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밀항선을 타려고 먼 길을 걸었던 어머니. 어머니는 어린 여동생을 등에 업고 남동생의 손을 이끌며 경찰의 삼엄한 검문을 빠져나가기 위해 집 근처를 산책하는 척했다. 짐도 음식도 없이 맨손으로 출발해서 애월부터 조천항까지 30킬로미터를 꼬박 걸어 새벽에 밀항선을 탔다. 일본에 도착한 후 항구에서 경찰에 포위되긴 했으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오사카까지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 사진이 다 무어겠는가. - P156
도쿄에 있던 나의 마음속에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서 뻔뻔한 구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미 오륙 년 전부터 제주4.3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증언을 조금씩 촬영하면서 어떻게 영화로 만들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그 일에 대해 말해야만 데뷔작인 〈디어 평양〉을 겨우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주도에 뿌리를 둔 부모님이 한국을 부정하고 북한을 지지하며 살아온, 논리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거기 있을지 모른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 P166
가족이란 혈연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히 믿게 되었다.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기능하는 관계성이 있어야 집합체가 비로소 가족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기억을 공유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비록 당사자는 될 수 없지만, 타인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윤곽 정도는 알고 싶다는 겸손한 노력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건과 사실을, 감정과 감상을,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상상과 망상까지도. - P175
1972년 초 도쿄의 조선대학교 문학부에 다니던 건오 오빠는 ‘김일성 주석님의 환갑에 바치는 청년 축하단‘의 일원으로 선정되어 편도 표를 들고 북조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본인의 희망 여부에 관계없이 대학(조직)에서 선발되어 북조선 이주를 강요 당하는 터무니없는 프로젝트였다. […] 조직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면 김일성을 향한 충성심이 흐려진 증거라고 비난받았다. 조총련 오사카 본부의 중진이던 아버지의 입장을 염려한 건오 오빠는 자신이 거부하면 아버지가 곤란해질 것을 우려해서 ‘인간 선물‘의 일원으로 북에 건너갈 결심을 했다. 어머니는 출발 일정에 맞추기 위해 무아지경으로 짐을 쌌다. 후일담이지만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당시 부모님에게 ‘아들을 모두 바쳐 충성심의 모범을 보여라‘고 다그친 조총련 중앙 간부는, 자기 자식은 귀국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 P181
기억을 잃어가던 어머니가 김일성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잔혹하고 순수하고 활기차고 사랑스럽고 가엾고 성숙한 소녀 같았다. 인간의 불가사의한 면모가 응축된 이 장면은 〈수프와 이데올로기〉 118분 중에도 가장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떠올릴 때마다 숨이 답답해질 정도다. 살아가다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픈 상황들을 조우한다. 그 순간을 카메라가 포착할 때 기적 같은 장면이 탄생하고, 그 작품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잔인한 이야기다. - P194
어떻게든 초상화를 치우는 장면을 넣고 싶었다. 넣어야 했다. 나 자신과의 결별로서, 새롭게 걸어나가기 위한 생의 마디로서. 낡 은 시대에 고하는 결별이자 가족과의 결별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는 이제 끝냅시다!‘ 하는 결별. 평양에 있는 가족이 걱정되지 않을 리가 있을까.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가족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에 가족이 있어서 아무 말 못 했던 시대를 끝내고 싶었다. 이제 충분하지 않나. - P198
오사카의 영화관에서 〈가족의 나라〉를 본 어머니는 "네 각오는 알겠다. 앞으로 딸이 하는 일에 말 보태지 않을 테니까 건강만 조심하고"라고 했다. 그 후 매달 인삼과 마늘을 듬뿍 넣은 닭 백숙을 만들어 도쿄로 보내주었다. 오사카 집에 더 이상 초상화는 없다. 알츠하이머로 귀국 사업‘이라는 말도 잊어버린 어머니다. 어머니는 나와 남편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함께 있다는, 당신의 삶일 수 없었던 시간을 살고 있었다. 점차 온화해진 어머니는 매일 그림책을 보면서 당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와 남편은 어머니의 어떤 이야기에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P199
"어릴 때 오빠들이랑 헤어져서 너도 외로웠겠다."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여섯 살 소녀한테서 오빠 셋을 빼앗는 건 학대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207
TV도 음악도 시끄럽다고 싫어했다. 거실 의자에 조용히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거나 콧노래를 불렀다. 카오루가 어머니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거나, 어머니가 그림책을 보며 그 자리에서 만든 이야기를 카오루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의자에 앉은 채 까무룩 잠이 들면 어머니 곁을 지키며 다다미에 앉아 있던 카오루도 잠을 잤다. 마치 옛날부터 어머니와 카오루와 나, 세 식구가 함께 살아온 듯한 착각에 빠질 만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P208
기도는 어머니의 일상이 되었다. 손을 모으고 있을 때 어머니의 표정은 온화하고 상냥했다. 손을 모으는 움직임, 모은 손을 푸는 움직임, 그 모든 행동이 우아했다. 기도란 무엇일까? 교회도 절도 신사도 가지 않고, 계속 자신이 사용하던 거실 의자에 앉아 손을 모으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때까지 내 안에 있던 ‘기도‘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렸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형식에 구애받지도 않는, 근원적인 ‘기도‘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해온 모든 행위가 기도였던 것이 아닐까. 남편을 바라보고, 아이들을 안아주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깨우고 꾸짖고 칭찬하는 그 모든 것이 기도였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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