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나 회고록의 인물이 나처럼 생각하고 내가 믿는 바대로 행동하고 내가 행동하는 대로 행동할 때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 할 정도로 충격을 받거나 감격하진 않는다. 독서에 몰두할 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스토리가 전부다. 하지만 비평가가 그러했을 때는, 그러니까 나의 감정과 반응을 글로 풀어 줄 때는 언제나 크게 자극받고 흥분하고 감동했다. 아마도 비평가와 독자는 결국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은(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는다. 참고의 틀과 지형 또한 똑같이 공유한다. 우리가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게 비평문 읽기는 굉장히 친밀한 행동이었다. 나와 아주 먼 곳에 있는 타인이지만 같은 작품을 소비하고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보통 생각보다는 감정에 강렬하게 사로잡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감정이 나에게 설명되기를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기쁨이고 위안이었다. - P95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래서 작품에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는 편이 좋다. 당신은 당신이라는 사람과 당신의 느낌에 따라 반응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편이 좋다. - P100

"역사와 완전히 무관한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작고한 작가 랜들 케넌이 2019년 미시시피대학교 강연에서 던진 질문을 나는 항상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의 감정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겪은 순간과 상황, 그 이전에 우리를 스쳐 간 순간과 상황에 복무한다. 여기에 이 말을 더하고 싶다. 과연 어떤 반응, 어떤 의견, 어떤 비평이 역사와 완전히 무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역사와 이력의 힘에 종속되어 있고 그 역사가 형성한 조건 내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역사를 초월한 주체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 P101

도나 해러웨이는 객관성이란 "아무 근거도 없는 정복자의 시선"이고 "환상이나 신의 장난"이라고 말한 바 있다. - P102

향수나 개인적 경험은 작품의 위대함과 나쁜 행위의 정도를 비교하여 결과를 계산할 때 중요한 의미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그저 권위에 기대서 무언가를 훌륭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목격했듯이 권위 또한 이해관계나 경험에, 혹은 단순히 많은 이의 미학적 취향에 반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작품이 위대한 작품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우리 감정에 좌우된다. - P104

천재는 지배자인 반면 다른 얼굴도 갖고 있다. 그는 하인이다. 무엇의 하인일까? 자기 천재성의 하인이다. 그의 천재성은 그를 압도하는 힘이며, 천재성 앞에서 미약한 존재인 그는 그 천재성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힘의 방문을 받는데 그 힘은 뮤즈보다 더 세다. 근현대 천재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그의 안에서 솟아나는, 혹은 그가 하사받는 에너지를 최대한 자유자재로 수용하여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 P115

천재는 재료와 조력자를 통제하는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은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다.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게 고개를 숙이고 군말 없이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다. - P115

우리가 보고 싶은 천재는 자유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유를 표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 P119

『금색 공책 The Golden Notebook』에서 도리스 레싱은 말한다. "신성한 동물인 예술가는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정당화된다." 참고로 레싱은 이 문장을 호의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 P136

드보르는 스타를 "살아 있는 인간이 빚어내는 장엄한 광경"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는 아바타이고 "노동의 부산물을 극대화하여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사회적 노동의 결과를 구현하는 사람이다. 이 노동의 부산물은 그 노동을 초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데 궁극적인 목표란 권력과 휴가다." - P141

우리는 깨우친 존재들이라 생각하지만 정말로 우리 이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아졌을까? - P150

만약 언어가 행동에 영향을 주어야만 그 언어를 반대할 명목이 생긴다면, 정치인은 아니지만 기함할 만한 말을 내뱉는 성난 편견주의자들에게도 모두 면죄부를 주어야 하는 것일까? 반유대주의가 홀로코스트에 직접적으로 기여했을 때만 잘못된 것은 아니다. - P159

이런 종류의 사고는 조건부적 사고다. 우리가 X라는 장소의 Y라는 시간대에 있었다면 Z라는 행동을 했을 것이다. 문법에서는 이런 종류의 구문을 위한 용어도 존재하는데 가정법 과거완료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가정법 과거완료 시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적절한 조건에서는 일어났을 거라 가정한다." - P164

자유주의는 인간의 지속적인 발전을 믿는다. 자유주의의 핵심 사상은 선의 목적론으로 인간은 정의를 향해 나아간다고 믿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결국 우리는 더 좋아지고 나아지리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우리를 역사로부터 분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역사의 힘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역사는 저기 저 멀리, 혹은 우리 뒤에 아니면 우리 밑에 있다. 우리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역사의 정점에 올라와 있는 우리는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다. - P165

우리가 알 만큼 아는 사람이라는 믿음은 —도덕적 감정moral fealing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만—매우 편안한 소파와도 같다. 우리가 정의, 진보, 공정이라는 목적론을 갖고 변함없이 순수하게 나아간다는 생각은 굉장히 유혹적이다. 너무나 유혹적이라 우리의 사고와 나에 대한 인식을 흐린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선한 사고만을 모아 놓은 종합체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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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비난하려는 충동은 사실 정치적 충동이다. 앞서 나는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책임에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 확성기가 될 수도 있다. 편 가르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대 그들. 도덕적인 사람들 대 비도덕적인 사람들. 어떤 사람을 더 잘못되고 그릇된 사람으로 만들면서 어쩌면 우리를 더 옳은 사람, 괜찮은 사람,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 P60

첫 #미투 시즌 중에 피해자들은 서로에게서 힘을 얻어 괴물을 고발하기 시작했고, 광장에서 열리는 괴물 퍼레이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모르던 바는 아니었으나) 이 남자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 말인즉슨 피해자들도 어디에나 있었다. 그동안 침묵하여 보이지 않던 피해자를 생각하면 할수록 ‘괴물‘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이란 단어는 계속 괴물 당사자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이 카리스마 넘치는 매머드 같은 동물은 주변 모든 것은 물론 공기까지 빨아들일 것만 같다. 이 괴물의 이름을 열거하고 그들이 저지른 악행을 나열하는 것은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뭘까? 우리는 어디로 갈까? 혹시 이들을 괴물이라 부르고 이들의 괴물성에 대해 글을 쓰고 이들의 괴물 범죄를 묘사하면서 이 괴물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있지는 않을까? - P63

작품의 얼룩은 철학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용주의의 문제, 평범한 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얼룩이 그만큼 강력한 은유가 된다. 갑작스럽다. 영구적이다. 무엇보다 냉혹할 정도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얼룩은 단순히 그냥 일어나 버린다. 얼룩은 선택이 아니다. 얼룩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아니다.
얼룩 제거도 자발적이지 않다. - P66

나는 수치심에 대해서도 늘 궁금하다. 수치를 당할 위험은 인터넷 생활의 모든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수치는 팬과 몰락한 예술가 사이의 역학 관계에 어떤 역할을 할까. 수치심shame은 동사이자 명사이기도 하다. 내 안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이면서 내가 당신에게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예술가를 사랑하고 그들과 동일시할 때 그들이 얼룩지면 우리는 그들을 대신하여 수치심을 느낄까? 아니면 나와의 동일시를 끊어 버리고 싶어 그들에게 더 잔인하게 수치심을 주고 더 멀리 내쫓아 버릴까? 어쩌면 수치는 이 유사 사회 관계의 궁극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의 감정과 함께 무너진 우리의 감정은 인터넷 시대에 특화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취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새로운 지형 안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심지어 어떻게 느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 P85

나는 권위의 문제를 놓고 씨름했다.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긴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라는 사람이 대체 뭘 알아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쓴단 말인가? 물론 남들보다 영화를 많이 보긴 했다. 대학에서 영화 이론 수업을 두어 과목 들었는데 나처럼 검은색 옷을 많이 입는 학생은 응당 그래야 하는 줄 알아서였다. 하지만 신문사에 글 쓰는 사람으로 고용되었다. 나는 글을 제법 썼고 그래서 이렇게 남들이 탐내는 직업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절로 나에게 논평할 자격이 부여되는 걸까? 내 직업은 정확히 뭐지?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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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누가 더 명확하게 보고 있었던 걸까? 감독의 여성에 대한 태도와 감독의 과거 여자 문제에 영향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일까. 누군가는 그것을 특권이라고 부르지 않나? 자서전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혹은 프로젝트를 생기 있게 만드는 충동을 알아볼 수밖에—혹은 느낄 수밖에—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난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
자신들이 객관적이라 자부하는 관객들은 정말로 자기 생각만큼 객관적일까? - P56

권위가 말하길, 작품은 작가의 삶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 권위가 말하길, 자서전은 오류라고 한다. 권위는 작품이란 이상적인 상태(역사를 초월한 곳, 고산, 설원, 순수) 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권위는 창작자의 이력과 과거사를 알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을 무시하라 말한다. 권위는 그런 것들에 코웃음을 친다. 권위는 자서전과 역사와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위는 남성 제작자의 편을 든다. 관객이 아니다. - P58

나는 관객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관객은 무언가를 보고 읽고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은 관객이 된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서 관객에게 새로운 임무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현대사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불현듯 씁쓸한 깨달음이 스쳐 간 순간에 관객은 다른 무엇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괴물에 의해 새로운 분노를 계속 키우고 또 키우고 또 키워 가는 집단이 된 것이다. 관객은 괴물을 고발하는 드라마를 보며 전율을 느꼈다. - P59

우리가 도덕적 감정을 느낄 때 자아도취라는 감정은 결코 뒷자리에 오지 않는다. 윤리적 언어의 침대에 감정을 살포시 올려놓기로 하고 그렇게 하는 스스로를 칭찬한다. 우리는 감정에 지배되고 그 감정을 중심으로 언어를 배열한다. 우리의 미덕을 전달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이상하게도 짜릿하게 느껴진다. - P59

나는 인간의 조건이 자신 안의 사악함과 나약함을 은밀하게 의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왜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매혹되곤 할까? 우리 안에, 내 안의 무언가가 그 끔찍함에 공명하면서 내 안에 그 끔찍함이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문제의 괴물을 요란하게 비난하는 드라마에 짜릿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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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윌리엄 엠프슨은 인생이란 결국 분석으로 풀 수 없는 모순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라고 했다. - P20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나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디 앨런은 본인을 변명하기 위해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심장은 원하는 것을 원한다." 오든은 언제나 그렇듯이 같은 말을 조금 더 점잖게 했다. "우리 심장의 갈망은 나선형의 코르크따개와 같으니." 관객의 심장이 원하는 것 또한 나선형의 코르크따개 같다. 우리는 싫어해야 마땅한 사람들을 계속 사랑한다. 우리는 그 사랑을 스위치 끄듯이 꺼버리지 못한다. - P24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일들이 앞으로 몇 년간 더 가시화될 것이었다. 마치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 악당처럼 시야에 잡힐 것이었다. 물론 이 잔인성은 새롭지 않았다. 이곳에 늘 있어 왔다. 우리 중 일부가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 P25

1992년 『타임Time』과의 인터뷰에서 월터 아이작슨이 새로운 관계에 대해 묻자 앨런은 이후 대단히 유명해진 대사를 날린다. 그것은 반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도덕적 결함에 대한 어리석은 일축이었다.
"마음이 원하는 걸 원하는 거죠."
한번 들으면 영원히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원하건 아니건 그 즉시 외우게 된다.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존중하지 않는 자의 발언이다. 불합리함을 오만하게 내세우고 있다. 우디는 말을 이었다. "이런 일에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면 그것으로 끝인 거죠." - P51

나는 앞서 ‘우리‘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 즉 동의를 암시하거나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우리‘에 불만을 표한 바 있다. 하지만 미투 운동에서는 ‘우리‘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 ‘우리‘는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돋보기였고 확성기였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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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함께 머리도 틀림없이 쇠약해졌다는 사실은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몸은 강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항상 계속 살아가려고 하지. - P385

긴 잠을 자고 일어나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늦봄 또는 초여름······ 풍경을 보니 아무래도 초여름이지 싶었다. 뒷마당의 커다란 느릅나무 이파리들이 풍요롭게 반짝였다. 그 느릅나무 그늘은 그도 전에 경험한 적이 있는 깊이와 서늘함을 담고 있었다. 공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풀과 이파리와 꽃의 향기로운 냄새에 묵직함이 잔뜩 섞여서 그 향기들을 허공에 묶어두고 있었다. 그는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깊숙이. 긁히는 것 같은 자신의 숨소리가 들리고, 여름의 달콤함이 허파 속에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 P386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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