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두려운 말이었다. 불가사의한 단어, 운명의 암호를 공연히 말해 버렸다. 간단히. 허공에. 하지만 낱말은 이미 날아갔고, 구체화되었다. 그녀는 사랑했다. 그의 다리, 팔, 냄새, 얼굴, 직관을 사랑했다. 일하는 순간에 그에게 지시했던 그 직관을, 은밀한 방탕의 오솔길로 인도했던 바로 그 직관을. - P145
그녀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았다. 레나는 결코 자신에게 히스테리를 허용한 적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이로운 물질이라는 걸 알았어도. 속에 담아 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쏟아붓는 게 더 낫다 해도. 하지만 다른 누구에게 쏟아부을 수 있을까? 그러니 속에 담아 둘 수밖에 없다. 그래도 속에서 아예 자리를 잡고 살지는 못할 터였다. 고통이 육체보다 크기 때문에. - P147
지금 레나는 호텔 거울로, 과장되게 큰 눈을 가진 여자의 타원형 얼굴을 삼각형으로 보고 있다. 뭔가 슬픔이 보태졌다. 거무스름했다. 초췌했다. 하지만 가을의 나뭇잎도 아름답다. 그것도 역시 꽃병에 꽂아 놓을 수 있고, 집 안을 장식할 수 있다. 삶은 계속될 것이다. - P152
항의에 눈이 먼 그가 맨발로 서 있었다. 그들은 화해할 줄 몰랐다. 어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이 자기편으로 펼쳐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삶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삶의 모서리들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때 안톤이 도전을 한 것이다. 삶이 그를 무시한다면 그도 삶을 무시할 거라고. 그래서 눈 위를 맨발로 걸어가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 P157
가슴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지독하게 아플 때나 욕망이 절단될 때는 힘차게 손을 들어 도끼로 내리쳐라! 그러면 통증으로부터 감각을 잃을 것이다. 통증의 쇼크로부터. 최면제가 필요하다. 꿈이 필요하다. 서둘러라. 더욱 가벼워질 테니. 결코 아프지 않을 테니. 그 후에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결코 아 · 무 · 것 · 도··· - P165
레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젊은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늙은 그녀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 앞에는 충분히 긴 인생의 한 자락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가 따라가야만 했던 삶이. - P168
레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곰팡이 낀 저 사람 때문에 그녀가 정말 세상을 떠나려고 했던 걸까? 저기 있는 바로 저 사람 때문에? 그건 단지 외로움의 고통과 사랑의 갈증이었다. 문제는 거기 있었다. 두려움과 열망.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는 단지 순회공연을 하는 배우였을 뿐이다. 떠나고, 무대에 서고, 자신의 예술을 보여 주고, 돌아가는 것. 그리고 또다시 떠나고, 다시 출연하고··· 그게 그의 일이다. - P169
그의 이름은 닉이다. 나이는 서른다섯이다. 그는 젊고 매력 있고 재능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쓸모가 없다. 아름다움, 지성, 재능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 터이다. 굴뚝의 연기처럼. 그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P173
젊은 시절 그는 술꾼이었고, 도락가였고, 대식가였고, 싸움꾼이었다. 게다가 천재적인 사업가였다. 사업계의 모차르트였다. 지금은 다 흘러가 버린 옛이야기다. 그는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다. 중증의 경화증을 앓고 있는 환자다. 깨끗한 식이요법과 미네랄워터만으로 연명한다. 이제는 싸움에 대해서나 여자에 대해서 말할 수도 없다. 일선에서도 물러났다. 권태롭다. 무엇 때문일까? 자손들에게 재물을 늘려주는 일 때문일까? 재물이라면 남아 있는 것으로도 자손들이 인생을 네 배나 살 만큼 충분하다. 대체 무엇일까, 그 모두를 대신하는 것이? 공허다. 슬픔이다.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증오다. 그 대신 남아서 살아 가는 자들에 대한. - P175
소콜로프 역시 닉이 마음에 들었다. 뱀처럼 지혜로운 노인은 금세 모든 걸 꿰뚫어 보았다. 깨지기 쉬운 영혼을, 배우의 허약한 본성을, 결핍을, 극빈 생활을, 부드러운 마음 을, 그리고 삶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노인은 상처 받기 쉬운 그런 사람을 가엾게 여겼다. 하지만 가엾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런 사람을 원했다. 소콜로프는 조금씩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는 아무것도 아까울 게 없었다. 그의 등 뒤로 죄다 타 버린 도시만 남는다 해도, 존재하던 운명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 P177
소콜로프의 친척들이 무리 지어 배웅을 나왔다. 하지만 그들 서로는 이곳 공항에서조차 서로에게 염증을 내고 있음이 역력했다. 이는 오랜 세월 가까이 알고 지냈으나 정신적으로는 전혀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염증이었다. - P178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지독하게 고생을 했다네. 부자가 되려고. 전쟁이나 다름없었지. 그 전쟁에 내 온 젊음을 바쳤네. 나는 그게 안타까워. 자네가 내 곁에서 나 대신 내 젊음을 살아 주길 바라네." - P180
율리야는 아름답고 영리하고 상냥했다. 그녀는 진짜 사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모든 외국인과 거의 모든 러시아인이 사랑의 조건을 내걸고 그녀에게 구애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율리야가 기다리는 사랑이 아니었다. 부자들은 돈으로, 강한 사람들은 힘으로, 똑똑한 사람들은 지성으로, 바텐더 보랴는 돈과 힘과 지성을 모두 한꺼번에 내 놓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뭔가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령, 심장이 아찔하게 정신을 잃게 할 그 무엇. 그러다가 다시 다른 리듬으로 박동하기 시작할 수 있는 그런 것. 그래서 이미 더는 예전의 그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그런 뭔가를 말이다. - P182
"슬픈 일과 웃기는 일은 나란히 존재하는 거라네." - P183
미스터 소콜로프는 인생을 아는 사람이었다. 돈이 어떻게 사람의 목을 조여 질식시킬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목을 잡아 비틀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바로 돈과 늙음이다. - P188
영국 속담에 ‘멋진 싸움을 위해서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랑도 이와 같다. 사랑도 두 사람이 필요하다. - P189
백발의 조그만 노인이 사지를 쭉 뻗고 누웠다. 아주 편안한 모습으로. 마치 한평생의 중요한 과업을 완수하기라도 한 것처럼. 닉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인간의 삶이 가엾었다. 자신이 불쌍했다. 엄마가 가엾고, 자신의 사랑이 가엾었다. 닉은 한 번도 그렇게 큰 소리로 그토록 애통하게 울어 본 적이 없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오래된 저택과 소나무 가지들만이 그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 P192
"다 필요 없어요." "필요 없는 사람은 날세. 나한테는 이미 필요 없게 돼 버렸지. 그런데 자네는 모든 게 필요하잖나. 돈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하지. 노예가 될 거라면 사랑은 단념하게. 사랑은 자유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거든. 그런데 자네는 노예잖나." - P193
소콜로프의 마지막 소원을 수행하는 일만 남았다. 풀잎을 손가락에 비벼서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대 주는 것. 그러고 나서 집까지 데려다 주고 돈을 받고 나면 끝이다. 끝. 바로 그때 하늘에서 종달새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전에 보았던 그 종달새인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사실 하늘은 어디를 가나 다 같은 하늘이지 않은가. 닉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재잘대는 한 점을 바라보았다. 그는 풀을 뜯기 위해 몸을 구부릴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뭔가 끝나고 말았다. 알 수 없는 뭔가가 내부에서 다 소진돼 버렸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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