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그런 게 아니거든요? 저는 아이를 가질 생각도 전혀 없고요. 제 삶에는 남자가 오래전부터 아예 없고 앞으로도 아마 없을 건데요. 사실은 한달에 한 번 배란이 되고 생리를 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거든요, 저는. 적출한대도 아무 상관 없는데, 회복이 빠르다기에 빨리 일로 돌아가야 해서 하이푸 쪽을 선택한 건데요. 여자로서 삶이 망가진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세연은 정색하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 P75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삶이 반드시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욕조가 없는 욕실을 너에게 보여주는 것도, 괜찮아, 뭐가 부끄럽니? 나도 자취 할 때 그랬는걸, 하는 너의 대답을 듣는 것도 싫은 이런 마음을 진경이 너는 이해할 수 없을걸. 세연은 상상속에서 친구를 속물로 만들고 있는 자기 자신이 지극히 속물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불편함은 실재하는 것인데. - P79
세연은, ‘저는 여러분이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고 말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성공하겠다는 의지나 정상으로 올라가겠다는 야망 같은 것은 없었음을, 그저 어찌어찌 흘러오다 보니 이런 모양새로 살게 되었고 그것이 타인의 눈에는 성공‘ 혹은 ‘야망‘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그냥 ‘하지 않을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 어찌어찌 걸어온 길이었음을, 그리고 지금은 일이 많아서 즐겁기는 하지만 일 때문에 과호흡 증상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 P81
세연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이곳에는 도저히 답이 없으니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빨리 정리하고 정상으로 올라가 떠나겠다는 이 학생들을 지난 시대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일이 공정한지 혹은 유효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의 사고에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으며, 자신이 낡은 사람이라는 위기감, 이미 많이 뒤처졌고 이제는 있는 힘껏 지금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주관이 더더욱 흐트러졌다. - P87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흐름의 중심을 향해 헤엄쳐 갈 나이는 지났다. 뒤로 물러나 물결에 실려 간다. 퇴적된 지층의 일부가 되어. 별다른 기여를 할 수 없으니 목소리를 높여 지분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윤슬에게도 치열하던 시간이 있었고, 이제는 힘주어 살기보다는 영화처럼 삶을 볼 시간이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 P95
정말로 그런 이야기를 글로 쉽게 써낼 수 있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한 달 정도의 마감 기간 동안에 말이에요, 그렇다면 친구였던 그 많은 여자들이 왜 헤어질까요. 말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프고 복잡하니까 관계가 끝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 P100
하지만 어째서인가. 경혜는 자신이 쓴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내듯 되풀이해 읽어보았다. 이 글 어디에 그렇게 내가 많이 들어 있는가. 나는 채이의 부탁을 떠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를 썼는데, 이 분노에는 채이의 고통이 아니라 빨리 죄책감을 벗고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내가 더 많이 들어 있었던 건가? 써도 힘들어지고 안 써도 힘들어진다면, 나는 쓴다는 행위로 나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했던 건가? 이 안에 내가 살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을까?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교수들과 함께 침몰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행동을 해서 안전한 물으로 헤엄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 말이다…... 경혜는 점점 알 수가 없어졌다. - P105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왜 왕따를 당하는가? 이런 질문에는 ‘그런 이유 따위는 없다‘고 대답하는 게 옳다. 누군가를 따돌리는 인간들이 잘못이다. 그런 행위에 이유를 부여해 정당화해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당시 세연은 자신이 왜 그런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았고, 세연도 알고 있었다. - P128
평범한 곳에서 남들은 찾아내지 못하는 반짝이는 사유를 길어 올리는 능력이 진경에게는 있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언어를 배열하고, 사람들에게서 숨은 장점을 끄집어내고, 어떤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사람이라도 웃게 만드는 재능 또한 있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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