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학부모의 밤, 주일 학교 소풍, 거리 파티, 미사 후의 행사에서 다른 어머니들을 바라보며 자신은 왜 저런 어머니를 가질 수 없는지 의아했다. 날씬하고, 멋지고, 대체로 조용한 어머니. 왜 내 어머니는 비만이고, 특이하게 옷을 입으며, 저렇게 시끄럽고, 거리낌 없고,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모두에게 말하고 싶어 안달인 걸까? 그는 부끄러움에 몸이 움츠러든 적이 많았다. 저녁에 재봉틀로 뚝딱 만들어낸 텐트만 한 크기의 어머니의 꽃무늬 가운에, 신발 끈 위로 툭 불거져 나온 살에,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샌드위치, 소시지롤, 록 케이크 따위를 종종 완전히 모르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곤 할 때가 그랬다. 그런 걸 보면 몸에도 영향이 있었다—사지에 열감이 느껴지며 힘이 쭉 빠지는 느낌, 이마 뒤에 뭔가 엉기는 느낌. 그는 버스나 기차에서, 그 어떤 공적인 모임에서도 고집스럽게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앉았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와 그녀를 연결 지을까 봐서였다. - P166

에이바는 주전자를 수도꼭지 아래에 대보지만 물줄기가 옆으로 발사돼 손목을 적시자 움찔한다. 뭔가 잘못됐다. 이 집, 평생을 알고 지낸 이 집이 그녀에게 농간을 부리고 있다. 만 번도 넘게 지나다닌 출입구는 갑자기 좁아진 것 같다. 지날 때 날카로운 모서리에 팔꿈치가 걸린다. 아기일 때 누워 있고, 아장아장 걷던 러그는 그녀를 넘어뜨리기로 공모라도 했는지 신발이 자꾸 걸린다. 선반은 낮아져 관자놀이에 타격을 줄지도 모른다. 전등 스위치는 창문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다. - P170

그는 둘의 말소리를 능가하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그러니까 들어봐요. 오늘 계획이 뭐예요?"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돌아보고, 그는 놀랍도록 비슷한 둘의 눈이 점점 커지는 걸 보며 느낀다. 둘 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둘은 그저 둘 사이의 공기를 메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구나, 헤어브러시 논쟁은 단지 그런 긴장감을 풀기 위한 수단일 뿐이구나. - P172

팔짱을 끼고 집 안 층계참을 반복해서 거닐며 마음에 가득 차고 넘치는 장면을 어렵게 견디는 날들이 있다. 비 오는 어둑어둑한 저녁 피카딜리선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비에 맞아 반짝이는 우산, 걸어서 10분 거리인 그녀의 예전 아파트와 어머니의 집, 안개 낀 날의 하이베리 필드, 프림로즈 힐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광경. 향수병. 그녀는 향수병이 정말 실제로 누군가를 그리움으로 병들게 하고 아프게 하고 미치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저녁 즈음이 되면, 그녀는 항상 준비돼 있다. 슬픔을 뒤로 감춘다. 마치 숨겨야 하는 추한 모습이라도 되는 양. - P175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게 할 거고, 되돌아가지 않을 거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다. 누구에게도 다시 패배했다고 보이지 않을 거다. 간호 학위에 실패하고 아이가 없고 남편이 떠난 모니카. 모니카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작정이다. 흔들리는 지붕, 밤이면 삐걱대는 굽도리널, 좀먹은 가구, 적대적인 이웃이 있는 이 집에 살 것이다. 여기 살 것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 P175

마이클 프랜시스에게 묻는다면, 로버트의 퇴직은 그의 인생에 일어난 일 중 최악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버지의 직장은 아버지 인생에 변함없는 일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이유, 하루를 보낼 장소, 시간을 채울 업무, 저녁이면 돌아오기 위해 출발할 장소를 제공했다. 그것이 없는 아버지는 부두에 묶어놓지 않은 보트, 목표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며 부딪히는 보트와 같다. - P180

그는 가늘고 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오소리털 붓끝으로 턱을 문지른다. 아버지 빼기 어머니는 풀 수 없는 방정식이다. 아버지의 침묵은 어머니의 떠들썩함으로 발효되고, 아버지의 질서와 냉정함은 어머니의 혼돈과 극적인 속성 때문에 더욱 강조된다. 그들 중 누구도 그레타에 의해 활력을 얻지 못한 로버트를 보지 못했다. 마이클 프랜시스는 그레타를 만나기 전 몇 년 간의 아버지 모습을 결코 상상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어머니 없이 아버지는 삶을 어떻게 꾸려나갔을까? - P183

샌드위치를 하나 입안으로 던져 넣었는데, 어쩐지 놓치고 만다. 바닥에 떨어진 샌드위치가 신발 발가락 부분에 비스듬히 맞고 퉁겨진 뒤 쓰레기통 주변 어딘가로 사라진다.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처럼 꼭 들어맞는 것 같다. 지금 그가 처한 삶의 현실과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자신을 혐오하는 것 같은 아내를 둔 남자, 가족이 위기 속에서 산산조각 난 남자, 열기와 가뭄에, 물 부족에 포위돼버린 남자, 아버지가 신만이 아는 어딘가로 도망쳐버린 남자. - P196

애정의 물결이 에이바 안에 차오른다(본능적이고 즉각적이다). 그리고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걸 느낀다. […] 결국 모니카일 뿐이다. 에이바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냥 모니카다. 평생 알아온 모니카, 언니다. 뉴욕에서 내내 상상 속에서 만들어온 파멸의 악령이 아니다. 그냥 모니카다. 에이바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왜냐면 그게 사람들이 으레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몇 년 만에 친언니를 만났을 때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렇게 안아주고 나면 예전에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든 그런 것들은 싹 사라지고 다시 시작하게 되는 거다. 그리고 어쩌면 전에 마이클 프랜시스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P198

에이바는 옆에 있는 사이드 테이블의 접시를 내려다본다. 주변에 우박처럼 쏟아진 부스러기, 우각호 모양으로 말라붙은 차를 보며 시차로 인한 피로가 배고픔과 메스꺼움 사이의 한가운데를 정확히 나누고 있음을 느낀다. 모두를 이해해야겠다는, 모두의 위치를 파악해야겠다는, 기억해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다른 누군가가 사라지기로 결심할 경우를 대비해서다. 에이바는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확인한다. 마이클 프랜시스는 여전히 주방에서 어슬렁거리고 있고, 어머니와 모니카는 복도에 있다. 게이브는 저 멀리 대서양 건너편에 있다. - P200

에이바는 바로 앞 카펫에 있는 그들의 발을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마이클 프랜시스의 맨발, 어머니의 슬리퍼, 끈에서 빨간
색 헝겊 조각이 피어오르는 모니카의 버건디색 샌들. 에이바는 대신 자신의 손을 본다. 손은 여전히 단어로 뒤덮여 있다. 흐릿해지는 검은 잉크, 글자는 앞으로 뒤로 흘러간다. - P201

그녀의 언니, 모니카는 그녀를 피했고 마치 그녀가 거기 없는 것처럼 그녀를 통과하거나 지나쳐 봤다. 그건 모든 걸 부인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건, 우린 방을 같이 쓴 적 없다, 나는 길을 건너려고 네 손을 잡은 적이 없다, 난간에서 상처를 입었을 때 네 머리에 붕대를 감아준 건 내가 아니었다, 넌 내가 입다 작아진 옷을 입고 자라지 않았다, 내가 신열로 몹시 아파 누워 있을 때 내 입에 차를 떠먹여준 건 네가 아니다, 넌 수년 동안 같은 침대에서 내 옆에 누워 자지 않았다, 너에게 눈썹 뽑는 법, 신발 버클을 매는 법, 스웨터 손세탁 법을 알려준 건 내가 아니다,라는 걸 의미했다. 거기서 느껴지는 부조리함과 아픔에 에이바는 당황했다. 그 모든 시간을 보낸 후에도 그런 식으로 회피하는 모니카의 모습을 떠올리자 마치 새로 생긴 멍처럼 욱신거리고 아프다. - P211

방을 함께 썼던 사람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게 서로 스미는 것이 있다. 누군가의 가까이에서 밤새도록 같이 잠을 자면, 서로의 공기로 숨을 쉬고, 마치 꿈인 것처럼 무의식이 얽혀 마음의 회로가 서로의 마음 가까이에서 흐르고, 그렇게 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정보가 교환된다. - P215

에이바는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지만 이내 눈을 가려버린다. 태양이 지붕과 나무 위에서 정점에 이르러 있다. 정오 또는 그쯤 이 분명하다. 앞에 펼쳐진 광경, 그러니까 자동차, 버스, 가게, 유아차를 끄는 젊은 여자가 모두 어른거리고 굴절된다. 태양 빛이 모든 것에 침투해 가게 쇼윈도에서, 자동차 범퍼에서, 유아차 바퀴에서 나온 빛이 망막을 헤집고 들어온다. - P220

에이바는 그에게 뭘 말했는데, 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레타는 선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신발이 담긴 모자 상자에서 가만히 손을 뗀다. 자신이 들은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정말 에이바가, 그에게 뭘 말했는데, 라고 묻지 않는다는 사실이 연못에 던져진 돌덩이처럼 그레타의 마음속으로 가라앉는다. 항상 반쯤 의심하던 것이 갑자기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렌즈가 안개 낀 장면에 왜곡되어 있었던 것처럼 갑자기 모든 게 선명히 보인다. 그레타는 손을 옷장의 나뭇결을 따라 쓸어내린다. 꼭대기에 홀로 놓인 좀약을 제거한다. - P256

그레타는 로버트의 의자에 앉는다. 뒤에 걸린 트위드 재킷의 딱딱한 칼라가 등에 n 모양으로 압박을 가해온다. 처음에는 막연히, 그러다 분명히 제멋대로 비죽비죽 강렬한 충동이 든다. 남편이 보고 싶고, 이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 어쩌면 말의 형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그의 곁에 앉아 그도 지금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거다. 딸들, 사랑하는 자식들 사이에 끔찍하게 꼬인 관계,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해.
그레타는 그곳에 앉아 고립감을, 그의 부재를 느낀다. - P258

그레타는 항상 모니카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았다. 처음 그 아이를 본 순간부터 죽 그랬다. 다른 두 아이와는 이러지 않았다. 모니카만 그랬다. 그녀는 출산으로 인한 비몽사몽에서 돌아오면서, 흔들리는 구급차 안에서 떠나가라 우는 아이를 곁에 두고 혼자 깨어나면서, 모니카가 어쩌면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테지만,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지나치게 많이 보았고, 또 그 아이가 목격한 장면을 절대 잊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 P263

아버지는 모니카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걸어 나가버렸다. 이 모든 걸 남겨둔 채. 히스테릭한 그레타를 진정시키고, 홍수처럼 밀려드는 형제자매와 친척들을 맞게 하고서. 아버지는 분명 모니카가 이 문제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터다. 신경이나 썼을까? 아니,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모니카가 모든 걸 팽개치고 집에 와 이 모든 걸 해결하리라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보다 더 이기적이고 무심한 행동은 없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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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는 고양이의 어깨 쪽 털에 손을 얹었다. 척추를 따라 볼록볼록 솟은 구슬과 어깨뼈의 삼각형 모양이 느껴졌다. 항상 섬뜩하게 느껴지는데, 고양이의 뼈란 어찌나 약한지. 이 고양이는 단단하고 큰 생명체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안아보면 어찌나 새처럼 가냘프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마치 여기 없는 것처럼. 또 어찌나 놀랍도록 따뜻한지. - P67

모니카는 고개를 숙였다. 고양이를 흔들어 생명을 되찾게 하고 싶었다. 발과 손톱을 펴 모니카의 소매를 잡아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누군가는 이런 죽음에는 어떤 여러 단계 사이에 분투, 싸움, 대결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죽음은 언제나 그저 표류하는 것, 그냥 미끄러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끔찍할 뿐이다. 이토록 쉽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생각하면. - P69

그레타가 항상 하는 말이었다. 어떤 것들은 그냥 놔두는 게 더 낫다고. - P73

모니카는 가방을 챙겨 일어났고, 피터는 그녀의 팔을 살짝 잡으며 그저 말했을 뿐이다. "이해해요." 딱 그렇게 말했다. 이해해요. 어찌나 멋진 말인지, 심연 같은 이해를 담은 말, 그녀의 눈을 깊이 바라보며 하던 말. 모니카는 즉시 그가 그 말을 왜 했는지는 잊어버렸고, 그 문장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일반적인 하나의 문장이 됐다. 그는 이해한다. 모든 것을. 그녀의 모든 것을. 마치 위대하고 부드러운 담요가 감싸는 것 같았다. 그는 모니카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해한다고 말했다. - P77

모니카가 원했던 건 아기가 아니었다. 아이였다. 모니카는 담요에 꽁꽁 싸인 생명체에 열광하지 않았다. 두려웠다. 그 연약함, 계속되는 요구 사항, 너무 새것인 나머지 몸에서 여전히 물과 우유와 피가 연상되고, 출산에 따르는 그 모든 고통과 노력과 폭력성. 아니다. 그녀는 할 수 없었을 거다. 어머니가 에이바와 했던 것들을 해내지 못했을 거다. - P90

에이바는 붉은 전구를 톡 치고 빨랫줄에 끝이 매달린 기다란 필름 조각을 바라본다. 마치 맹수의 접근을 감지한 동물처럼 필름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뒤집힌다. 필름 중 하나의 가장자리를 잡고 마른 걸 확인한 뒤, 위로 들어 빛에 비추어 본다. 조그만 유령들이 불꽃 안에서 화르륵 타오른다. 딱 벌린 하얀 주둥이들 끝에는 색이 없는 머리카락, 그들 뒤로 최후의 심판일 같은 검은 배경 하늘. - P127

기묘한 날씨는 기묘한 행동을 불러온다. 용광로 같은 더위 속 분젠 버너는 전자의 교환, 화합물의 분열 및 다른 물질의 결합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결국 불볕더위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위는 많은 걸 방치하게 하고, 사람들의 경계를 약화시킨다. 사람들은 일상적이지 않다기보다 부주의하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기질에서 벗어난다기보다 오히려 거기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 P155

여우 한 마리가 주차된 트럭 뒤에서 나와 사뿐사뿐 나아가 다가 길러튼 로드 중간에서 잠시 멈춘다. 그러다 꼬리를 동글게 말아 세우고 정원 벽 너머로 사라진다. 이른 시간, 지하철이 돌로 포장된 길 아래에서 몸서리친다. 집을 이루는 벽돌에서, 창문 틀에서, 마룻널에서, 발라놓은 회반죽에서 반향이 느껴진다. 어딘가에 충격을 주며 떨리는 윙윙거림이 거리를 따라 이동해 테라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지나간다. 하지만 집들은 이런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고, 거주자들도 마찬가지다. 주방 선반에 늘어선 텀블러가 요동치고, 4번 집 벽난로 선반 위의 휴대용 회중시계가 들썩들썩한다. 길 건너편 집 침대 옆 테이블에 놓아둔 귀걸이는 바닥을 구른다. 거리에서 한참 아래에 있는 집의 한 여성은 침대에서 돌아눕는다. 아기가 잠에서 깨 일련의 막대로 이루어진 흉곽 모양 아기용 침대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이게 뭐지, 다들 어디에 있지, 그러다 누군가 와달라고 울부짖는다. 지금 와주세요, 제발. - P157

상승하는 열기로 이미 무거워지기 시작했어도 이 시간대의 공기는 차분하다. 그레타는 둘 사이의 공기를 더듬어 나아가 여자의 팔에, 목에, 그리고 온몸에 가 닿는다. 에이바가 품 안에 있다. 셋째 아이, 항상 놀라움을 주는 존재, 막내 아기, 골칫거리. 둘 사이를 갈라놓던 그 모든 공간과 거리가 사라지고 무너져 내렸다. 이건 에이바고 에이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러 가지가 놀랍지만 에이바의 키가 유독 놀랍다. 그레타는 줄곧 에이바가 자신과 비슷한 몸집이라고 생각해왔다—조그맣고 작은 체격,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표현하길 원하든. 하지만 이제 에이바의 키는 그레타보다 족히 몇 인치는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P162

지난밤 늦은 시각, 클레어와 다퉜다. 일련의 끔찍한 다툼 중 하나, 알아채지 못했던 절벽에 다다른 것처럼 다가오는지도 몰랐던 끝이 예고도 없이 눈앞에 들이닥치는 다툼이었다. 깊은 바다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 바위를 때리는 파도의 굉음이 들리는 다툼이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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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모든 것이 너무도 익숙하면 때로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구별해내기 어렵다. 어떤 노래가 친숙해지면 그 노래의 개별 음정을 듣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 P12

땀이 이마와 머리의 경계를 따라, 척추를 따라 배어 나온다. 두 발은 발작적으로 땅 위를 움직이고, 이런 생각이 처음으로 든 것은 아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궁금해진다. 일터에서 집으로, 가족과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가는 한 아버지. 아니면 너무 많은 책과 너무 많은 보고 서를 넣은 서류 가방을 들고 시간에 쫓긴 채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는 한 남자. 청년기를 지난, 정수리 부근의 머리카락이 아주 살짝 가늘어지고, 밑창을 교체할 때가 된 신발을 신고, 꿰매야 할 양말을 신은 한 사람. 남자는 이 불볕더위에 고통받는다. - P23

그는 현관문을 열고 매트에 발을 디디며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소리친다. "안녕! 나 왔어!"
그는 잠시, 정확히 자신의 관념 속 인물이 된다. 일터에서 돌아와 현관에서 이제 막 가족을 맞이할 남자. 세상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과 그가 사적으로 인지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분열도 없다.
"아무도 없어?" 그가 다시 외친다.
집은 고요하기만 하다. - P25

아빠와 아들은 잠깐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는 궁금하다. 일터를 나서면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찌는 듯한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이 타는 듯한 도시를 가로질러 오면서 그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내내 두려워했다는 점을 휴이가 아는지 궁금하다. 집에 도착하면 아내는 주방에서 향긋하고 영양이 풍부한 무언가를 아이들에게 차려주고, 아이들은 깨끗하게 제대로 차려입은 채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를, 이 가망 없는 희망을 품어왔다는 것을 이 아이는 알까? 이 아이는 최근 벌어지는 일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까? - P27

그는, 다시 그리고 잠시, 바로 그 관념 속의 사람이 된다. 부엌에 있는 한 남자, 딸을 공중으로 안아 올리는 남자. 그는 나무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냄비를 내려놓는다. 팔로 아이를 감싼다. 충만해진다—무엇에? 사랑보다, 애정보다 더한 무언가. 너무 예리하고 원초적이어서 동물의 본능과도 같다. 잠시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이 애를 잡아먹는 일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딸을 먹어버리고 싶다. 목의 주름에서 시작해서 진주처럼 빛나는 부드러운 팔까지.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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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는 것은 그 공원 전체의 분위기에 대한 것입니다. 암흑한 동굴을 이면에 두고 있으면서도 앞쪽으로 돌아서면 항상 명랑하고 즐거운 얼굴 표정을 하고 호기심에 찬 대담한 눈빛을 반짝이며 밤이면 밤마다 짙은 화장을 자랑하는 공원 전체의 정취를 말하는 것입니다. 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웃음도 눈물도 모두 한데 녹여내고 점점 더 교묘한 현혹의 빛을 내뿜고 현란한 색채가 넘쳐 나는 거대한 공원의 바다와도 같은 장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 P44

"당신처럼 성실하고 온화한 아가씨가 이 무시무시한 거리 모습을 어떻게 태연히 바라볼 수 있지?"
나는 여러 번 그녀에게 물어보려다가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그런 질문을 했다면 그녀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내가 태연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서 받은 감화 덕분이에요."라고 할까요. "내게는 당신이라는 연인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의 암로에 들어선 자에게는 두려움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답니다"라고 할까요.—그렇습니다. 그녀는 분명 그런 대답을 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그럴 만큼 열렬하게 나를 믿고, 그 정도로 순수하게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 P57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의 영혼 저 깊은 곳에는 정도 차이는 있겠으나 내가 느끼는 바와 똑같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내가 꿈꾸는 바와 똑같은 꿈을 꾸는 소질이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나처럼 그것을 의식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는가, 라는 점만 서로 다른 것이지요.—나는 딱히 별다를 것도 없이 그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 P67

"돈이 많다는 것은 물론 행복한 일이지만 자칫하면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낳게 돼. 부는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마는 거야."
"아니, 그럴 걱정은 없어. 부자가 타락하는 것은 그 재산을 더 불려 보겠다고 사업에 뛰어들 때뿐이지. 돈이 많은 자는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면 항상 행복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별반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었습니다. - P89

"우스꽝스럽게 느끼지는 않더라도 어떤 종류의 쾌감을 갖는 것은 확실하지. 오히려 그림으로 하는 게 더 재미있을 정도야. 애초에 예술적 쾌감을 비애라느니 우스꽝스러움 이라느니 혹은 환희라느니 하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부터가 잘못되었어. 세상에 순수한 비애나 우스꽝스러움이나 혹은 환희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없거든."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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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갈색, 황갈색, 적갈색, 노란색이다. 공들여 배합한 색조 때문에 고풍스러운 분위기인 이곳에서 쿠션의 생생한 오렌지빛이나 장정한 책들 사이로 얼룩덜룩한 책 몇 권이 밝은 점처럼 도드라질 것이다. 너울지며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 아래 장미꽃 화병이 놓여 있어도 거실은 조금 침울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 방은 저녁에 더 어울리는 공간일 것이다. 겨울이면, 젖힌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몇 줄기 빛을 통해 책장 구석이라든가 음반꽂이, 책상, 소파 테이블, 거울에 어린 희미한 모습들이 보일 것이다. 길이 잘 든 나무, 묵직한 느낌의 화려한 비단, 크리스털 조각, 부드러운 가죽, 모든 사물이 빛을 발하는, 사방이 어둠에 잠긴 이 방은 분명 평화의 항구이자 행복의 땅일 것이다. - P15

책으로 둘러싸인 벽들 사이에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물들에 둘러싸여, 멋지고 단순하며 감미롭게 빛나는 사물들 사이에서, 삶이 언제까지나 조화롭게 흘러가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삶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홀연히 모험을 찾아 나서기도 할 것이다. 어떤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원한이나 쓰라림, 질투를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소유와 욕망은 언제나 모든 지점에서 일치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균형을 행복이라 부를 것이고, 얽매이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고상하게 행복을 지키고, 그들이 나누는 삶의 매 순간 이를 발견할 줄 알 것이다. - P20

파리 전체가 그들에게는 영원한 유혹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취기 어린 상태로 그 유혹에 자신들을 내맡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빠져들고는 했다. 하지만 욕망의 끝은 냉혹하게 꽉 막혀 있었다. 커져만 가는 불가능한 꿈은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 P23

이상하리만치 달콤하게 빠져드는 부푼 몽상과 달리 실제로 그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객관적 필요와 재정 상태의 절충을 꾀한 어떤 이성적 계획도 끼어 들지 못했다. 무한한 욕망만이 그들을 압도했다. - P26

그들은 안락한 가운데 미를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그들은 목청을 높이며 감탄하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부자가 아니라는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 몸에 배서 너무나 당연한 것, 몸의 행복에 따르기 마련인, 드러나지 않고 내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그들에게 부족했다. 그들의 즐거움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치라 부르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돈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富)의 기호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부를 사랑했다. - P28

그들이 좇는 길, 새롭게 눈뜬 가치, 전망, 욕망, 야망, 이 모든 것이 종종 어쩌지 못할 만큼 공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태하거나 모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삶, 암울함 이상으로 알 수 없는 불안의 근원이었다. 무엇인가 입을 무한히 크게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종종 혼잣말로 어쩌면 삶이 매력과 안락함, 미국식 코미디나 솔 바스의 영화 엔딩 크래딧처럼 환상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에서 경이롭고 눈부신 장면들, 가령 스키 자국 두 줄이 선명히 남은 새하얀 눈밭이라든가 푸른 바다, 태양, 푸른 언덕이 펼쳐지고 벽난로에 불꽃이 일렁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거침없이 펼쳐진 고속도로, 값비싼 자가용, 호사스러운 집이 그들을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 P39

온종일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놀란 낯으로 지레 겁을 집어먹기도 했지만, 감히 그 같은 심경은 입에 담지도 못했다. 앞으로 자신들의 운명과 존재 이유, 행동을 결정지을 유치한 맹목적 추구 앞에서 이를 감히 제대로 응시하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욕망의 크기에 압도당해, 눈앞에 펼쳐진 부와 주어진 풍요로움에 질식해 갔다. - P39

그들은 테이블에 죽치고 앉았다. 자신에 대해, 세상, 온갖 것, 별 볼 일 없는 것, 취미, 야망에 대해 떠들어댔다. 어느 도시나 있기 마련인 편안한 바를 찾아 내서 새벽 1시까지 위스키와 브랜디, 진 토닉을 앞에 두고 저버린 사랑, 욕망, 여행, 거부와 열정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레퍼토리가 똑같은 것에 대해 조금도 놀라워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 P42

그들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갈망하는 것은 어떤 법칙에 가까웠다.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법칙이었고, 광고, 잡지, 진열장, 거리의 볼거리, 소위 문화 상품이라 불리는 총체가 이 법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가끔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었다. - P47

이들이 갖는 수치심과 오만함은 같은 성격이어서 같은 환멸, 같은 분노를 내포하고 있었다. 온종일 사방에서 슬로건, 포스터, 네온사인, 불 밝힌 진열장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신들이 늘 사다리의 아래에 있다고, 언제나 사다리의 너무 낮은 곳에 있다고 세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한술 더 떠, 가장 나쁜 몫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P47

그들의 어린 시절 기억은 엇비슷했다. 그들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이 닮아 있는 것처럼. 집안 배경 없이 더디게 일어서는 것이나 자신들이 선택한 미래가 비슷한 것처럼. - P48

그들은 한창때였다. 편안했다. 그들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스스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거리를 둘 줄 알았다. 여유가 있었고, 아니 적어도 그러려고 했다. 그들은 유머가 있었다. 영리했다. - P48

그들은 자유에 탐닉했다. 세상 전체가 손안에 있는 듯했다. 그들이 느끼는 갈증의 리듬에 충실했고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열정은 끝이 없었다. 밤새도록 걷고, 달음질치고, 춤추며, 노래할 수도 있었다. - P51

그들은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 담배를 끊겠다든가 술을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 또는 돈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심이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 잊지 못할 취기 어린 날의 기억에는 무엇인가 아련한 알 수 없는 흥분과 모호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한잔하러 간 일이 근본적인 몰이해와 끈질기게 따라붙는 분노,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을 듯한 단단한 모순을 자극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 P51

어떻게 보면, 그들은 요리하는 것은 거부하고 눈에 띄는 화려함만을 숭배했다. 그들은 시각적인 화려함과 풍성함을 좋아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기껏 형편없는 요리를 선보이는 것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거부하는 세계는 프라이팬과 냄비, 식칼, 중국 요리, 화덕의 세계였다. - P53

오랫동안 고대해 온 영화들,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이라 평이 나 있는 영화들, 마침내 이런 영화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상영 첫날 만원인 관객들 틈에서 만났다. 스크린에 불이 밝혀지고 기분 좋은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컬러는 바랬고, 화면은 끊겼으며, 여주인공들은 보기 싫을 정도로 늙어 있었다. 그들은 나왔다. 슬펐다. 상상하던 영화가 아니었다. 그들 각자가 상상하던 완전한 영화가 아니었다. 영원히 싫증을 내지 않으리라 생각하던 완벽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들이 만들고 싶어하던 그 영화. 아니, 더 은밀히,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하던 그 영화가 아니었다. - P55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신호들을 더 잘 알아채고, 때로 조장할 줄도 아는 것 같았다. 귀와 손가락, 혀가 마치 매복 상태로 조만간 촉발될 이 달콤한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평온함과 영원함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는 어떤 긴장도 끼어들지 못했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모든 것이 감미롭게 천천히 흘러갔다. 강렬한 기쁨이 일시적이고 불안 정한 것들을 고양시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조화로운 상태가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사소한 불협화음, 대수롭지 않은 주저의 순간들, 무례한 태도만으로도 그들의 행복은 무너져 내렸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일종의 계약, 그들이 대가를 지불했던 무엇, 불안정하고 딱한 무엇인가, 잠깐의 행복한 순간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더 위험하고 더 불확실해 보이는 일상과 삶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P59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러함을 아는 것은 아무 소용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처지였다. 일과 자유의 대립 관계를 엄격히 따지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직장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 P62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제롬과 실비는 이런 종류의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 사실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너무 가난해서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나은 집에 살면서 조금 적게 일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부자여서 이런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 P63

자신들이 가장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자위했다. 아마 옳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타인의 불행을 지워버림으로써 본인의 불행을 확대해 보여 주기 마련이다. 그들은 별 볼 일 없었다. 겨우 벌고, 프리랜서로 일하며 뜬구름 잡는 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의미에서 세월이 그들 편인 것은 사실이었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미지의 세상이 온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보잘것없는 위안이었다. - P65

그들 사이에 돈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벽이었다. 매번 부딪히게 되는 일종의 범퍼 같았다. 가난보다 더 끔찍한 것은 궁색함, 옹졸함, 얄팍함이었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기적이나 사상누각에 세운 어리석은 꿈 외에 다른 출구가 없어 보였다. 미래 없는 꽉 막힌 삶으로 암울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았다. 침몰하는 느낌이었다. - P67

사회의 서열 관계를 중오하기로 작정했다. 기적으로라도 해결책은 세상이나 역사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롤러 코스터 같은 삶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그들의 기질에 맞는 것이기도 했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그들의 삶이 가장 불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쉽게 넘겨 버렸다. - P69

변한 것이 있다면,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너무나 모호한 것이었다. 그들의 남다른 삶의 방식, 몽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들은 지쳤다. 그들은 늙었다, 그랬다. 어떤 때는 자신들이 인생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삶이 위태롭고 덧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치 채워지지 않은 욕망, 불완전한 기쁨, 잃어버린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다림과 궁색함, 편협함이 자신들을 마모시켜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 P78

가끔은 모든 것이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계속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 될 일이었다. 삶이 그들을 달래줄 것이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변화도 없고 그들을 구속하는 법도 없이,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낮과 밤이 조화롭게 이어지는 가운데, 거의 미미한 변화만 있을 뿐, 같은 주제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행복이 계속될 것이다. 어떤 동요, 비극적인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사건도 흔들어놓지 못할 영원한 감미로움을 맛볼 것이다. - P78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 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 - P79

그들은 떠났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만원인 지하철, 짧기만 한 저녁, 치통처럼 따라붙는 통증과 불확실성의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그들의 삶은 팽팽한 줄 위에서 끊임없이 춤춰야 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고, 미래는 꽉 막혀 있었다. 극심한 공허감, 기댈 곳도 없으면서 끝을 모르는 비참한 욕망에 시달렸다. 그들은 소진된 느낌이었다. 은둔하기 위해, 잊기 위해, 자신들을 달래기 위해 떠났다. - P106

이렇게 한 주 한 주가 흘러갔다. 거의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4주가 한 달을 만들었다. 달들은 대부분이 엇비슷했다. 낮이 짧아지는가 싶더니 점점 길어져 갔다. 겨울은 축축하고 추웠다. 그들의 인생이 흘러갔다. - P114

그들의 고독은 절대적이었다. - P115

그들은 이 세상을 박탈당했다. 세상에 몸담고 있지 않았다. 세상에 속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속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엄격한 규율이 그들을 배척하는 듯했다. 어디든 가고 싶은대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영원히 낯선 사람, 이방인으로 남으리라. - P116

기쁨도 슬픔도 심지어 권태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인지, 과연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실망스러운 질문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만족도 얻지 못했지만, 이따금 혼란스럽고 모호하게나마 이곳에 서의 삶이 분수에 맞고, 심지어 역설적이게도 이런 삶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 P118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요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 - P119

예전에, 이 예전이라는 것이 세월에 따라 하루하루 후퇴하는 시간이어서 마치 그들의 이전 삶이 전설이나, 비현실 혹은 모호함 속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그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 P126

그리고? 무엇을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 P126

"만일 우리가 돌아간다면···." 누군가 말을 꺼낼 것이다.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가겠지···." 다른 한 명이 답할 것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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