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는 망설이며 서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의심스러운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었다. 만일 엘리세예프가 로케이션 촬영 여행을 받아들인 것이 누군가를 무너뜨리려는 의도였다면, 그녀는 따귀를 갈겼을 것이다. 그럼 그것으로 모두 끝났을 것이다. 만일 그가 말로써 영향을 줄 수 있을 때 유혹을 했더라면, 그녀는 "난 황폐해졌어요. 아무것도 당신에게 줄 게 없어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옐리 세예프는 연민을 구했다. 동정심. 그녀 역시 동정심이 필요했다. 깨끗한 상태의 연민. 아주 순수한 마취제 같은. - P123
그는 실제로도 뭔가 미성숙한 듯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고통으로 인해 침울해하는 사내였다. 그가 옆에서 숨을 쉬고 있다. 꽁꽁 얼었던 새를 따뜻하게 녹이 듯 그녀를 녹였다. 따뜻하게 했다.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어쨌거나 얼어 있던 그녀를 녹였다. 생기를 들이마시는 게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숨을 쉴 때가 아니라 마실 때의 공기가 생각보다 아주 희박해지지 않았다. - P124
"노란 잎이 푸른 잎보다 더 아름다워. 난 가을이 좋아. 자연에서도, 사람들에게서도 레나는 노랑과 진홍색으로 물든 참나무 잎을 떠올렸다. 그 잎들이 푸른 잎보다 더 아름다운 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경우도 더 나빠지지는 않을 터였다. 옐리세이 역시 나뭇잎이었다. "그리고 또 난 오래된 셔츠를 좋아해." 옐리세예프가 말했다. "난 그것을 5년, 10년 동안 입지. 특히 좋아하는 셔츠들은 솔기가 다 낡았어. 아직은 견디고 있지만, 내일이면 아마 터져버릴지 몰라. 그래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겠지." - P125
레나는 사랑이란 말을 평생 두 번밖에 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1970년 겨울, 안드레이와 촬영장에서 집으로 돌아 갈 때였다. 그가 택시를 놓쳤다. 그래서 그들은 깊은 눈길을 따라 걸어서 갔다. 그녀가 막 새로 지은 아파트를 받았던 때였다. 그곳엔 툰드라처럼 눈이 쌓여 있었다. 그들은 걸었다. 그러다 멈춰 섰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녀가 말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관 옆에서였다. - P126
처음 만난 사람과 침대에 있다고 해서 이미 배신행위를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한 상황일 때는 침대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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