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죽고 싶음과 살고 싶지 않음을 구분해야 하는 세계. 미라 A는 자신이 죽은 게 아니라 비활성의 삶으로 전환된 것뿐이라고 말 했다. 부러워서 나도 손과 발에 붕대를 감아보았다. 미라 C가 언짢다는 듯 말했다.
화상이라도 입은 것 같아.
미라는 밀랍의 옛말이기도 하다면서요?
넌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이구나. 산 인간들은 밤낮 헛소리 아니면 딴소리지. - P41

그를 떠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차피 편히 디딜 곳 없는 이 땅도 하지만 미래가 남는다. 나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살 수 있을까. 미래로 향하는 의문문을 멈출 수 없다. 비활성의 삶을 욕 망하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막막함 옆으로 긴 선을 긋는 일이자, 살 수 있을까‘ 하는 절망에 꼬리를 다는 일이다. 미래를 떠나야만 얻을 수 있는 비활성이라면 포기해야 한다. 내가 없는 어딘가로 가는 걸 포기한 것처럼. - P42

늙어버린 약속이 말한다. 종일 유실물처럼 앉아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상상을 해요. 나는 멀리 가고 싶다고 하는 대신 그렇게 대꾸한다. 자신도 모르는 말을 무책임하게 허공으로 던져서는 안 돼. 약속이 나무란다. 유실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넌 짐작조차 못할 텐데. 내가 대꾸가 없자 늙은 약속이 말투를 누그러뜨린다. 다독인다.
"그래도 애써봐. 괜찮은 인간은 애써보는 인간이야."
애쓰고 있다. 나도 모르는 걸 내가 쓰면서 나를 따라가는 일, 나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걸음걸음에. 멀리 가고 싶다. 약속이 갓 태어난 마음처럼 발그레한 세계로. - P47

"엄마, 아 쫌!"은 전 세계 딸들의 공통어가 아닐까.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 썼다. 엄마, 밥 많아. 하지 말아요. 하지 마시라니깐. 쌀은 왜 꺼내요. 엄마, 아 쫌! 못 이긴다. 기어코 밥을 해서 냉동실에 쌓으면서 엄마가 그런다. 다음에 와서 검사할 거야, 다 먹었나. 웃음이 터진다. 나를 낳은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만 내가 자라길 바라는 것 같다. 나는 죽을 때까지 엄마한텐 애지? 나 죽을 때까지 아님 너 죽을 때까지? 핵심은 애냐 아니냐 거든요. 나 죽고 너 죽고 나서도 애지. 죽음도 이기는 연이고 밥이니 세긴 세다. "아 쫌!" 해봤자. - P54

타인이 내게 궁금해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내게 궁금해하고 대답하며 산다. 그 문답이 쌓여서 나의 감각과 태도가 될 것이다. 내가 나의 타인이다. 그렇다, 라고 다짐하면 어쩐지 당장 무엇과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늘 다행스레 혼자다. 혼자일 때만 나는 수월하게 사람인 것 같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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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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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엄마의 사랑하고 미워하는 들끓는 관계를, 그들이 살아온 과정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이 우리 주위에 몇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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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래가 없이 산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나쁜 짓거리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 나는 엇나간 충동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스르르 삭아버리는 걸 보았다. 울컥하는 분노가 그보다 한 수 이성적인 이해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쩨쩨한 집착은 알아서 힘을 잃고 모종의 감정적 정의에 승리를 내어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고, 이 모든 것을 보는 일이 즐거웠다. 그러다가 미래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의 무익함을 알게 되는 날이 오기도 한다. 울타리를 두른 정원 안에서의 삶은 사실 번듯하게 꾸며놓은 감옥 안마당에서의 삶과 다르지 않다. - P267

일어나서 일기를 썼다. "사랑이란 수동적인 감정이 이끄는 기능이며 만족스러운 확신보다는 이상에 의지한다. 사랑이란 우리가 태어났을 때의 원초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반면 일이란 적극적이고 표현적인 삶의 기능이며 아무런 결과를 내지 않는다 해도 행동하는 자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은 여전히 남는다. 상상했던 삶에 대한 접근을 부정당할 때 사람은 더 크고 깊게 사랑을 추구할 수 있다." - P272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선 일기와 책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일하는 장소의 질서정연함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엄마는 사랑이라는 신전을 숭배했지만 평생 돌려받은 건 권태였어. 사랑이 준 건 죽은 경품이었어. - P273

"진짜 야비하다."
"뭐?" 그가 소리쳤다. "뭐가 야비하기까지 해? 난 그저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야. 같이 뉴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당신이 미리 알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이게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이야? 우리 정말 근사한 시간 보냈잖아. 안 그래?"
"나를 속이고 이용한 거지. 미리 말해줬어야 하는 걸 일부러 숨겼잖아. 내가 아는 것보다 우리가 잘 지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혼자 결정해버린 거잖아. 당신한테는 나보다 상황이 더 중요했던 거지."
"그렇지 않아." 그가 말했다. - P277

우선, 성애 자체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욕망은 다정함을 보장한다. 다정함은 위험을 저지한다. 위험에서 빠져나오면 자유롭게 나 자신을 포기한, 비밀스러운 삶 속으로 기꺼이 들어갈 수가 있다. 침대에서 꼭 내가 나일 필요는 없다. 나를 잃어버릴 수 있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안전할 수 있다. 잃어버린 나에게서 빠져나오면, 거기엔 조가 있다. 나를 꼭 붙들고 있는 조가 자기만의 활력에서 새로 태어나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에게 더없는 신뢰가 간다. - P286

나는 나 자신이 될 필요가 없었다. 조와 함께 있으면서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의 매혹을 느꼈다. 얼마나 가뿐하고 매력적인 안심인가. 나는 평생 스스로 충분히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충분히 특별하지도, 충분히 재능 있지도 않아서 사랑이든 우정이든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의 관심을 붙들어놓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매력적일 수 있고 인생에 사람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분명 그렇게 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내 곁에 오래 머물게 할 수 있을까?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 점을 확신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성적인 끌림이 긴장과 불안을 수습했다. 하루 단위로 관심이나 존중을 애써 얻어내야 할 것 같은 의무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거래는 성사되었다. 나는 이 안에서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결혼의 강력한 이점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반드시 온전한 한 사람과 온전한 한 사람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반쪽만으로도 결혼 생활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 좀 열어놓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결혼이 반드시 위험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 P287

그날 저녁 내내 슬프고 고요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줄곧 엄마에게 내려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엄마는 무척 어여쁘게 보인다. 결이 고운 흰머리, 보드라운 피부, 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처럼 보이는 주름지고 지친 노인의 얼굴. 하지만 지난 세월은 엄마를 엄마만의 세계로 끌고 가고 눈에는 다시 그 혼란이 찾아온다. 엄마를 놓아주지 않는 저 끈질긴 삶이라는 혼란.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듯해 그 고통을 감히 느낄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렇네" 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
엄마의 부드러운 얼굴이 결심이라도 선 듯 확고하고 단단해진다. 나를 보더니 강철 같은 목소리로, 이디시어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른다. - P300

항상 엄마와 함께 걸었지만 요즘은 전처럼 자주 걷지 않는다. 전처럼 싸우지도 않는다. 항상 하던 것들도 더는 하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의 ‘항상‘은 없다. 정해져 있던 패턴이 서서히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이 어그러짐의 과정 속에 나름의 즐거움도 있고 놀라움도 있다. 이제는 그 놀라움이 우리에게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더 이상 변화에 기댈 수 없는 우리는 오직 놀라움에만 기댄다. 그렇다고 항상 놀라움에 기댈 수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긴장하게 하니까. - P301

"그때 왜 일하기로 한 거야? 아니 내 말은 다른 때가 아니라 왜 하필 그 시기에?"
"무슨 소리니, 난 늘 일하고 싶었다. 주머니에 내 돈 들어 있는 기분이 얼마나 끝내주는데! 그때 전쟁 중이었잖아. 이력서만 내면 일곱 군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 거부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아침에 구인 광고 보고 옷 갈아입고 지하철 타고 시내 나가서 지원했지. 10분 만에 바로 나와서 일하라고 그러더라. 그 회사 이름이 뭐였더라? 까먹었네."
"앤젤리카 유니폼 회사." 나는 바로 대답했다.
"기억하는구나!" 엄마는 반색하면서 나를 향해 웃는다.
"이거 봐라. 우리 딸은 다 기억해. 나는 잊어버려도. 우리 딸 기억력 진짜 좋아."
"나는 엄마의 인생 저장소야, 알잖아" - P304

엄마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내가 입을 연다. "만약 지금이라면 말이야. 아빠가 일하러 가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야?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엄마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엄마는 여든이다. 눈은 흐려졌고 머리는 하얗게 셌다. 몸은 마르고 허약하다. 엄마는 차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더니 조곤조곤 말한다. "뭐라고 하긴. 지옥으로 꺼지라고 했겠지."
진정 놀라운 순간. - P306

"이제 그만 넣어." 주전자에 커피를 한 스푼씩 넣는데 엄마가 말한다.
"아니야. 더 넣어야 돼." 내가 대답한다.
"내 말 들어. 얘가 왜 이래!"
"엄마가 직접 와서 보셔. 여기 눈금에 이만큼 넣으라고 나와 있지?"
엄마는 본다. 명백한 반증 앞에서 할 말이 없다. 주전자에 아직 커피를 충분히 넣지 않았다. 엄마는 돌아서서 손을 허공에 휘젓는, 아니꼬워 죽겠다는, 내가 익히 아는 그 몸짓을 또 한다.
"그래 맘대로 하든지" 나 하는 짓이 어찌나 마음에 안 드는지 목소리까지 떨린다. 엄마의 오만. 엄마의 경멸. 엄마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기질. 절대적으로 엄마 곁에 머물러 있을 것들. 언어의 상징이요 존재의 숙어로 이것들이야말로 엄마의 자아를 완성한다고 믿는다. 타인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건 불쾌한 일에서 헤어나는 엄마만의 방식, 당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방법, 옳고 그름을 아는 법, 당신의 주장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 순간 엄마의 삶이 이해되면서 묵직한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 P308

엄마 얼굴에서 분노와 자기연민이 가시는 걸 보면 나한테 있던 분노와 자기연민도 증발해버린다. 한참 서로를 꼬챙이로 찔러대다가 엄마가 이렇게 말할 때도 있다. "이게 네 복이다. 너도 더 좋은 엄마 밑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세상천지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오랜만에 맞는 말 하셨네. 우리는 동시에 웃기 시작한다. 누가 됐든 우리 둘 다 악의적인 말은 피차 한 문장 이상 내뱉지 않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내 생각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만 골몰하는 대신 더도 덜도 말고 딱 1분이라도 그저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을 정도로 그 긴긴 세월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우리 두 사람 다 감격하는 듯하다. - P310

이 안정적인 관계는 언제 휘발될지 모른다. 어쩌면 끊임없는 변화, 유동적인 상태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맞닥뜨리는 진실이 아닐까 한다. 이 불안정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요 인생의 신비와 약속을 관통하는 진리가 아닐까. 엄마와 나는 더 이상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있지 않는다. 드디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영구적으로 성취되었다. 나는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흡족하게 엿본다. 약간의 공간이 나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일용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 - P311

인생은 어렵다. 영광이 있고 고초가 있다. 생각은 멋들어진 동료요 흥분이다. 한편 외로움은 나를 끝없이 갉아먹으려 한다. 이 노력과 자기연민 사이의 조화가 유지될 때는 나 자신이 그 짝 없는 여자들 The Odd Women중에 한 명이 되었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나 역시 평등과 여성 인권이 신장돼온 이 200년 넘는 노력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의지에 기운을 받는 당찬 여자다. 그러다 조화를 잃어버릴 때면 사랑도 연대도 없이, 실패와 박탈감에 산 채로 매장당한 기분에 빠진다. 우정은 불완전하고, 고민은 나를 잠식하며, 일은 내 무능력의 총체적 결과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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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어느 지점까지만 사랑했다. 그 지점을 넘어가면 내 안에서 무언가 불투명해졌고 그에게 줄 게 없어졌다. 나에겐 그 불투명한 막이 보였다. 입으로 맛볼 수 있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었다. 스테판을 향한 내 감정과 나 사이에, 아니 어떤 남자가 됐건 그와 나 사이에, 확신할 수 없는 일종의 투명 막이 드리워져 있고 나는 그 막으로 ‘사랑해‘라고 속삭일 수도 그 말이 들리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말이 느껴지게 할 수는 없었다. - P239

그 시절 사람들은 나 같은 여자들을 신여성, 해방된 여성, 별난 여자라고 불렀다(개인적으로는 별난 여자를 선호했고 지금도 그렇다). 낮에 사무실에서 일할 때면 내가 생각해도 난 신여성에, 해방된 별난 여자가 맞았다. 그러다 밤이 오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면 엄마가 나보다 먼저 구체화시켜놓은 바로 그곳을 응시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 일어날 때가 안 됐어. 불행과 난 아직 끝난 게 아냐.‘ - P241

데이비는 내 남자 역사의 재현부(소나타 형식에서 제시부의 주제를 형태를 바꾸어 반복•강화하는 부분)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강하다고 생각하면 나는 어색해지고 모질어졌다. 그의 약한 면을 보면 나는 기꺼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단 하나 달랐던 건 데이비와 있을 때만은 처음으로 이 배치가 완벽해졌다는 점이다. 내가 어디에 구속되었는지를 보았고, 그것을 내보이면서 부끄러워했다. 드디어 눈이 환해져 나의 실체가 보일 때면 얼마나 화가 나고 두려웠던가! 그리고 데이비를 통해서 나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나는 데이비를 알았던 것이다. 그 내면의 핵심까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식성과 취향을 좋아했고 그의 두려움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비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알았고 그의 옆에 있으면 내가 어쩌다가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 P251

나는 책상에 앉아서 생각하려고 기를 쓰는 중이다. 이 행동을 이렇게 묘사하기를 좋아해서 몇 년 동안이나 말해왔다. "생각하려고 기를 쓰는 중이야." 엄마가 살려고 기를 쓴 것처럼. 엄마는 아침에 다리를 침대 옆으로 내려놓는 행위만으로도 금메달감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나도 그런 것 같다. 그냥 책상에 앉아 있을 뿐이면서 기를 쓴다고 말한다. - P256

상상해보라. 나는 이 순간에 완전히 몰입해서 살고 있고, 내일 아침에 분명 전화가 걸려 온다는 것만 빼곤 확언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 슬퍼하거나 눈물바람으로 지내거나 작은 일에 심장이 벌렁거리거나 화가 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재미만 있다. 분명 적응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세상 어느 누가 자기 인생과 진정 화해한단 말인가.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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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도 발끝을 들고 걷는다. 옛집은 지층이어서 내 걸음의 무게나 진동에 제약이 없었다. 대신 넓이와 높이가 몸을 옭아맸다. 제자리뛰기를 하면서, 나는 높이 갈 수 없겠구나. 멀리뛰기를 하면서는, 멀리도 못 가겠구나. 방은 매일 조금씩 좁아졌지만 나는 자유의 품이 줄어도 자유는 자유라고 믿었다. 어떤 믿음은 강한 체념인 줄 모르고. 체념을 몸에 칭칭 감고 터무니없이 믿고 또 믿고. - P21

밝을 때 잠이 들어 사위가 조용하고 깜깜한 시간에 눈을 뜨는 일이 두렵다. 그 상황은 내가 어찌해야 한다고 아직 배우지 못한 감정들을 배태한다. 내내 살기 귀찮고 싫었을 뿐이지 죽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저 상황에서는 간절히, 매번 그랬다. 그렇게 돌연 몸이 감정부화기가 되는 순간. 다행히 부화기를 끄는 법을 일찍 찾았다. 나는 손에 집중했다. 방안이 어둠과 침묵으로 꽉 차고 혼자일 때 손의 행방은 중요했다. 몸이 부엌으로 가도 손이 칼로 가지 않으면, 다리가 창문 위로 올라가도 손이 난간을 꽉 움켜쥐고 있으면 괜찮았다. 그게 어려울 때는 손과 손이 서로를 꽉 붙들도록 했다. 깍지를 끼고 손톱이 손등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힘을 줬다. 그렇게 서로를 꼭 쥔 두 손의 모양이 언제나 교차로에서 움찔움찔하는 심장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 P24

매일 낱말들이 나에게서 탈출한다. 적게는 몇 개가, 많게는 수십 개의 낱말들이. 그중 한둘만이 내게 잡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오늘 잡힌 건 단짝. 홑‘단‘에 한글 ‘짝‘이 손잡은 단어. ‘서로 뜻이 맞거나 매우 친하여 늘 함께 어울리는 사이. 또는 그러한 친구‘란 의미의 單짝은 태생부터 다른 두 단어의 조합으로 이질감, 불일치를 선천적 조건으로 갖고 있다. 單과 짝이 금방이라도 서로를 툭 치고 멀어질 것 같다. 발음할 때마다 자꾸 ‘혼자이면서 가끔 쌍을 이룬다‘라는 의미로 수정된다. - P25

다시 보니 單짝은 혼자가 문제인 사람과 쌍이 문제인 사람의 단합 같다. 두고 보니 삶의 문제가 대개 혼자이거나 쌍이어서 생긴다는 의미의 철학 개념어 같기도 하다. - P26

예상한 대로 엄마는 내게 병원에 함께 올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엄마가 보호자 없이 병원에 가는 건 싫다. 내가 싫어서 하는 일이다. 내 집에서 엄마 집까지 실려가며, 실려가는 일은 새삼 처지를 곱씹게 한다고 썼다. 연필을 쥐고 노트를 펼쳐서. 밤을 두려워하 면서 열렬히 사랑하는 나의 처지, 밤마다 숲을 거닐고 싶다고 남산을 보며 생각하는 나의 처지, 약을 한 움큼 먹고 엄마의 무릎 고름을 짜러가는 나의 처지, 매일 고양이의 꼬리에 매달리는 나의 처지, 눈을 뜨는 순간 머리 위로 하루가 주저앉아 짜부라지는 나의 처지를 이어서 쓰면서 누군가를 꼭꼭 씹어 사랑하고 싶어졌다. - P28

분명한 밤, 의심의 여지없이 까만 밤 꽃병의 물을 간다. 이 꽃의 이름이 뭐였더라. 캔자스 블루. 자잘한 보라색 꽃이 종이로 구깃구깃 접어놓은 것처럼 줄기에 꽂혀 있는데 잠시 손으로 꾹 눌러 생화임을 확인해볼까 망설이다가 마음이 순식간에 추락했다. 망설임이 추락을 부른 줄 알았다. ‘확인‘ 때문이었다. 생화의 반대는 조화이고 조화는 다른 재료를 가지고 인공적으로 만든 꽃을 의미하지만 살아 있는 것, 삶이야말로 가장 인공적인 게 아닌가 스산해서 내가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확인해서 뭘 우위에 두고 싶었던 건지 알 듯 모를 듯하여, 추락이다. 살아 있는 게 왜 모욕인 줄 모르냐고.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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