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쓸 만한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럴 때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조금 써 보겠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날 이 하루도 없다. 물론 내 경우 요즘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꽤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20대부터 그랬는데 요즘에 특히 더 심해졌다. ‘내가 오늘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 두세 번이나 한다. 그것이 꼭 공포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젊었을 때는 엄청난 공포심을 동반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어느 정도 즐겁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 대신 내가 죽을 때나 사후의 광경을 세세하게 공상하며 어렴풋이 그려 본다. - P21

50대 정도까지는 죽음에 대한 예감이 그 무엇보다 두려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 인생이 피곤해서 그런지, 언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일전에 도라노몬 병원에서 단층 사진을 찍었을 때 암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같이 있던 할멈이나 간호부는 새파랗게 질렸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의외였다. 길고 긴 인생이 이제 드디어 끝나는구나 하며 어느 정도 안도감이 들 정도였다. 섣불리 집착하는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이성에게 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리라 생각된다. 90세가 되어서도 보란 듯이 자식을 낳은 구하라 후사노스케와 같은 정력은 없고 이미 완전한 무능력자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간접적인 방법으로 변형된 성적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현재의 나는 그와 같은 성욕의 즐거움과 식욕의 즐거움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 P25

병마를 견딘다는 것이, 정상적인 성의 쾌락을 향유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까지 뒤틀리게 하는 것일까? - P36

일기를 쓴다는 것은 쓰는 것 자체에 흥미 가 있어서 쓰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시력이 무섭게 나빠져서 독서도 생각처럼 되지 않고 달리 시간을 보낼 방법도 없으니 시간 때우기 삼아 쓸 생각이다. 읽기 쉽게 붓으로 크게 쓴다. 다른 사람이 읽으면 안 되니까 탁상용 금고에 넣어 두었다. 금고가 벌써 다섯 개나 찼다. 조만간 태워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남겨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때때로 예전의 일기를 꺼내서 보면 이렇게 기억력이 나빠졌나 하고 놀란다. 1년 전의 일이 마치 새로운 일처럼 느껴져서 흥미진진하다. - P46

"나, 이 문을 잠근 적이 한 번도 없어. 샤워할 때도 항상 여기는 열어 놔요."
내 목욕 시간은 오후 9시 이후로 정해져 있다는 의미인지, 나를 신용한다는 것인지, 보고 싶으면 보여 드릴 테니 들어오라는 것인지, 늙은이의 존재 따위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P53

방금 전 발바닥의 감촉이 아직 입술에 남아 있어서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다. 사쓰코의 발가락 세 개를 입안 가득 물었을 때, 아마 그때 혈압이 최고에 달했을 것이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한꺼번에 피가 머리로 쏠렸기 때문에, 이 순간 뇌졸중으로 죽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제 죽는 것인가, 지금 죽는 것인가 하는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생기리라고 전부터 각오했지만, 역시 ‘죽는다.‘라고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그리고 열심히 마음을 진정시켜야지, 흥분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내게 다짐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발을 빠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멈추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친 듯이 빨게 되었다. 죽는구나, 죽는구나 하면서도 빨았다. 공포와 흥분과 쾌감이 번갈아가며 가슴을 벅차게 했다. 협심증 발작과 같은 통증이 격하게 가슴을 조였다. - P80

"보세요, 도쿠 도련님. 이제 가을이에요. 귀뚜라미가 울죠."
유모가 말했다.
"자, 저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깨 물어라, 옷자락 물어라. 어깨 물어라, 옷자락 물어라‘라고 하는 것처럼 들리죠? 저 소리가 들리면 가을이 온 거예요."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 탓인지 잠옷으로 입은 흰 홑옷 소매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휭 하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홑옷을 입는 것이 싫었다. 잠옷에서는 항상 풀이 썩는 듯한 들척지근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그리고 가을 아침의 촉감이 하나로 뒤엉켜 나의 아득하고 희미한 기억에 남아 있다. 일흔일곱인 지금도 새벽에 저 찌르륵찌르륵하는 귀뚜라미 소리를 생각하면 그 옷의 풀 냄새, 유모의 말씨, 뻣뻣한 잠옷의 촉감이 되살아난다. 비몽사몽간에 지금도 와리게스이의 집에 있는 것 같았고, 침상 안에서 유모에게 안겨 있는 것 같았다. - P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제로 정신적인 권력이 로마로 흘러가고 있었다. 황제가 더 이상 로마에 거주하지 않는다. 그 사실은 교황이 옛 수도 안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권력과 권위의 원천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 콘스탄티노플의 대교부는 자기보다 더 빛나면서 더 끈질기게 자신을 감시하는 황제라는 존재를 곁에 두고 있었다. 1054년, 이렇게 불꽃을 튀기던 양측의 경쟁은 대분열Great Schism이라고 불리는 사태로 돌입하게 된다. 확연하게 다른 기독교의 두 버전이 탄생했다. 하나는 동쪽의 정교회orthodox Church였으며, 다른 하나는 로마의 교황을 정점으로 삼는 서쪽의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였다. 그 이후, 양쪽 모두 자신만의 스타일과 문화를 가진 두 개의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교회의 성직자들은 대개 턱수염을 기르고, 가톨릭 성직자들은 그렇지 않다. 정교회 신부는 결혼할 수 있고, 가톨릭 신부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차이들 뒤에는 로마의 교황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최고 권위의 원천을 둘러싼 깊은 의견 대립이 여전히 존재한다. - P252

그는 무슬림이 기독교의 성지를 소유한다는 것을 모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되찾기로 결심한다. 그는 가톨릭교회를 위해 예루살렘을 무슬림으로부터 되찾아야 한다고 유럽의 기독교 전사들을 설득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슬림의 도전에 대응하여 전투에 나갔던 사람들을 십자군Crusaders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십자가로 표식을 했다는 의미였다. 십자가 휘장을 앞세우고 로마 근처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에서 경쟁자와 싸웠던 콘스탄티누스처럼, 십자군은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의 상징을 앞세우고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무슬림과 싸우는 전투에 돌입했다. - P256

교회는 오래전에 성스러운 땅에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만, 이제는 교황이 예수의 지상의 대리자로서 군림하고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교황이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천국이나 지옥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교황뿐이었다. 그것을 기록한 오래된 책은 라틴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미사에서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면서 읽는 신부도 거의 없었다. 그것은 이해하지 못해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는 쿠란 낭독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 P263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마르틴 루터의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던 강박관념이었다. 루터는 자신과 마찬가 지로 강박관념에 빠져 있던 사람인 성 바울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신에 대한 통찰의 순간, 즉 계시revelation를 경험했다. 사람은 끊임 없는 기도나 순례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는 교황이 직접 서명한 면죄부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비즈니스적인 거래, 즉 돈으로 살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질시킬 뿐이다. 루터는 돈으로 신의 사랑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그때 번뜩 깨달았다. 신의 사랑은 살 수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는 깨달음이다. 왜냐하면 신은 대가 없이 자기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교회가 중개하는 싸구려 거래가 아니라 신의 사랑이다. 우리는 교회나 교황이나 다른 어떤 인간 대리인이 아니라 오직 그의 사랑, 오직 신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 - P265

과거에 종교는 신이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문제에 대해 시험을 치르고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러 다른 종교들이 서로 상호 경쟁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를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전혀 모르는 문제를 놓고 시험을 치를 때, 그것에 대비하여 우리를 지도해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P268

그러나 교회는 신의 친절divine kindness에 근거한 종교를 인간의 잔인human cruelly에 근거한 종교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그것은 예수 십자가의 깃발을 휘날리며 적을 살육했던 콘스탄티누스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십자군이 무슬림을 죽이러 성지로 진격했을 때 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심문관이 이단의 팔을 형틀 위에서 부스러뜨리며 한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아는 신의 버전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복종시키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신에 대한 버전이 사실은 단지 자신들만의 버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 P270

힌두교는 이런 종류의 차별을 시행했던 유일한 종교는 아니었다. 그것은 유대교 안에서도 발견된다. 유대교는 음식을 구별할 뿐 아니라 인간도 차별했다. 예수에게 씌워진 혐의 중 하나는 이런 금기들을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죄인들에게 말을 걸었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기도 했다! 그의 길을 따른다고 주장했던 교회조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의 본보기를 따르지 않아야 할 이유들을 발견했다. 식사 금기는 아직도 기독교 안에서 지켜지고 있다. 기독교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주님의 만찬, 또는 성찬, 혹은 미사라고 불리는 의례화된 식사다. 그것은 예수가 죽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한 식사에서 유래 한다. 그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기억하며 계속 그런 식사를 하라고 말한다. 그 이후, 기독교도들은 그것을 실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사람과 함께 먹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로마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도와 함께 먹으려 하지 않는다. 개신교도들 중에는 다른 종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먹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도들은 죄를 지은 자는 성찬을 함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마치 잘못 행동한 벌로 저녁을 먹이지 않고 아이를 잠자리로 보내는 것과 같다. - P2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는 경멸받고 결함이 많은 자녀들은 게헨나Gehenna, 즉 ‘결코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던져질 것이라고 말했다. 히브리의 옛날 기록들에서 게헨나는 죄인들이 심판의 날 이후에 벌을 받는 장소였다.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게헨나는 예루살렘의 쓰레기를 끊임없이 태워 없애는 장소였다. 예수가 그것을 끝없이 계속되는 벌에 대한 비유로 사용한 의도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그 이후 꺼지지 않는 불을 담은 화로는 지옥이 갖추어야 할 표준 장치가 되었다. 그로부터 6세기 후에 쿠란이 기록될 때가 되면, 영원히 지속되는 벌을 선고받은 자들이 화로에 접근하면 그들을 단숨에 빨아들이는 소리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불길 속으로 던져질 때 화로를 지키는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경고를 주는 자가 너희에게 오지 않았는가?‘라고. - P242

기독교는 교회 벽에 지옥 그림을 그렸으며, 설교자들은 지옥의 공포를 묘사하기 위해 자신의 상상력을 십분 활용했다.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자전적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The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에서, 지옥의 유황불이 게헨나의 불길처럼 영원히 불타오르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설교를 들었던 적이 있다고 적고 있다. 지상의 불은 타면서 사라진다. 열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불의 지속 시간은 더 짧아진다. 그러나 그 설교자는 소리치면서 말했다. 지옥불은 불타는 사람들의 고통이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계속해서 타오른다고! - P245

13세기와 14세기에 권력의 극점에 도달했던 가톨릭교회는 종교가 역사라는 험난한 바다에서 계속 항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종교는 타고난 속성상 분열되기 쉽다. 종교를 산산이 부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죽음만으로도 종교는 분열될 수 있다. 하나의 단어에 들어 있는 모음 하나를 놓고 벌이는 논쟁만으로도 종교는 분열될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분열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그를 중심으로 구조를 세워 그의 권위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결정했다. - P249

13세기와 14세기에 권력의 극점에 도달했던 가톨릭교회는 종교가 역사라는 험난한 바다에서 계속 항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종교는 타고난 속성상 분열되기 쉽다. 종교를 산산이 부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죽음만으로도 종교는 분열될 수 있다. 하나의 단어에 들어 있는 모음 하나를 놓고 벌이는 논쟁만으로도 종교는 분열될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분열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그를 중심으로 구조를 세워 그의 권위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결정했다. - P249

교회는 광대한 조직의 하부 차원을 운영하는 헌신적인 사제 질서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런 구조를 완성했다. 가톨릭의 사제들은, 결혼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주어진 정신적 역할과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종류의 인간적 애착을 갖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교회가 사제 자신들의 가족이어야 했다. 그러한 개인적인 희생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막대한 권력과 특별하고 성스러운 신분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런 신분은 사제 서품apostolic succession이라는 정신적인 시스템을 통해 주어졌다. 마치 이슬람의 시아파 버전에서 볼 수 있는 이맘inams처럼, 가톨릭 성직자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신적인 원천으로부터 그들의 권위를 부여 받았다. 이것이 교회라는 거대한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 P2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쿠란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수라Sura 13장으로, 가장 아름다운 알라의 명칭 99개를 알려준다. 그중 몇 개를 여기에 소개한다.

알라,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
자비를 베푸는 모든 이 중에서 가장 자애롭고, 자비로운 분······.
동정심으로 가득한 너그럽고, 인정 많은 분······.
자기 창조물을 언제나 지켜보는, 보호자······.
언제라도 사과를 받아주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용서하시는 분······. - P227

쿠란에는 아름다움과 위안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쿠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수라 13장에서조차, 알라와 세상의 관계에는 위안뿐 아니라 위험도 있다는 경고가 들어 있다. 여기서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 중에서 두 가지를 더 소개한다.

그는 축복뿐 아니라 고통을 전하는 공격자······.
그는 죄인에게 복수를 가하는 복수자······.

쿠란은 알라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러나 알라는 죄인과 비신자에게 우레처럼 화를 내기도 한다. - P227

일부 무슬림 신학자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비공식적인 ‘여섯 번째 기둥 Sixth Pillar of Islam‘이라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앞에서 본 이슬람의 다섯 가지 의무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노력, 그 자체가 ‘지하드‘라고 여겨진다. 지하드라는 말 자체가 분투, 또는 노력이라는 의미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신앙을 지키려는 분투, 또는 이슬람을 방위하기 위해 적에 대항하는 투쟁이 모두 지하드라고 볼 수 있다. 지하드는 오랫동안 그 두 가지 의미로 실천되었으며, 폭력을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무슬림에 대항하여 무슬림이 그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동일한 종교를 지지하는 자들 사이에서 폭력적 불일치가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무함마드가 죽은 다음, 막 태어난 이슬람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불일치가 발생했다. 그런 불일치가 발생하는 형식을 보면 종교가 어떻게 자신을 조직하고, 또 어떻게 그런 형태에 빠져드는지 알 수 있다. - P231

이슬람의 분열은 나중에 순니파Sunnis와 시아파Shias라고 알려지게 되는 두 개의 그룹을 만들어냈다. 순니파가 더 큰 집단이 었다. 따라서 분리적 관점을 가진 시아파는 큰 집단에서 스스로 를 잘라내어 자기들의 분파denomination를 확립했다. ‘순니‘라는 말 자체는 예언자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시아파는 곧 알리의 당파party of Ali를 의미했다. 그들은 예언자의 계승자는 무함마드의 후손, 즉 이맘imam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 원래의 두 분파dvisions 안에서 다시 수많은 분파가 발생했다. 이런 사실은 대부분 종교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특히 누가 책임자가 되어야 하느냐는 문제에 이를 때 그런 경향이 가속화된다. - P233

무슬림은 쿠란과 더불어 순나Sunnah, 즉 길way이라는 의미를 가진 일련의 문서를 가지고 있다. 쿠란이 가브리엘 천사를 매개 로 무함마드에게 전달된 것이라면, 순나는 무함마드의 친한 친구들과 가족이 무함마드로부터 직접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은 하디스Hadis, 즉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그가 나눈 대화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예정에 대한 가장 분명한 언급은 하디스 안에서 발견된다. ‘너희들 중에는 아무도 없다. 지금까지 태어난 그 어떤 영혼 중에도 없다. 천국 또는 지옥에 이미 그를 위해 주어진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간의 불행하고 행복한 운명은 이미 각자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아뿔싸! 이런 이론이 어떻게 알라에게 주어진 그 아름다운 이름과 어울리는가? 가장 자비롭고, 가장 동정심 깊고, 또 언제나 준비가 된 용서하는 자인 알라의 이름과 어울리는가? - P2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복되는 박해가 기독교의 확장을 결코 늦추지는 못했다. 상황은 오히려 반대로 흘러갔다. 권력이 승인하지 않는 어떤 일을 막으려고 할 때면 종종 그런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음 2세기 반에 걸쳐 교회는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야기를 더 해나가기 전에, 교회Church라는 단어가 갖는 두 가지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집회‘ 또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번역어다. 따라서 기독교 교회Chistian Church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나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모였던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게 된다. 그런 의미의 차이를 표시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람들의 모임 또는 집회에는 대문자 ‘C‘를 사용하여 Church라고 쓰는 것이다. 소문자 ‘c‘를 쓴 church는 그들이 만나는 건물을 의미한다. - P203

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병이 들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곧이어 제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유력한 경쟁자들이 전쟁에 돌입했다. 그들 중 가장 계산에 밝고 능력 있는 인물이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였다. 312년, 누가 황제가 될지를 결정하게 될 로 마의 외곽 전투 전날 밤, 천막 안에서 자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아주 생생한 꿈을 하나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자기 앞에서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이 표식을 가지고 정복하라!‘라고 명령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 그다음 해인 313년, 그는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칙령을 폐지하고 제국 전역에 걸쳐 무한한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315년에는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혐오했던 십자가 처형을 철폐했다. 그리고 324년까지는, 다른 종교들도 여전히 인정한 가운데, 기독교를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official religion‘로 확정했다. 기독교는 20년 만에 박해받는 떠돌이 종교에서 황제가 선호하는 종교로 놀라운 역전승을 거둔 것이다. - P206

이렇게 아담과 이브는 순수함을 잃게 된다. 그리고 신은 그들을 세상으로 내보내 어른으로서의 복잡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대해 이슬람은 약간 다른 설명을 덧붙인다. 신은 그들이 에덴을 떠날 때 기념으로 무엇인가를 가져가도록 허락했다. 그것은 그들이 영원히 떠나게 될 장소, 그리고 그들이 영원히 함께하게 될 어떤 존재를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에덴은 잃었지만 신을 잃지는 않았다. 에덴의 문이 닫힌 후에도 신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이 가 져간 것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검은 돌이었다. 그 돌은 아브라함에게 유산으로 전해졌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이스마엘이 발견했던 오아시스에 세운 사원 카바Kaaba 안에 놓았다. 그 전설 속의 검은 돌Black stone과 함께 카바 사원 주변에는 도시가 형성되었다. 그 도시의 이름은 메카Mecca였다. - P212

쿠란을 이슬람의 바이블(성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둘 사이에는 세 가지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첫째, 기독교 성서는 여러 세기에 걸쳐 다수의 저자와 편집자들에 의해 부가된 것이다. 둘째, 기독교 성서는 하나의 책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책을 수합한 것이다. 그리고 셋째, 성서는 신의 계시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창조물이다. 이슬람은 이 세 가지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쿠란을 설명하는 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쿠란은 한 사람에게,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연속적으로 주어진 계시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에 의해 매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다. 건물에 전기를 끌어다주는 케이블처럼, 무함마드는 쿠란을 전하는 전선관이었을 뿐, 에너지 자체는 신에게서 온 것이다. 쿠란은 세상에 드러난 초기 형태의 신의 마음이며, 지상에서의 신의 현존이다. - P221

사실, 쿠란과 무슬림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인의 관계와 같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지상에서의 신의 육화incarnation, 즉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라고 믿는다. 무슬림은 바로 쿠란이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쿠란은 그들에게 신이다. 쿠란이라는 말은 암송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예 언자의 귓속에 불어넣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그 예언자에 의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암송되었고, 그의 사후에 기록된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독실한 무슬림들은 아직도 쿠란의 114개 장, 즉 수라suras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한다. - P222

신과 일체가 된 열정적인 믿음의 소유자였던 무함마드는 기독교인들이 신이 아들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그리고 하늘에 신과 나란히 앉은 다른 두 신two other deities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분노했다. 기독교인들은 신을 삼위일체라고 보는 새로운 신 이론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삼위일체 신론은 하나의 신one God이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입장이다. 처음에 세상을 만든 아버지, 지상에서의 삶을 산 예수 그리스도인 아들, 그리고 시간의 끝까지 역사를 통해 인간을 안내하는 성령.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런 정교한 신학적 체계를 비판하며 우레처럼 소리쳤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다La ilaha illa Allah wa-Muhammad rasul Allah.‘ - P2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