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론자로 사는 것, 모든 것의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며 사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삶이다. 어떤 변수도 없고 옷을 여러 벌 갈아입는 연극도 없는 단조로운 삶이다. 행복은 일시적이고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라는 식의 단조롭고 천편일률적인 삶이다. 세상은 거짓말쟁이로 넘쳐나고 죽음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죽음이 사실은 죽음이 아니라면? 단지 다른 시간으로 이동하는 것뿐이라면? 정말로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사실 거짓말도 진실의 부재가 아니잖은가. 거짓말은 사실과 다른 진실 아닌가. - P296

"군더더기가 없는 작가는 누군데?"
"푸슈킨이요. 푸슈킨은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만 작품에 썼죠."
안나는 비소츠키의 말이 떠올랐다. "아픈 사람은 더 빨리 큰다." 자연은 누군가의 인생 프로그램이 짧다는 것을 알면 그 안에 잠재된 모든 능력을 서둘러서 표출해 내고 최대한 빨리 그가 가진 능력을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환자들이 천재에 가깝게 똑똑한지도 모른다. - P300

루스탐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눈썹도 떨리고 입술도 떨렸다. 그의 인생에도 한밤중에 발견한 작은 등불 같은 희망이 생겼다. 이 희망을 만들어 준 사람은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던 안나라는 여자였다. 루스탐은 그대로 서서 계속 울었다. 안나도 그가 안쓰러웠고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졌다.
한편 소년은 시선을 돌렸다. 멜로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나약함을 무시하는 강인한 초인이 되고 싶었다. 드라마 밖과 위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존재, 전지적 관찰자처럼. 소년은 모르긴 몰라도 니체의 책을 많이 읽은 게 분명했다. - P301

마리나는 늘 그랬듯이 남의 영역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하긴 그 나이에 왜 힘들게 자기 습관을 바꿔야 하는가? 아이가 신선한 공기 좀 마시고 좋은 음식 좀 먹는 게 어떻단 말인가? 게다가 이 집은 모든 것이 넘쳐났다. 어차피 다 먹지 못해서 절반은 개밥으로 주었다. 둘이서 아웅다웅하느니 이제 막 성장하는 작은 생명체에게 정성을 쏟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꽃에 물을 주듯이 말이다. - P305

마리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구덩이에서 위로 올라가며 손녀까지 꺼내고 있었다. 예의 같은 걸 지킬 여유조차 없었다. 구덩이에 빠져서 위로 기어 올라가는 사람에게 양심이나 명예 따위는 없다. 위로 올라갈 생각만 하는 것이다. 안나는 모두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전에서 석유를 시추하듯 사람들은 그녀를 이용할 뿐이었다. 하지만 유전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싶기도 했다. 버려진 시추 구멍보다 더 슬픈 광경은 없으니까. - P3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