기 이름이 포함되었음을 발견하고 분노했다. 사람들이 흔히 타인에게 표하는 호기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천박하고 지루하고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피츠는 사람들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바랄 뿐 세상사에 전연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선택한 세상에 침잠해서 자신의 소장품과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살고 싶어 했다. 그것이 그만의 종교였고 사색이었다. 그러니 그의 외로운 죽음을 동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선택한 삶과 완전히 부합했으니까. - P179

"가장 작은 행성도," 벅트라우트 씨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태양 주위를 공전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좋든 싫든 부와 지위와 소유물에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나는 피츠조지 씨가 현명한 줄 알았어요. 벅트라우트 씨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 나요?" 레이디 슬레인이 절박하게 공감을 구했다. "나는 마침내 그런 것들에서 탈출했다고 생각했다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츠조지 씨가 다시 그 속으로 날 밀어 넣었어요. 어쩌면 좋지요, 버트라우트 씨? 난 어떡해야 하나요? 피츠조지 씨는 아주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했으리라 믿어요. 그렇지만 난 그런 것에는 깜깜하다고요. 난 항상 인간의 작품보다 신의 작품을 더 좋아했어요. 신의 작품은 백만장자든 빈털터리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열려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작품은 백만장자만 누릴 수 있지 요.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든 못 하든 훗날 값을 치를 백만장자는 전혀 개의치 않아요. 물론 피츠조지 씨가 값을 따지면서 고가의 예술품만 모았다는 소리는 아니지요. 예술가로서 아름다움을 감정했어요. 게다가 구두쇠였잖아요. 시장 가치에 맞게 값을 치르기는커녕 훨씬 싼값을 내야 즐거워했다고요. 그러면서 인간의 작품이 아닌 신의 작품을 손에 넣은 양 느꼈을 테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려나요."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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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녀는 데버라 리였다. 데버라 홀랜드도, 데버라 슬레인도 아닌 데버라 리. 늙은 여인은 눈을 감았다.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 편이 나았다. 호숫가를 거니는 여자아이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 늙은 여인의 시선은 유년기 전체를 관통했다. 사실 떨어지는 꽃잎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촉촉하고, 흔들거리고, 청순하고, 열정적이고 넉넉하지만 수줍은 충동에 부풀어 오른 것. 새끼 토끼처럼 겁이 많고, 나무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암사슴처럼 날쌔고 은밀하며, 대기를 무대로 삼은 댄서처럼 발이 가볍고, 다마스크 장미처럼 연하고 향긋하며, 분수처럼 웃음이 가득한 것. 그래, 그것이 젊음이었다. 낯선 집 앞을 서성이는 아이처럼 두려워하면서도, 가슴에 창을 맞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시기. - P109

그녀는 흘러간 야망의 여정을 따라 갈 작정이었다. 탄생의 비밀부터 시작해서 그것이 몸 안에 안착하여 성장하고, 피처럼 흐르다가 갖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들어 꺾이게 될 마지막 순간까지 전부 더듬어 볼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그 야망의 정체를 똑바로 인식했다. 이를테면 그녀 삶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현실적인 것, 다른 여자들이 현실적이라고 여길 만한 것은 많고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현실에 머무를 수 없었고, 최대한 오래, 그 초월적 현실에 매달려야 했다. 초월적 현실은 아주 견고했으며, 한때 그것이 인생을 지탱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점만으로도 커다란 행복이었다. 그녀는 떠들기만 하지 않고,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초월적 현실은 강한 사랑만이 발휘할 수 있는, 깊숙이 파고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기억 속을 더듬어 꺼낸 연애담처럼 희미하고 싸늘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과 같은 희열감에, 전과 같은 고양감 에 새삼 활활 타올랐다. 그런 황홀감 속에서 산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얼마나 근사하고, 어렵고, 또 지극히 가치 있는 삶인가! 그녀는 수습 수녀보다 훨씬 정신이 또랑또랑했다. 그녀는 팽팽하게 조인 철사처럼 손짓 한 번에도 파르르 떨었다. 갓 태어나서 조금도 힘을 잃지 않은 어린 신처럼 자신만만했다. 그녀 마음속에선 이미지가 뭉클거렸는데, 저마다 모두 지극히 서정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부적합했으리라. 주홍색 망토, 검 같은 것은 그런 뜨거운 열정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호화롭지도, 순수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신에게 맹세코, 지금 그녀 몸속을 흐르는 젊음의 피를 위해서라면 살아 볼 가치가 있었다! 예술가, 창조자의 삶. 자세히 관찰하고 거침없이 느끼는 삶. 한 번의 눈길만으로 광활한 전경과 세세한 부분을 전부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삶. 그녀는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그림자의 원물보다 더 흥미로웠음을 기억 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이나 햇빛 속의 튤립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자기 머릿속의 패턴에 맞춰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애쓰던 순간도 기억했다. - P111

데버라는 여성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양이라고 여기는, 사치스러운 여성주의적 사고관을 탐닉하기에는 너무나 현명했다. 그녀가 보기에 자신의 본질과 운 명 사이의 간극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간극이 아니라 현실주의자와 몽상가 사이의 간극이었다. 데버라가 여성이고 헨리가 남성인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그녀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상황이 악화된 건 아니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뒤 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 P122

살아온 모든 나날들을 총합하면 그저 삶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평생의 삶에 대고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묻기는 부조리했다. 꼭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두고 던지는 질문 같았다. 아니, 불가해하고 다채로우며 변화무쌍한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언어로 위장한 질문 같았다. 삶을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말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치 호수의 물을 단단한 공으로 압축하는 일처럼. - P126

우리가 사는 이 삶은 호흡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죽음의 자아, 그것이 순례를 떠나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여행의 짤막한 첫 단계를 걷는다.
– 크리스티나 로세티 - P140

레이디 슬레인은 햄스테드 히스를 향해 느긋느긋 언덕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그래, 이제 그들은 평온한 삶에 안착했다. 이제 그녀와 제누는 고요하고 오붓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감사해하고 제누는 헌신하며, 또 속으로는 누가 먼저 떠나게 될지 추측하며, 그렇게 단단한 유대감 속에서 살고 있었다. 드물게 손님이 다녀가면, 그 뒤로 현관문을 굳게 닫을 때마다 두 사람 모두 방해꾼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지 잔잔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사실 그들의 기력으로 살 수 있는 삶이란 그런 삶뿐이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데에 진력이 났다. 물론 이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 P143

이제는 소소한 것들이 그녀의 삶을 구성했다. 제누와의 공감, 점점 쇠약해지는 몸을 향한 흥미, 화요일마다 예정된 예의 바른 벅트라우트 씨의 방문, 서리 내리는 아침에 햄스테드 히스에서 연 날리는 남자아이들을 구경하는 즐거움 같은 것들…... 나이 들어서 뼈가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만큼 꽁꽁 언 현관을 오르다가 미끄러질까 봐 걱정하는 일 역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사소한 것들, 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은 거대한 풍경, 즉 죽음의 풍경 위에서 고귀함을 획득했다. 이탈리아 회화 중에 투명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를 – 포플러와 버드나무와 오리나무였다. – 묘사하면서 나뭇잎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그 결까지 빈틈없이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그녀의 삶을 이루는 작은 것들은 바로 그런 그림 속의 나뭇잎 같았다. 찬란한 영원과 병치되며 심오한 가치를 얻은 것이다.
마침내 뻔하고 초라하고 힘겨운 삶은 끝났으며 이제 궁극의 모험만이 남았다는 사실, 지금까지의 모든 모험은 이 궁극의 모험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녀를 짜릿하게 했다.
그러나 인생이란 최후의 순간까지 경이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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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살아오면서 저 때문에 마음 상한 사람이 아주 많지만, 저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인생은 순식간이에요, 레이디 슬레인. 그래서 사람은 한없이 과거로 날아가는 현재의 꽁무니라도 잡아야 하는 법이지요. 어제나 내일을 생각하는데 몰두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어제는 영영 갔고, 내일은 물음표뿐이니까요. 장담합니다, 심지어 오늘조차 위태롭지요. - P93

그들과의 관계가 선사하는 위안과 해방감은 참으로 기묘했다! 노년기의 피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소망이 이루어진 듯한 벅찬 기분 때문이었을까? 그러니까 모든 결정과 책임을 타인에게 맡길 수 있는 어린 시절로, 세상은 따뜻하고 상냥한 곳이라고 굳게 믿으며 마음껏 꿈을 꾸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라서?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평온과 사색을 위해 살리라고, 분투하고 계획에 얽매이고 애써야 하는 삶은 거부하리라고. 그런 삶은 거짓이었다. 그래! 거짓이고 말고, 하고 외치며 레이디 슬레인은 한 손으로 주먹을 부르쥐고 반대쪽 손바닥을 때렸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기력이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저 세상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아예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자신에게 열의가 부족하다고 시인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색을 통해서는 (그리고 오래전에 선택했다가 단념하고 말았던 어떤 애호를 통해서는) 결과와 업적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그녀의 자식들보다 진정한 행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P100

여자의 마음속은 적막했다,
거리의 소음과 군중에도 개의치 않고.
손에 서두름이 없었으며
발에도 서두름은 없었다.
– 크리스티나 로세티 - P104

늦여름의 햇살 아래, 햄스테드 집의 남쪽 벽을 따라 늘어선 잘 익은 복숭아 밑에서, 그녀는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앉아 헨리와 약혼했던 날을 떠올렸다. 이제는 날이면 날마다 여유가 넘쳐서 방금 지나온 산책길을 뒤돌아보듯 자신의 삶을 곱씹을 수 있었다. 마침내 삶의 기억은 외떨어진 밭뙈기들이나 파편화된 사건들이 아닌, 거대한 풍경이자 하나의 완전체가 되어서 밀려왔다. - P105

그때 헨리가 백조 이야기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술수였다는 듯 다른 주제로 넘어갔고, 어느 틈엔가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긴장한 듯, 자기가 긴장했음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듯 몸을 앞으로 굽힌 채 그녀의 드레스 한쪽을 만졌다. 꼭 두 사람을 하나로 엮으려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헨리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연결 고리가 끊긴 듯했고, 손을 뻗어서 헨리 볼 위의 곱슬곱슬한 구레나룻을 만져 보고 싶은 욕망마저 전부 사라져 버렸다. 반드시 진중한 목소리로 전해야 했던 말들, 그 무거운 의미가 어조에 오롯이 실려야 했던 말들. 마음속 어느 진지하고 비밀스러운 곳에서 만들어 낸 듯한, 마음의 우물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끌어 올린 듯한 말들. 버겁고 성숙한 영역에 속한 말들. 그런 말들이 번개같이 그녀와 헨리의 유대를 끊어 버렸다. 독수리가 두 발로 헨리를 낚아채서 하늘로 날아갔더라도 이보다는 빠르지 않았으리라. 헨리는 사라졌다. 그녀를 두고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열심히 헨리의 얼굴을 응시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이미 그가 멀리 멀리 사라졌음을 알았다. - P106

그런데 자기 자신이란 정확히 누구였을까? 그녀는 과거의 스스로를 돌아보는 늙은 여자로서 자문했다. 이러한 궁금증은 아주 편안하고 아련한 심심풀이였지만 결코 멜랑콜리는 아니었다. 차라리 최후의 사치, 궁극적인 사치였다. 한평생 누리고 싶었던 사치였다. 이제야 죽음을 유예한 채 이 사치를 만 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당장 해야 할 일이 없었으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 아니, 결혼하고 처음으로 –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따라서 죽음에 등을 기대고 삶을 곱씹을 수 있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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