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비난하려는 충동은 사실 정치적 충동이다. 앞서 나는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책임에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 확성기가 될 수도 있다. 편 가르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대 그들. 도덕적인 사람들 대 비도덕적인 사람들. 어떤 사람을 더 잘못되고 그릇된 사람으로 만들면서 어쩌면 우리를 더 옳은 사람, 괜찮은 사람,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 P60
첫 #미투 시즌 중에 피해자들은 서로에게서 힘을 얻어 괴물을 고발하기 시작했고, 광장에서 열리는 괴물 퍼레이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모르던 바는 아니었으나) 이 남자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 말인즉슨 피해자들도 어디에나 있었다. 그동안 침묵하여 보이지 않던 피해자를 생각하면 할수록 ‘괴물‘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이란 단어는 계속 괴물 당사자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이 카리스마 넘치는 매머드 같은 동물은 주변 모든 것은 물론 공기까지 빨아들일 것만 같다. 이 괴물의 이름을 열거하고 그들이 저지른 악행을 나열하는 것은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뭘까? 우리는 어디로 갈까? 혹시 이들을 괴물이라 부르고 이들의 괴물성에 대해 글을 쓰고 이들의 괴물 범죄를 묘사하면서 이 괴물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있지는 않을까? - P63
작품의 얼룩은 철학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용주의의 문제, 평범한 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얼룩이 그만큼 강력한 은유가 된다. 갑작스럽다. 영구적이다. 무엇보다 냉혹할 정도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얼룩은 단순히 그냥 일어나 버린다. 얼룩은 선택이 아니다. 얼룩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아니다. 얼룩 제거도 자발적이지 않다. - P66
나는 수치심에 대해서도 늘 궁금하다. 수치를 당할 위험은 인터넷 생활의 모든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수치는 팬과 몰락한 예술가 사이의 역학 관계에 어떤 역할을 할까. 수치심shame은 동사이자 명사이기도 하다. 내 안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이면서 내가 당신에게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예술가를 사랑하고 그들과 동일시할 때 그들이 얼룩지면 우리는 그들을 대신하여 수치심을 느낄까? 아니면 나와의 동일시를 끊어 버리고 싶어 그들에게 더 잔인하게 수치심을 주고 더 멀리 내쫓아 버릴까? 어쩌면 수치는 이 유사 사회 관계의 궁극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의 감정과 함께 무너진 우리의 감정은 인터넷 시대에 특화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취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새로운 지형 안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심지어 어떻게 느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 P85
나는 권위의 문제를 놓고 씨름했다.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긴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라는 사람이 대체 뭘 알아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쓴단 말인가? 물론 남들보다 영화를 많이 보긴 했다. 대학에서 영화 이론 수업을 두어 과목 들었는데 나처럼 검은색 옷을 많이 입는 학생은 응당 그래야 하는 줄 알아서였다. 하지만 신문사에 글 쓰는 사람으로 고용되었다. 나는 글을 제법 썼고 그래서 이렇게 남들이 탐내는 직업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절로 나에게 논평할 자격이 부여되는 걸까? 내 직업은 정확히 뭐지?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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