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그레이니어는 사방에 그 중국인이 있는 것 같았다. 길에 서 있는 중국인. 숲속의 중국인. 양손을 밧줄처럼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걷고 있는 중국인. 개울에서 거미처럼 사사삭 기어 나오는 중국인. - P11

기차가 도착하는 지점에는 대장이 당나귀라고 부르는 거대한 엔진이 웅크리고 있었다. 거대한 무쇠 드럼통 두 개를 붙여놓은 모양의 이 엔진에서 한쪽 드럼통은 케이블을 풀어내고 다른 한쪽은 케이블을 감아들이면서 통나무를 끌어가는 한편, 동시에 고리를 반대편으로 보내주면 그 쪽의 초커가 다음 통나무를 고리에 끼웠다. 이 엔진은 나무를 태우는 구식 증기엔진으로, 쿵쿵, 웅웅, 끙끙거리는 소리와 함께 증기를 폭포처럼 쏟아냈다. 길을 오가는 말들은 마치 침묵 속에서 거대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증기 소리와 기계 소리에 그들이 내는 소리가 모두 지워진 탓이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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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없다, 다만 시간의 몰려옴이 있을 뿐. 설명할 수 없고, 공허하며, 무형의 시간, 그녀는 그것을 향해 움직이도록 기대될 뿐이다. 앞쪽으로. 앞으로. 그리고 어떻게든 현재를 지나쳐버린다. 망각의 은총으로 스스로를 구제하고 있는 그 현재.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었을까. 현재의 가시성이 없이. - P152

그녀는 그 전날과 같은 장소에 앉아 있다. 첫날과 같이. 그녀를 보려고 몸을 왼쪽으로 돌린다, 그녀는 혼자다, 몸은 부동. 그녀의 손은 그녀의 소지품들과 함께 무릎 위에 마주 잡고 있다. 그녀는 인공으로 모조된 밤의 고요한 매달림 속에서 떠돌고 있다 움직이지 않기도 하고 바람이 일면 동등하게 흔들리는 불꽃처럼. 그늘과 어둠 속에서 지나간 것들 속에 머물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눈은 먼 곳을 향해 뜨고 있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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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없다. 또 다른 전쟁으로부터 또 다른 피난처를 향하는 것 외에는. 목적지를 향한 여러 세대의 교체와 역사의 행로에는 많은 기만들이 있다. - P92

타액을 분비하는 말들
타액은 말들을 분비한다
말들의 분비는 액체로 흐르고
말들을 침 흘리게 한다. - P142

타액을 분비하는 말들
타액은 말들을 분비한다
말들의 분비는 액체형으로 흐르고
말들을 분비한다. - P143

순백함의 이후로는 언제나.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 있다, 하얗게,
능가할 수 없는, 색깔의 부재, 절대적, 지극히 순수하다, 이를 수 없도록 순수하다.
만약 그 자체의 하얀 그림자—수의안에서, 모든 얼룩이
사라진다면, 드리웠던 모든 과거 모든 기억이 떠난다면, 이 말들의 사면과 힘을 통하여.
덮어씌우고. 장막처럼 두르고. 옷을 입히고. 자루집에 넣고. 수의를 입혀.
덧씌우고. 덧입히고. 막을 치고.
숨긴다. 급습한다.
변장. 은닉. 가면. 베일
불분명. 모호. 가리개. 침식. 은밀.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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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뒤 윌리엄 스토너는 그날 조시아 클레어몬트의 집에서 오후에서 이른 저녁까지 보내며 자신이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분위기가 공식적이었고 기억도 흐릿해서, 현관홀의 계단 벽에 걸려 있던 색 바랜 벽걸이 같았다. - P68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도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처음으로 그녀와 둘이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해 12월 그날 저녁의 한 시간 반 동안 한 것만큼 그녀가 자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자신과 그녀가 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그런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는 또한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확신했다. - P75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천장이 높은 전시관들을 돌아다녔다. 그림에 반사된 빛이 풍요롭고 은은했다. 그 조용함, 그 따스함, 오래된 그림들과 조각상들 덕분에 시간을 초월한 듯한 그 분위기 속에서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는 섬세한 키다리 아가씨를 향해 사랑이 마구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마음속에서 솟아오른 조용한 열정은 따스했으며, 관능적이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았다. 사방에 걸린 그림에서 솟아나온 색깔들과 같았다. - P98

슬론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의 동료들과 이 도시 사람들 몇 명만이 좁은 구덩이 주위에 모여 서서 경외감, 당혹감, 존경심을 한꺼번에 느끼며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해 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울어준 사람은 바로 스토너였다. 이제 완전히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망자의 고독이 그 울음으로 조금 덜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운 것이 자신 때문인지, 슬론과 함께 보낸 젊은 시절이 함께 땅속에 묻히고 있기 때문인지, 그가 사랑했던 저 마르고 가엾은 사람 때문인지는 스토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P125

스토너는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홀리스 로맥스에게 끌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로맥스의 거만한 태도, 달변, 유쾌한 신랄함 속에서 스토너는 비록 조금 일그러지기는 했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데이브와 그랬던 것처럼 로맥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런 마음을 스스로 인정한 뒤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 P130

윌리엄 스토너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에게 뜻밖의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로맥스가 일종의 변화를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을 통해 알게 되는 직관적인 깨달음 같은 것. 스토너 자신도 예전에 아처 슬론의 강의를 들으며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로맥스는 일찌감치 혼자서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통해 얻은 지식이 스토너의 경우보다 더욱더 그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두 사람은 비슷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또는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그 사실을 시인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 P137

이디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빛의 장난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열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끈 뒤 그녀 옆에 누웠다. - P139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 P140

처음에 그는 자신의 책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것을 양손으로 들고 아무 장식이 없는 표지를 쓰다듬다가 책장을 펼쳤다. 섬세하고 활기찬 아이 같았다. 그는 책으로 완성된 자신의 원고를 다시 읽고 나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 책을 보는 일에 진력이 났다. 하지만 자신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경이가 느껴졌으며, 자신이 그토록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일에 무모하게 나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 P142

1927년 봄, 어느 저녁에 윌리엄 스토너는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는 꽃들의 향기가 촉촉하고 따스한 공기에 섞여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귀뚜라미들이 노래를 부르고, 저 멀리에서는 자동차 한 대가 외로이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적막한 어둠을 향해 반항하듯 커다랗게 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새로운 계절의 나른함에 사로잡혀 천천히 걸었다. 덤불과 나무의 그늘 속에서 밝게 고개를 내민 자그마한 초록색 봉오리들이 신기했다. - P144

분빌은 그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새로운 건물이 몇 개 들어서고 옛날에 있던 건물 몇 채가 철거되었지만, 살풍경하고 보잘것없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지금도 언제든 없애버릴 수 있는 임시 거처처럼 보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대부분의 길이 포장되었는데도 흙먼지가 엷은 안개처럼 허공에 떠 있고, 강철바퀴를 단 마차 몇 대가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강철바퀴가 도로와 도로 턱의 콘크리트 포장을 긁을 때면 가끔 불꽃이 튀었다. 고향집도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옛날보다 더 건조하고 칙칙해진 것 같기는 했다. 미늘벽판자로 된 벽에는 페인트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고, 역시 페인트칠이 되지 않은 포치 바닥도 맨살을 드러낸 땅을 향해 조금 더 주저앉아 있었다. - P146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옷을 입고 밭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해마다 일하던 곳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어렸을 때 보았던 아버지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마른 흙 한 덩이를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스러뜨리며 달빛 속에서 어둡게 보이는 흙 알갱이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바지에 손을 털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동이 틀 때까지. 땅 위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척박한 회색 땅이 그의 앞에 무한하게 펼쳐질 때까지. - P150

그는 […] 이 황량하고, 나무 하나 없는 작은 땅으로 시선을 돌려 평평한 땅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태어난 집,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보낸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해마다 땅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했다. 땅은 옛날과 다름없었다. 아니, 그때보다 조금 더 척박해지고, 소출도 조금 더 인색해진 것 같았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는 멍해졌다. […]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습기와 부패의 기운이 두 분의 시신이 담긴 소나무 상자를 서서히 침범해서 두 분의 몸을 건드리다가, 마침내 두 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먹어 치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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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학 공부도 농장 일을 도울 때처럼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이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했다. 1학년 말에 그의 평균성적은 B학점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는 점수가 더 낮지 않은 것을 기뻐했을 뿐, 점수가 더 높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을 배웠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점수가 그에게 의미하는 것은 2학년 때에도 1학년 때처럼 해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 P14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 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 - P20

윌리엄 스토너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주위 학생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간 뒤로도 몇 분 동안 그는 꼼짝 않고 앉아서 자기 앞의 좁은 바닥 널을 빤히 바라보았다. 바닥널은 그가 결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학생들의 부산한 발길에 닳아서 니스 칠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였다. 그는 그 바닥 위에 자신의 발을 미끄러뜨리며 나무가 신발 바닥에 닿는 거친 소리를 듣고, 가죽을 통해 느껴지는 거친 질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 P21

늦가을의 쌀쌀함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창백한 하늘 아래 둥글게 말리거나 비틀려 있는 나무들의 벌거벗은 가지가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서둘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 돌로 포장된 길에 신발이 또각또각 닿는 소리가 들리고, 추위에 발갛게 변한 채 가벼운 산들바람을 피해 수그린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 P21

밤에 다락방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방구석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램프의 불빛이 구석의 어둠에 맞서 너울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둠이 빛 속으로 모여들어 그가 읽던 책에 나오는 상상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다. 그러면 자신이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의 중에 아처 슬론이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과거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한데 모이고, 죽은 자들이 그의 앞에 되살아났다. 그렇게 과거와 망자가 현재의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오면 그는 순간적으로 아주 강렬한 환상을 보았다. 자신을 압축해서 집어삼킨 그 환상 속에서 그는 도망칠 길도,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트리스탄과 아름다운 이졸데가 그의 앞을 거닐었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강렬한 어둠 속에서 빙빙 돌았다. 헬레네와 총명한 파리스는 자신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 때문에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어둠 속에서 솟아올랐다. - P24

입술이 근질거리고 손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는 잠든 사람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지만, 주위의 것들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복도의 광택이 나는 나무 벽들을 스치듯이 지나갈 때는 나무의 온기와 유구한 세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갈 때는 자기 발밑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만 같은 차가운 대리석 계단에 감탄했다. 홀에서는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들 속에서 학생들 각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구분되고, 그들의 얼굴이 친밀하면서 동시에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제시 홀에서 오전 풍경 속으로 나갔다. 이제는 캠퍼스가 회색 풍경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캠퍼스가 그의 시선을 밖으로, 위로 이끌어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는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가능성을 바라보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 P30

윌리엄 스토너 앞에 놓인 장래는 밝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와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증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 P36

그는 학생의 입장으로 강의를 들을 때 해방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런 수업에서는 아처 슬론이 수업 중에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던 그날처럼, 그 자신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던 그날처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강의에 빠져들어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문학의 힘을 파악하려고 씨름 하면서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 점점 빠져나와, 자신이 읽은 밀턴의 시나 베이컨의 에세이나 벤 존슨의 희곡이 세상을 바꿔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작품들이 자신의 소재이기도 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상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P39

전쟁선포 후 처음 며칠 동안 스토너도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캠퍼스 내의 사람들 대부분을 사로잡은 혼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나 강사들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어도, 사실 그는 전쟁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쟁이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자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엄청난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쟁 때문에 대학의 일들이 중단된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의 내면에서 강렬한 애국심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독일인 들을 미워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 P47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나자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 P53

전에는 죽음을 문학적 사건 또는 불완전한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조용하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으로만 생각했다. 전장에서 터져 나오는 폭력이나 파열된 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처럼 다른 종류의 죽음이 존재하는 까닭, 그리고 그 차이가 지니는 의미가 궁금했다. - P57

그는 여름에 고전 작품과 중세시대의 라틴어 시를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죽음을 다룬 시들을 많이 읽었다. 로마의 서정시인들이 죽음을 삶의 현실로 편안하고 우아하게 받아들인 것에 다시 의아함을 느꼈다. 그들은 무(無)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살면서 즐겼던 풍요로움에 바치는 공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반면 기독교 시대에 라틴 전통에 따라 시를 쓰던 후세의 시인들 중 일부의 작품에는 거의 감춰지지 않은 증오, 쓰라림, 공포가 드러나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은 비록 모호한 약속이기는 하나 풍요롭고 황한 영생의 약속으로 그런 감정이 드러난 것을 보면, 마치 죽음과 영생의 약속이 삶을 망가뜨리는 못된 장난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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