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에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그가 질문했다.
"행운을 기원하는 기도야 번영, 평화, 조화
"너는 믿어? "
"어떤 거? 행운?"
"아니,기도 말이야."
"글쎄. 그렇지만 내 기분을 좋게 해. 그 정도면 됐잖아?"
"응, 맞아." - P262

그때 우리의 행운의 물건이 떠오른 나는 어떻게 자라는지 보려고 찾았다. 작은 쳄브라 소나무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내가 옮겨 심었던 때처럼 앙상하고 휘어진 채였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나무도 벌써 일곱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소나무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평화나 조화를 불러오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끈기를 드러냈다. 삶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런 집착은 네팔에서는 미덕이 아닐지 모르지만 알프스에서는 그렇다. - P263

한번은 난데없이 그가 말했다. "저녁에 축사 앞에 앉아 있을 때 행복했지?"
그때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응 무척."
"7월이 되면 밤이 되어 평온이 찾아들던 것 기억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어. 그리고 내가 젖을 짜려고 일어났을 때는 아직도 어둠이 걷히지 않은 채였지. 둘은 아직 잠들어 있고 나는 마치 그 모든 것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내 가족이 내가 있어서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것 같았지."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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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일을 쉬어야 해? 왜 나만 병원에 있어야 해? 야 네 애가 저렇게 누워 있는데 너는 병원에 오는 게 그렇게 귀찮니?가 되기도 했다. 하루 종일 억누르고 있던 말들이었다. 원색 크레파스로 아무렇게나 북북 그어놓은 듯한 날것의 감정들, 지하철에서 흔히 보이는 광인들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초점 없는 혼잣말과 욕설이 은정의 입에서 방언처럼 줄줄 새어 나왔다. - P26

왜 유능한 여자는 식으로 절구 속에서 마늘처럼 빻아지고 마는 걸까? 다 큰 어른들이면서 왜 동료를 저런 식으로 모함하는 걸까? - P30

헤어 디자이너는 오랫동안 지현이 꿈꾸던 외길이었고,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았지만 혼자서 눈물나게 노력해 드디어 얻어낸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어느 순간부턴가 조금씩 자랑스럽지 않아졌다. 머리를 자르는 일, 단백질을 먹고 소화시켜 머리카락으로 바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그 일 자체에는 잘못이 없었다. 그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시술들이 갑자기 낯설고 이상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산업의 어디까지가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여성을 아름다움에 억지로 묶어 자유를 빼앗는 일일까. 지현은 구분할 수가 없었다. - P36

왜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함께 온 남자친구의 허락을 받아야 긴머리를 짧게 자를 수 있다고 생각하 는 것일까. 남자들은 대체로 안 된다고 했고, 그러면 여자들은 그냥 머리끝을 다듬거나 귀여워 보이는 파마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갔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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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갈래?" 나는 그에게 물었다. 농담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해본 말은 아니었다. 일이 끝난 것이 아쉬웠다. 그동안 누군가와 이렇게 잘 지내본 적이 없었다.
"아니야,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너는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고 나는 남아 있는 사람이야. 늘 그렇듯이, 그렇잖아?" - P201

내가 지켜야 했던 것은 혼자 지내는 능력이었다.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거처를 정해 마음 편히 지내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고독과의 관계는 항상 어렵기만 했다. 나는 고독과 친숙해지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 P233

호수는 움직이는 밤하늘이었다. 바람은 잔물결을 이쪽에서 저쪽 해안으로 밀어냈고, 까만 물 위의 물결을 따라 펼쳐진 별빛은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다가 갑작스레 방향을 바꾸곤 했다. 나는 그대로 멈춰서 그 그림 같은 광경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없을 때의 산의 삶을 체험한 것 같았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게 있었고 거기서 제법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이런 산이 나와 함께 있어준다면 외롭지 않을거라고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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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이라는 적금을 필요할 때 찾아 쓰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적립을 해뒀어야 했다. 은정은 그런 적립을 해둬야 한다는 생각도,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예측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식의 적립과 인출이 너무도 부자연스럽다고, 노골적인 이해관계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친분을 쌓는 사람들을 남몰래 폄하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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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안에 다른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방식대로 그 이야기를 알고 있던 것이다. 마치 한 권의 책에서 찢어낸 페이지들이 있고 그것을 순서에 상관없이 수천 번은 읽은 사람처럼, 나는 몇 년간 조각들을 수집했던 것이었다. 나는 사진을 보았고 대화를 들었다. 부모님과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어떤 주제가 갑자기 그들의 말문을 막히게 하고 다툼을 일으키는지 또 과거의 어떤 이름이 그들을 슬프게 하고 감동을 주는 위력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이야기의 모든 부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체를 하나로 조합해내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 P175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름은 마치 눈을 녹이듯 기억을 지워버리지만 빙하는 아득한 겨울의 눈이자 잊히지 않으려는 겨울의 기억이라고. 이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게 되었다. 한 명은 도시에서 20년을 같이 살았고 그 후 10년은 인연을 끊고 지냈던 낯선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산에서 보는 아버지였다. 언뜻 보았지만 더 깊이 알게 된 사람이었고, 내 뒤를 따라 산길을 걷던, 빙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두 번째 아버지는 내게 재건이 필요한 폐허를 남겼다. 그래서 나는 첫번째 아버지는 잊고 두 번째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 P184

"그러면 넌 뭘 하려고 태어났어?"
"산사람이 되려고."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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