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는 공상 속에서만 음란했다. 그녀의 모든 에로틱한 테마는 잠재의식 속에 깊이 틀어박혀 있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추측조차 하지 못했다. 폐쇄적이고 금욕적인 레나 노보질로바에게 그런 곳이 있다고는 결코 상상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에로틱한 테마를 지닌 잠재의식 이라니. 그러나 옐리세이는 유쾌하게 그 잠재의식을 부숴 버렸고, 에로틱한 테마를 자유로이 유인해냈다. 그리고 밝은 세상으로 끌어냈다. 레나 스스로도 자신이 그런 사람인 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몰랐다. 그게 전부였다. - P127

거울 속에 비친 옐리세예프가 안개 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레나는 거기서 너무나 아름다운 그의 리듬감 넘치는 육체와 마주쳤다. 유연함으로, 친밀함으로 아름다워진 사람들 같은, 독창적인 안무로 무대에 올려진 춤과 같은, 어쩌면 신이 진정으로 원한 게 그거였는지 모른다.
[…]
레나는, 그녀에게 사랑이란 단어는 운명의 비밀스러운 암호라고 여겼다. 그런데 옐리세예프에게 사랑은 춤의 일부였다. 스페인 무희의 캐스터네츠처럼. - P128

주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식당 여종업원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다. 아무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도,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알아챘더라면··· 그렇더라도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이나 타인의 사랑에는 무관심했을 것이다. - P130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남의 일에 무관심하니까. - P130

그는 지각하고 있었다. 얼굴 표정은 정지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표정은 매 순간 바뀐다. 삶도 역시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매 순간 변화한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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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는 망설이며 서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의심스러운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었다. 만일 엘리세예프가 로케이션 촬영 여행을 받아들인 것이 누군가를 무너뜨리려는 의도였다면, 그녀는 따귀를 갈겼을 것이다. 그럼 그것으로 모두 끝났을 것이다. 만일 그가 말로써 영향을 줄 수 있을 때 유혹을 했더라면, 그녀는 "난 황폐해졌어요. 아무것도 당신에게 줄 게 없어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옐리 세예프는 연민을 구했다. 동정심. 그녀 역시 동정심이 필요했다. 깨끗한 상태의 연민. 아주 순수한 마취제 같은. - P123

그는 실제로도 뭔가 미성숙한 듯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고통으로 인해 침울해하는 사내였다. 그가 옆에서 숨을 쉬고 있다. 꽁꽁 얼었던 새를 따뜻하게 녹이 듯 그녀를 녹였다. 따뜻하게 했다.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어쨌거나 얼어 있던 그녀를 녹였다. 생기를 들이마시는 게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숨을 쉴 때가 아니라 마실 때의 공기가 생각보다 아주 희박해지지 않았다. - P124

"노란 잎이 푸른 잎보다 더 아름다워. 난 가을이 좋아. 자연에서도, 사람들에게서도
레나는 노랑과 진홍색으로 물든 참나무 잎을 떠올렸다. 그 잎들이 푸른 잎보다 더 아름다운 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경우도 더 나빠지지는 않을 터였다. 옐리세이 역시 나뭇잎이었다.
"그리고 또 난 오래된 셔츠를 좋아해." 옐리세예프가 말했다. "난 그것을 5년, 10년 동안 입지. 특히 좋아하는 셔츠들은 솔기가 다 낡았어. 아직은 견디고 있지만, 내일이면 아마 터져버릴지 몰라. 그래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겠지." - P125

레나는 사랑이란 말을 평생 두 번밖에 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1970년 겨울, 안드레이와 촬영장에서 집으로 돌아 갈 때였다. 그가 택시를 놓쳤다. 그래서 그들은 깊은 눈길을 따라 걸어서 갔다. 그녀가 막 새로 지은 아파트를 받았던 때였다. 그곳엔 툰드라처럼 눈이 쌓여 있었다. 그들은 걸었다. 그러다 멈춰 섰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녀가 말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관 옆에서였다. - P126

처음 만난 사람과 침대에 있다고 해서 이미 배신행위를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한 상황일 때는 침대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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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보다 강하고 인내심이 많다. 어머니는 술도 입에 대지 않고 맨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견뎌 낸다. 하지만 딱하게도 사랑하는 남자한테 어떤 냄새가 나는지 모른다. 루스탐은 몇 가지 냄새가 난다. 입에서는 딸기 냄새가 나고 겨드랑이에서는 블랙커런트 잎사귀 냄새가 나고 배에서는 드라이 와인 냄새가 난다. 루스탐은 대지의 온갖 좋은 냄새를 온몸으로 풍겼는데, 젖먹이 아이처럼 깨끗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녀는 그의 냄새를 맡고, 암컷 늑대처럼 뜨거운 혀로 그를 핥고, 천적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201

오! 그녀는 얼마나 이 남자를 사랑했는가! 그가 먹는 모습, 그가 무언가를 씹고 삼키는 모습이 좋았다. 잘 때는 숨을 고르게 쉬 고, 배 위에 손을 대고 있으면 배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도 좋았다. 그는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가 하는 말을 듣는 것도 좋았다. 그는 책을 읽지 않았다. 책을 읽어서 뭐 하는가? 어차피 남의 생각인 것을 말이다. 음악이 좋으면 노래를 부르면 된다. 음악 이론은 어디까지나 선택 사항인 것이다. 그림만 하더라도 벽에 걸라고 있는 것 아닌가. 꼭 보면서 감상할 필요는 없다.
그의 존재 이유는 바로 사랑이다. 이 분야에서 그는 누구보다 위대했다. 강렬한 감정을 끄집어내고 강렬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재능이다. - P202

이제는 운명을 달리한 새끼 돼지의 얼굴과 죽은 불새(러시아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불멸의 새. 젊음과 아름다움을 주는 황금 사과를 먹고 산다)를 연상시키는 창백한 칠면조의 목을 사색에 잠겨서 바라보노라면, 스네자나는 여린 마음에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상념이 고개를 들곤 했다. 그 잔인함이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근본 조건 인지도 모른다. - P204

루스탐이 시를 읽는 사람이라면 훌륭한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을 것이다. "오, 저 싱싱한 젊음을 보라!" 하지만 루스탐은 시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마리나에게 나쁜 소식을 가져왔다. 오래 전에는 이런 사람을 비보 전령이라 불렀고, 아무 잘못이 없는데 도 그들의 목을 벴다. 그들은 단지 소식을 전하는 자일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루스탐의 경우는 그들과 달라서 목을 두 번 베어 내야 옳았다. 한 번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고, 또 한 번은 나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 P208

마리나는 돌아갔다. 루스탐은 여전히 서 있었다. 바람이 눈물을 말려 버렸다. 하긴 저녁에 가면 되지. 그런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아무 일도 안 생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칼로 무 자르듯이 과거의 모든 뿌리를 한 번에 잘라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서 른여섯이라는 나이는 자신의 가치를 아는 측면으로 보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나 한창 무르익은 나이였다. 그 어느 때 보다 말이다. - P209

마리나는 바쿠에서 태어났고, 튀르크식 표현과 문화와 음식을 흡수하면서 살았다. 그녀는 이 순진하고 아름다운 민족을 사랑했다. 아제르바이잔식 러시아어에 노출되어 살다보니 어느새 자기도 그들 식의 악센트가 섞인 러시아어를 했는데, 그 악센트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발전시켰다. 물론 블린(러시아식 부침개)이라든지 노래, 러시아인의 얼굴 등도 좋아했다. 마리나는 진정한 다민족주의자로 성장했고, 그래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만 분류했다.민족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P211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하겠어? 열일곱 살이란 나이가 뭐야? 인생을 막 시작하는 시기잖아. 새벽 여명이라고. 어쩌면 그보다 더 이른지도 몰라. 해가 뜨기 전에 처음으로 빛을 내뿜는 순간인지도 모르지. 올렉이면 어때. 다음에는 다른 남자를 만나면 되 잖아. 지금 둘이서 그렇게 좋다는데 생이별시킬 필요가 있을까? 때가 되면 저절로 헤어질 것을, 둘 사이에 사랑의 결실만 없으면 큰 문제는 안 될 것 같은데." 루스탐이 철학적으로 말했다. - P221

고약한 ‘해야 한다‘ 좀 그만 쓰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니까 하는 것 말이다. 과연 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P225

미움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운명적인데, 단지 차이가 있다면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미움은 전염병과도 같다. 모든 공간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어디로든 퍼질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미움은 러시아인을 향한 미움으로 바뀌었다. - P227

그녀는 그의 머리를 감싸 쥐고 안았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무언가 고향의 냄새 같은 진한 행복감이 느껴졌다. 그들은 더 이상 미래를 함께 할 수 없지만 둘의 과거가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었다. 진정한 사랑은 뇌리 속에 영원히 남는 법이니까. 지병처럼 말이다. - P230

도착하면 누가 마중 나올지, 혹은 마중을 나오기나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집도 절도 없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을 낙엽 같은 처지는 바로 그녀 아닌가. 그 순간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걱정해야 했지만, 그 순간에도 세 번째 아이인 루스탐을 걱정했다. 불쌍한 아들을 둔 불쌍한 사람이 어떻게 삶을 헤쳐 나갈지 염려스러웠다. 눈물 때문에 눈이 화끈거렸지만 이를 악물었다. - P232

‘벌어서 산다고? 그래서 돈은 언제 벌 건데? 10년은 족히 일해야 할 텐데, 그러다 보면 돈 버느라 젊음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릴 거야. 물론 열심히 모으겠지. 허리띠를 졸라맬 거고. 그럼 진짜 인생은 언제 산단 말인가?‘ - P237

불만은 절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쌓이기만 할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대립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첨예해질 뿐이다. - P252

류트카에게 마리나는 방 한가운데 세워 놓은 옷장처럼 방해만 될 뿐이었다. 시어머니라는 사람이 마른하늘에 눈 내리듯 갑자기 나타나서는 생쥐처럼 얌전히 지낼 생각은 않고 남의 영역에서 명령이나 하고 자기 규칙을 강요하다니, 짐승도 참지 못해서 목을 물고 뿔로 찌를 것이다. - P253

러시아 난민들은 우즈베키스탄, 바쿠, 체첸 등에서 왔다. 분쟁 지역을 떠나 온 난민의 문제를 해결하는 공무원들은 문자 그대로 미쳐 가고 있었다. 한꺼번에 모든 걸 잃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눈 사태를 방불케 했다. 한쪽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는데 그 옆에서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집에 살며 자기 접시로 밥을 먹었다. 이것은 공평의 낙차였다. 그리고 억울한 사람들,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한 것에 대해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들개처럼 사나워지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아무나 보면 짖고, 바닥에 누웠다. 좀 더 나은 먹거리를 물기 위해 달려들 준비가 돼 있었고, 가장 먼저 먹거리 등을 낚아채기 위해 높이 뛰어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254

하지만 누구에게나 하늘은 하나이며, 누구나 똑같은 공기를 마시지 않는가. - P262

왜 다른 이들은 사람답게 사는데 그녀의 자식들만 그 모양일까? 도대체 그녀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일까? 그녀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러시아 지식인들이 자주 하는 질문인 ‘누구의 잘못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잘못한 사람이 있고, 무슨 일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 아무도 남의 경험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 P269

살다 보면 모든 일이 한꺼번에 잘 풀리는 날들이 있다. 물론 운명의 칼날이 사방에서 조용히 달려드는 늑대 무리처럼 한꺼번에 덮치는 날도 있는 법이다. - P275

마리나는 사흘 동안 누워만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재만 남은 ‘삶‘이라는 이벤트에 마침표를 찍기로 마음먹었다. 마리나 츠베타에 바의 말처럼 ‘창조주에게 표를 돌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와서 여행은 할 만큼 충분히 했으니 이젠 떠나도 될 것 같았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자신이 필요 없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 P278

"부모는 자식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아요? 부탁하기 전에는 간섭하지 않는 거예요. 자기는 쓸데없이 간섭하니까 당하는 거라고요. 난 아니거든요."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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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아니, 아니야, 너는 그걸 바라는 게 아니야. 단지 내가 오늘 밤 내내 너를 쳐다본 일로 나를 곤란하게 하고 싶어서,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아! 그래, 오냐. 오늘 밤 내내 내 너를 쳐다봤다. 너의 아름다움이 나를 현혹시켰구나. 그래서 내 너를 너무 빤히 쳐다봤구나. 허나 이제 두 번 다시 그렇게 쳐다보지 않으마. 사람이든 뭐든 직접 쳐다보면 안 돼지. 오직 거울로 비추어 보아야만 하지. 거울은 오직 가면만을 보여 주니까······.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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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오늘 또다시 지각을 했어요." 그녀가 말을 꺼냈다.
"이번 주에 벌써 세 번째예요."
"네 번짼데요." 내가 정정했다.
"부끄럽지도 않나요?"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부끄럽다고 할 수도 없었고, 부끄럽지 않다고 할 수도 없었다.
"별로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쓸데없는 말장난은 그만두죠. 당신은 이 문제가 뭘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나요? 수업 종은 울렸는데 교사인 당신이 없으면 아이들은 어쩌겠어요. 어쩔 줄 몰라서 우왕좌왕 할 게 아니냐구요···"
"무슨 말씀을!" 나는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그 반대겠죠. 아이들은 제가 몸이 아파 결근을 하나 보다 하고 아주 좋아할 걸요." - P40

사람들은 나를 괴짜로 취급한다. 내가 많이 먹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랐다는 이유로, 아무도 청탁한 적 없고, 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소설을 번역하고 있다는 이유로, 또 많은 사람들이 시간당 2루블 50코페이카를 주겠다며 부탁하는데도 내가 개인 교습을 맡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 P47

"지금 거짓말하는 거지?
"거짓말이 아냐."
"나를 바보로 아는 모양인데···"
"가끔은 그래." - P54

수프는 절대로 맛있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학교에서 먹는 수프보다는 나았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네요." 내가 대답했다.
니나 어머니가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왜냐하면 야비하고 천박한 인간만이 대접받은 음식을 맛없다고 타박하며 먹을 테니까. 진실을 말할 때가 거짓을 말할 때보다 무례한 상황을 유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오늘은 나 나름의 무지개가 걸려 있어야만 했다. - P58

"여객기가 어느 산간 지방을 날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독수리 세 마리가 날아오더니 그중 한 마리가 그대로 비행기를 향해 돌진했다는 기사야."
[…]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니나가 나를 쳐다봤다.
"독수리에겐 나쁜 거겠지." 내가 말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몰라···" 니나가 벽을 통해 어딘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파블로프가 나를 통해 어딘가 딴 곳을 응시하듯이.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말 이것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내가 독수리였다면 가슴으로 비행기에 덤벼들 수 있었을까? 아니면 두 마리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렸을까? - P59

오늘 나는,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했다. 나는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사소한 거라도 모두 진실을 말하기로 작정했더라면 세상이 훨씬 살기가 편해졌으리라고. 왜냐하면 사소한 일에 거짓말을 자주 하다 보면 타성이 붙게 되고, 그러면 중요한 일에서도 거짓말을 하게 되는 법이니까. - P66

디마는 ‘응급 진료실‘에서 의사로 일했다. 사람들이 위급한 상태에 처하게 되면 그를 집으로 호출했다. 그들은 디마의 왕진을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상태가 호전되고 나면 디마가 그들을 떠나는 즉시 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그와 같다. - P71

디마의 엄마가 말했다. "넌 어릴 때부터 주변머리라곤 없었어. 다른 애들이 간단하게 다 하는 망나니짓도 할 줄 몰랐지. 지금도 너는 그래. 나태한 인간들도 다 가진 꿈도 간단하게 꾸지 못하잖아. 너한테는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도 절대, 아무것도 없을 거다."
게다가 엄마는 디마가 물지게나 지면 딱 편할 거라고 덧붙였다. 그건 아무것도 바로잡을 게 없으니까. 왜냐하면 그건 아빠에게서 대물림한 거니까. 그의 타고난 특성이니까. - P74

디마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내 집에서 호랑이를 데리고 살고 싶어요. 그게 소원이에요."
"집에서는 개나 고양이만이 살 수 있어요." 모자 쓴 사람이 이치에 닿게 말했다.
"알아요." 디마가 짧게 인정하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났어요.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비극적인 인물이죠. 엥겔스가 그런 말을 했다죠. ‘비극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실현 불가능과 욕망의 충돌이다···‘라고 말이에요." - P75

디마는 동물원으로 갔다.
그는 이곳에 20년 전 아빠와 함께 마지막으로 왔었다.
그리고 지금 동물들의 우리 곁을 지나면서 다 자란 아이로 동물원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 그는, 그러니까 20년 전에 그가 이곳에 왔을 때는 독수리 우리에서 독수리 자체만을 봤었다. 그런데 지금은 ‘갇혀 있는 독수리‘를 보고 있다. 독수리 우리는 위로 열려 있었다. 독수리는 머리 위로 하늘이 있으나 그곳을 향해 날아갈 수가 없다. 날개가 꺾였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꺾인 날개를 늘어뜨리고 넓은 그루터기에 앉아 있다가 가끔씩 나무 장식 위를 걸어 다니곤 했다. 그런 나무 장식은 주방 가구점에서나 파는 것들이다. - P76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뿐이죠." 디마가 말했다. 그는 의사로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하죠?" - P78

조련사는 디마를 신뢰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호랑이를 소원하며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런데 조련사는 단 한 번도 그런 것들에 대해 꿈 꿔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한평생 조용히 떠돌아다니기를 염원했다. 서로의 눈앞에 거치적대지 않고 따로 떨어져 살기 위해서. - P80

집에 돌아와서 그는 사소한 이유로 랴와 전화로 말다툼했고, 전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엄마와 싸웠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다. - P82

"인간의 뇌에 그런 스위치가 있다면 좋겠어요.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잊고 싶은 것들을 전부 잊을 수 있게요." 디마는 호랑이를 잊고 싶었다. - P83

실제로 뇌에 스위치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대신 텔레파시는 존재한다. 사람이 뭔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면 그의 뇌는 견고하고 밀도 높은 파동을 사방으로 내보낸다. 그 파동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나서 집 안에 더 이상 채울 자리가 없어지면 창문으로 게워 낸다. 창문 밖으로 벗어난 파동은 위로 퍼져서 사방의 안테나에 부딪친다. 이 안테나들은 가느다란 두 팔을 펼쳐 든 아주 작은 사람의 스케치 모양을 하고 곳곳의 지붕 위에 서 있다.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서 있는 이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에게로 끌어 들인다. 언어와 음악과 생각들을,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수신기를 통해 그 집 안의 사람들에게 전한다. 일반적으로 들리는 음악이나 언어들이 그것인데, 생각은 아니다. 생각들은 들리지 않지만 느낌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 어디선가 몹시 나쁜 상황에 처해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 심지어 그가 지구의 반대편에 산다 해도. - P84

디마는 행복과 환희를 경험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특별하게 빛나는 환희를 체험하지 못했다. 놀라움과 어떤 가벼운 황폐함은 있었지만 환희 같은 건 없었다. 디마는 난생처음으로 꿈의 실현을 경험했으나 그것이 이렇게 놀라움과 황폐함과 평온을 나타낼 줄은 몰랐다. - P85

사람이 기분이 좋아지면 그는 더욱 착해지고 다른 사람의 행복도 바라게 된다. 디마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길 바랐다. 그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누구나 다. 그는 이 행복을 자신의 가죽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위급한 호출을 받고 방문하게 되는 집집마다 남겨 두고 싶었다. - P87

창문 너머로 다채롭게 채색된 창들이 달린 집들이 보였다. 마치 새해 장식 트리에 불을 밝혀 놓은 듯했다. 그러나 그 집들 맨 아래쪽에는 땅거미 속에서 겨우 식별되는 컴컴한 헛간들이 서 있었다.
디마는 관자놀이를 창틀에 기대고 서서 생각했다. 아직 젊다는 것에 대해서, 앞으로 펼쳐질 그의 인생의 많은 날들에 대해서, 그리고 흥미로운 많은 사건과 만남에 대해서. - P87

그날은 그가 기억하는 한,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끝 무렵을 엄마가 어지간히 망쳐 놓고 말았다. 엄마들은 여느 사람들처럼 사랑할 줄 안다. 그리고 여느 사람들처럼 모든 걸 망칠 줄도 안다. - P88

디마의 일주일은 다르게 이뤄졌다. 일요일 다음엔 월요일이 와 있고 월요일 다음엔 다시 월요일이 와 있다. 그의 생활은 모두 연일 이어지는 월요일 하나로 변했다. - P91

친한 사람들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깨를 으쓱하며 관대한 척 미소 지었다. 그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느꼈다. 인간은 항상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자신의 우월감을 기뻐한다. - P91

이번에는 거꾸로 조련사가 호랑이들에 흥미가 없어졌다. 호랑이들도 사람들처럼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놈들을 함께 두고 봐도 서로가 전혀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특별한 차이가 없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는 큰 호랑이, 혹은 작은 호랑이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 P97

"나는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났어요." 디마가 말했다. 그리고 마치 기도할 채비라도 하는 양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비극적인 인물이죠. 엥겔스가 그런 말을 했다죠. ‘비극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실현 불가능과 욕망의 충돌이다‘라고 말이에요."
무명인인 오흐리멘코는 디마가 불쌍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다. - P105

이곳에서 그는 거의 무료로 일했다. 그는 먹고 마시기에 충분하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또 일만 할 수 있다면 어디나 마찬가지라 여겼다. 실제로 최고로 아름다운 것도 순간의 멈춤일 따름이니까. - P110

그는 살아 있는 따뜻한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만 했다. 열정이 아니라 부드러운 안정이 필요했다. 그녀의 품에 따뜻하게 파묻혀 있기만 해도 좋다. 어릴 때처럼. 이를테면, 그녀가 "나 여기 있어. 아무것도 겁내지 마···"라고 속삭여 주기만 하면 된다. 정말 그래 주기만 하면 머릿속에서 와글거리는 소리들을 겁내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목청껏 고함친다 해도 괜찮다. 눈을 감아도 무섭지 않을 테고, 잠조차 들 수 있으리라. 불면증이 그를 괴롭혔다. 누군가 곁에서 잠들 수 있게 해 줄 여자가 필요했다. 혼자 있는 건 너무도 무섭다··· 총살형에 직면해 있는 것처럼. - P111

하루하루가 차츰 절망적인 지옥으로 변해 갔다. 안드레이는 결코 산목숨도 죽은 목숨도 아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상태도 죽어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끝도 없는 괴로운 투쟁이었다.
[…]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어떤 식으로든 그가 살아 있을 때가 더 나았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레나는 시간과 기억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늪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가라앉아 버렸다. - P112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흙덩이처럼 잿빛이었다. 짙은 색깔의 머리에 희끗한 머리카락이 반은 섞여 있었다. 가꾸지 않은 모습이 황폐해 보였다. 그녀의 엄마가 봤더라면 "마치 무두질 기계 속에다 짓이겨 놓은 것 같다"고 했을 것이다. ‘무두질 기계‘의 존재 의미가 무엇이던가? 생명의 강한 두 손바닥이 아니던가. 주먹을 불끈 쥔 삶이 아니던가. - P115

거의 모두 같은 연배인 서른일곱 살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옐리세예프는 자신이 가장 늙었다는 데에 비애를 느꼈다. 그의 나이는 쉰이었다. 이들과는 다른 세대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그들과 동등하게 어울렸다. 그건 상스러운 욕설이 포함된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나이를 암시하진 않았다. 하지만 서른일곱인 그들이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는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이 속으로 ‘쓸모없는 늙은이는 저리 꺼지시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P116

레나는 분장 전문가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라면 그의 얼굴에서 무엇을 수정했을까, 생각했다. 그의 얼굴의 정해진 부분은 입과 잘 준비된 턱이었다. 그리고 미소였다. 그의 미소는 본질적으로 준비된 미소였다. 미소는 완벽했다. 치아는 깨끗하고, 품위 있고, 가지런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나 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안경 밑의 눈. 레나는 그 눈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불분명한 빛의 떨림. 광인의 눈빛이었다. 멋지게 곧은 목. 손놀림. 그리고 키. 키는 장신에 가까웠다. 무릎은 탁자 밑으로 멀리 사라졌다. 그런 무릎으로는 여자를 잘 지탱해 주고 아이들과도 잘 놀아 주리라. - P117

식탁에서의 대화는 거의 무의미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바로 이런 소탈한 모임의 의미는 대화의 내용에 있지 않다. 의미상의 무게가 아니라 영혼의 접촉에 있다. 그냥 서로 옆에 앉아 있으면 된다. 틀에 박힌 방에 혼자 있는 게 아니다. 함께 있는 것이다. 타인의 에너지를 피부로 지각하고, 따뜻해지고, 서로에게서 충전되어 외로운 죽음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도망칠 수도 있다. […] 어떤 알 수 없는 움직임과 긴장이 공간 속에서 흘렀다. 삶이었다. - P118

레나는 거의 어린애처럼 스스럼없는, 야비함에 가까울 정도로 뻔뻔한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그는 주인처럼 처신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어릴 때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혹은 호텔 방은 집이 아니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호텔 방은 모든 이들을 위한 벌집이니까.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신뢰의 차원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를 완전히 믿고 의지했다. 또 불쌍해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 P120

그는 눈을 감았다. ‘뎅··· 뎅··· 뎅···‘ 그가 미쳐 가고 있다. 그건 분명했다. 치료가 된다면 재능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약은 환청을 쫓아냄과 동시에 직관력도 지워 버린다. 이른 바 ‘옐리세예프‘가 사라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럼 그때는 무엇이 남게 될까? 그리고 그때는 무슨 이유로 살아야 할까?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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