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도 말했다. 마음을 두루 살펴려면 걸어야 한다고. 걷는 것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라고. 소요학파들은 늘 느리게 걸으면서 토론했고, 소설의 영감을 야간 산책에서 얻곤 하던 찰스 디킨스는 친구에게 "걷는 동안 머릿속으로 쓰면서 웃음을 터뜨리다가, 흐느끼다가, 또 흐느꼈다네" 라고 말했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은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이 책을 통해 나는 나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멋진 무기가 있음을 깨" 달았다고 했고, 헵타포드는 지구인들에게 "offer weapon" 이라고 했다. - P98

역시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밖에 없다.
앞으로도 퇴근길마다 뻗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안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 - P104

무례하거나 부적절하게 욕을 쓰는 사람은 나도 싫지만, 표현으로서의 욕까지 묶어서, 특히 여자가 욕하는 걸 두고 ‘천박하다‘ ‘저급하다‘고 말하는 일부 ‘고상한‘ 사람들을 향한 반감. 일단 사람을 놓고 등급을 따지는 식의 태도는 뭐가 됐든 별로다. 작은 부분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별로 다. ‘맞춤법이 사람의 품격을 좌우한다‘ 구두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다‘ 같은 말들도 그래서 싫어한다. 맞춤법 중요하지. 근데 그걸로 사람의 품격을 매긴다고? 맞춤법 잘 지키는 사람이 틀리는 사람에 비해 격이 높아? 정말? 그 잘난 구두 하나로 누구의 인생을 판단한단 말이야? 남의 구두를 보고 남의 인생을 판단하는 사람의 협소한 인생 정도는 판단할 수도 있겠다. 그런 점에서 내 눈에는 욕하는 여자에게 쏟아지는 곱지 않은 시선도 곱지 않았다. - P107

살면서 그런 축소와 확장의 갈림길에 몇 번이고 놓이다 보니, 축소가 꼭 확장의 반대말만은 아닌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되었다. 때로는 한 세계의 축소가 다른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확장이 돌발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축소해야 할 세계와 대비를 이뤄 확장해야 할 세계가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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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이는 형은에게, 나이 많은 사람들을 무조건 불신하는 버릇, 갑작스럽게 분노를 폭발시키며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에둘러 타일렀다. - P144

채이는 형은에게서 자신에게는 없는 민감한 마음을 보았고 어렵지만 그 마음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다. 형은은 채이를 보며 사람들의 실수를 눈감아주는 일을 조금씩 연습했다. 몇 달을 서로 외면하며 한차례 폭풍을 겪고 나니 그런 일이 가능해졌다. 채이는 그게 신기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려왔다. 경혜는 채이가 형은을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채이의 손을 놓아준 것이었다. - P144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채이는, 너도 내 얼굴 보자마자 화가 났어? 하고 물으려다 그만두곤 했다. 그날, 지하철역에서 오랜만에 형은의 얼굴을 보았을 때 채이 역시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화가 났으니까. 형은의 다름이 채이를 화나게 하고 미움을 솟구치게 했다. 체온이, 함께한 시간이, 열이 내렸는지 보려고 서로의 이마를 짚어보던 밤의 기억이 있어서 그들은 가까스로 영원히 헤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들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어렵고 어색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보고, 이름을 말하고, 자기소개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것들을 나눠 갖기 시작할 수 있을까, 채이는 생각했다. - P147

아무런 보상도, 보상을 받고 싶다는 마음도 없이 아직 가보지 못한 어떤 시간과 장소들을 그려보았고 사람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들은 젊었고,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꿈이 그들에게는 중요했다. - P148

여성주의라는 이 거대한 흐름에 동참해서, 자신도 그 안에 있다고, 우리는 적이 아니고 같은 편이라고,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여성은 여성에게 너무 쉽게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해요. 서로를 그렇게 적대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어요.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건 세연의 진심이기도 했다. 그런 단순한 생각에서 기획에 동의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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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은 진경을 동경하면서 남몰래 미워했다. 너는 정말이지 살만 빼면, 좀 꾸미고 다니기만 하면 인기가 많을 텐데. 남자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진경이 떠올랐다. 남자들에게 세연은 편하게 야구와 축구와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생긴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 똑똑하고 재미있어서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지만 ‘여자‘는 아니었다. 그 관계들은 동등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세연은 곰곰이 생각했다.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진경 같은 여자들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연 같은 여자 역시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들이 세연을 같은 인간으로 존중했다면 자신들의 섹스 경험을, 여자들에게 했던 악행을, 그렇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같은 여자로 세연이 느낀 모멸감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 P137

어른들은 어디서 울까.
경혜를 볼 때마다 채이는 생각하곤 했다. 쌤, 쌤은 언제 울어요? 어디 가서, 누구의 어깨에 기대서 울어? 그렇게 묻고 싶었다. 쌤은 나랑 밥을 먹으면 항상 계산도 혼자 하고, 말도 별로 하지 않고 다 들어주기만 하잖아. 쌤의 투정은 누가 받아줘요? 쌤 친구 많아? 많겠지. 하지만 그중에 나 같은 친구 있어요? 없으면 내 앞에서 좀 울어도 되는데. - P142

어른이면 그래야 하는 건가. 저렇게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아픈 티도 안 내야 하고, 고양이처럼 아무도 없는 데 가서 혼자 숨어 울어야 하는 건가. 나는 어른 돼도 그러기 싫은데.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투정 부리고 싶을 땐 투정도 부리고 싶은데. - P143

쌤의 그 곧은 어깨를, 늘 곧던 어깨에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던 힘을, 무게를, 채이는 자주 생각했다. - P143

모두들 채이에게 말했다. 힘내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버티기만 해달라고. 하지만 채이는 형은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고 싶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말을 던지고 가시가 가득한 껍질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어도 형은은 아직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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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그런 게 아니거든요? 저는 아이를 가질 생각도 전혀 없고요. 제 삶에는 남자가 오래전부터 아예 없고 앞으로도 아마 없을 건데요. 사실은 한달에 한 번 배란이 되고 생리를 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거든요, 저는. 적출한대도 아무 상관 없는데, 회복이 빠르다기에 빨리 일로 돌아가야 해서 하이푸 쪽을 선택한 건데요. 여자로서 삶이 망가진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세연은 정색하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 P75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삶이 반드시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욕조가 없는 욕실을 너에게 보여주는 것도, 괜찮아, 뭐가 부끄럽니? 나도 자취 할 때 그랬는걸, 하는 너의 대답을 듣는 것도 싫은 이런 마음을 진경이 너는 이해할 수 없을걸. 세연은 상상속에서 친구를 속물로 만들고 있는 자기 자신이 지극히 속물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불편함은 실재하는 것인데. - P79

세연은, ‘저는 여러분이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고 말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성공하겠다는 의지나 정상으로 올라가겠다는 야망 같은 것은 없었음을, 그저 어찌어찌 흘러오다 보니 이런 모양새로 살게 되었고 그것이 타인의 눈에는 성공‘ 혹은 ‘야망‘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그냥 ‘하지 않을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 어찌어찌 걸어온 길이었음을, 그리고 지금은 일이 많아서 즐겁기는 하지만 일 때문에 과호흡 증상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 P81

세연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이곳에는 도저히 답이 없으니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빨리 정리하고 정상으로 올라가 떠나겠다는 이 학생들을 지난 시대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일이 공정한지 혹은 유효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의 사고에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으며, 자신이 낡은 사람이라는 위기감, 이미 많이 뒤처졌고 이제는 있는 힘껏 지금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주관이 더더욱 흐트러졌다. - P87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흐름의 중심을 향해 헤엄쳐 갈 나이는 지났다. 뒤로 물러나 물결에 실려 간다. 퇴적된 지층의 일부가 되어. 별다른 기여를 할 수 없으니 목소리를 높여 지분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윤슬에게도 치열하던 시간이 있었고, 이제는 힘주어 살기보다는 영화처럼 삶을 볼 시간이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 P95

정말로 그런 이야기를 글로 쉽게 써낼 수 있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한 달 정도의 마감 기간 동안에 말이에요, 그렇다면 친구였던 그 많은 여자들이 왜 헤어질까요. 말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프고 복잡하니까 관계가 끝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 P100

하지만 어째서인가. 경혜는 자신이 쓴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내듯 되풀이해 읽어보았다. 이 글 어디에 그렇게 내가 많이 들어 있는가. 나는 채이의 부탁을 떠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를 썼는데, 이 분노에는 채이의 고통이 아니라 빨리 죄책감을 벗고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내가 더 많이 들어 있었던 건가? 써도 힘들어지고 안 써도 힘들어진다면, 나는 쓴다는 행위로 나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했던 건가? 이 안에 내가 살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을까?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교수들과 함께 침몰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행동을 해서 안전한 물으로 헤엄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 말이다…... 경혜는 점점 알 수가 없어졌다. - P105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왜 왕따를 당하는가? 이런 질문에는 ‘그런 이유 따위는 없다‘고 대답하는 게 옳다. 누군가를 따돌리는 인간들이 잘못이다. 그런 행위에 이유를 부여해 정당화해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당시 세연은 자신이 왜 그런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았고, 세연도 알고 있었다. - P128

평범한 곳에서 남들은 찾아내지 못하는 반짝이는 사유를 길어 올리는 능력이 진경에게는 있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언어를 배열하고, 사람들에게서 숨은 장점을 끄집어내고, 어떤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사람이라도 웃게 만드는 재능 또한 있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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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이 소곤대는 이야기들이 나는 무척 좋았다. 그제야 그가 과제로 제출했던 글들이 하나씩 떠 올랐다. 살아온 날들에 관해 본격적으로 자세히 쓴 적은 없지만 그의 글 사이사이에 문득문득 삐져나온 과거의 궤적들. IMF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고 빚이 많았고 돈은 늘 없었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허덕허덕 일상과 일상을 이어 붙여가며 살다 보니 어디쯤에 도착해 있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IMF 키드들의 이야기. - P83

나는 흥콩에서의 삶을 무척 좋아했기에, 그 삶은 지금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이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홍콩을 떠나온 내 결정이 치기 어린 선택이었으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엄습한 채로 냉장고의 문을 닫곤 했다. 세상에. 최고의 술친구 를 만났다고 그 미래를 닫아버렸다니. 인생이 냉장고도 아닌데 냉장고 문 닫듯이 그렇게. 미쳤어. 절레 절레 고개를 흔들며. - P89

멀어져 가는 트럭을 보면서 나도 눈물이 났던 건, 골드스타를 더 이상 못 본다는 서운함도 컸지만, 냉장고 앞에서 막연히 느끼곤 했던 그 시절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지 꽤나 오래되었다는 걸 갑자기 깨달아서였다. 그랬다. 나는 이곳에서 보내는 355일의 몇 년들에 전혀 후회가 없었다. 다시 그날 밤 그순간으로 돌아가도 나는 T를 따라왔을까? 앱솔루틀리,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한국에서 살면서 끔찍했던 몇몇 순간들을 그러모은대도, 앱솔루틀리. 어떤 술꾼들은 취기에서 술맛을 보듯이 어떤 사람은 치기에서 결단의 힘을 본다. 치기 어린 상태가 아니면 모험할 엄두를 못 내는 겁 많은 나 같은 사람이. - P89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 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그런 점에서 홍콩을 닫고 술친구를 열어젖힌 나의 선택은 내 생애 최고로 술꾼다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하니까. 가지 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 - P90

"음. 그럼 밖에서는 말고, 집에 가서 딱 1시까 지만 마시는 건 어때?"
"그, 그럴까?"
너무 반색한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볼쯤 다시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눈앞에 펼쳐졌 다. 장소만 술집에서 집으로 바뀌었을 뿐, 새벽 서너 시까지 신나서 술을 마시고는 울다시피 출근했다가 기다시피 퇴근해서 기절하는 우리의 많은 과거들과 미래들. 청춘과 눈물. 환희와 고통. 사랑과 규칙. 수 많은 가급적의 이면들과...망할 헵타포드어.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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