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학 공부도 농장 일을 도울 때처럼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이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했다. 1학년 말에 그의 평균성적은 B학점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는 점수가 더 낮지 않은 것을 기뻐했을 뿐, 점수가 더 높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을 배웠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점수가 그에게 의미하는 것은 2학년 때에도 1학년 때처럼 해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 P14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 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 - P20
윌리엄 스토너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주위 학생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간 뒤로도 몇 분 동안 그는 꼼짝 않고 앉아서 자기 앞의 좁은 바닥 널을 빤히 바라보았다. 바닥널은 그가 결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학생들의 부산한 발길에 닳아서 니스 칠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였다. 그는 그 바닥 위에 자신의 발을 미끄러뜨리며 나무가 신발 바닥에 닿는 거친 소리를 듣고, 가죽을 통해 느껴지는 거친 질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 P21
늦가을의 쌀쌀함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창백한 하늘 아래 둥글게 말리거나 비틀려 있는 나무들의 벌거벗은 가지가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서둘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 돌로 포장된 길에 신발이 또각또각 닿는 소리가 들리고, 추위에 발갛게 변한 채 가벼운 산들바람을 피해 수그린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 P21
밤에 다락방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방구석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램프의 불빛이 구석의 어둠에 맞서 너울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둠이 빛 속으로 모여들어 그가 읽던 책에 나오는 상상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다. 그러면 자신이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의 중에 아처 슬론이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과거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한데 모이고, 죽은 자들이 그의 앞에 되살아났다. 그렇게 과거와 망자가 현재의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오면 그는 순간적으로 아주 강렬한 환상을 보았다. 자신을 압축해서 집어삼킨 그 환상 속에서 그는 도망칠 길도,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트리스탄과 아름다운 이졸데가 그의 앞을 거닐었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강렬한 어둠 속에서 빙빙 돌았다. 헬레네와 총명한 파리스는 자신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 때문에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어둠 속에서 솟아올랐다. - P24
입술이 근질거리고 손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는 잠든 사람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지만, 주위의 것들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복도의 광택이 나는 나무 벽들을 스치듯이 지나갈 때는 나무의 온기와 유구한 세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갈 때는 자기 발밑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만 같은 차가운 대리석 계단에 감탄했다. 홀에서는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들 속에서 학생들 각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구분되고, 그들의 얼굴이 친밀하면서 동시에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제시 홀에서 오전 풍경 속으로 나갔다. 이제는 캠퍼스가 회색 풍경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캠퍼스가 그의 시선을 밖으로, 위로 이끌어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는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가능성을 바라보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 P30
윌리엄 스토너 앞에 놓인 장래는 밝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와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증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 P36
그는 학생의 입장으로 강의를 들을 때 해방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런 수업에서는 아처 슬론이 수업 중에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던 그날처럼, 그 자신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던 그날처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강의에 빠져들어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문학의 힘을 파악하려고 씨름 하면서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 점점 빠져나와, 자신이 읽은 밀턴의 시나 베이컨의 에세이나 벤 존슨의 희곡이 세상을 바꿔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작품들이 자신의 소재이기도 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상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P39
전쟁선포 후 처음 며칠 동안 스토너도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캠퍼스 내의 사람들 대부분을 사로잡은 혼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나 강사들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어도, 사실 그는 전쟁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쟁이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자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엄청난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쟁 때문에 대학의 일들이 중단된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의 내면에서 강렬한 애국심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독일인 들을 미워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 P47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나자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 P53
전에는 죽음을 문학적 사건 또는 불완전한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조용하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으로만 생각했다. 전장에서 터져 나오는 폭력이나 파열된 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처럼 다른 종류의 죽음이 존재하는 까닭, 그리고 그 차이가 지니는 의미가 궁금했다. - P57
그는 여름에 고전 작품과 중세시대의 라틴어 시를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죽음을 다룬 시들을 많이 읽었다. 로마의 서정시인들이 죽음을 삶의 현실로 편안하고 우아하게 받아들인 것에 다시 의아함을 느꼈다. 그들은 무(無)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살면서 즐겼던 풍요로움에 바치는 공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반면 기독교 시대에 라틴 전통에 따라 시를 쓰던 후세의 시인들 중 일부의 작품에는 거의 감춰지지 않은 증오, 쓰라림, 공포가 드러나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은 비록 모호한 약속이기는 하나 풍요롭고 황한 영생의 약속으로 그런 감정이 드러난 것을 보면, 마치 죽음과 영생의 약속이 삶을 망가뜨리는 못된 장난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 P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