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학 공부도 농장 일을 도울 때처럼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이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했다. 1학년 말에 그의 평균성적은 B학점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는 점수가 더 낮지 않은 것을 기뻐했을 뿐, 점수가 더 높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을 배웠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점수가 그에게 의미하는 것은 2학년 때에도 1학년 때처럼 해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 P14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 갈색 피부에 감탄하고, 뭉툭한 손끝에 꼭 맞게 손톱을 만들어준 그 복잡한 메커니즘에 감탄했다. 작고 작은 정맥과 동맥 속에서 섬세하게 박동하며 손 끝에서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듯했다. - P20

윌리엄 스토너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주위 학생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간 뒤로도 몇 분 동안 그는 꼼짝 않고 앉아서 자기 앞의 좁은 바닥 널을 빤히 바라보았다. 바닥널은 그가 결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학생들의 부산한 발길에 닳아서 니스 칠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였다. 그는 그 바닥 위에 자신의 발을 미끄러뜨리며 나무가 신발 바닥에 닿는 거친 소리를 듣고, 가죽을 통해 느껴지는 거친 질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 P21

늦가을의 쌀쌀함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창백한 하늘 아래 둥글게 말리거나 비틀려 있는 나무들의 벌거벗은 가지가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서둘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 돌로 포장된 길에 신발이 또각또각 닿는 소리가 들리고, 추위에 발갛게 변한 채 가벼운 산들바람을 피해 수그린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 P21

밤에 다락방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방구석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램프의 불빛이 구석의 어둠에 맞서 너울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둠이 빛 속으로 모여들어 그가 읽던 책에 나오는 상상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다. 그러면 자신이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의 중에 아처 슬론이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과거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한데 모이고, 죽은 자들이 그의 앞에 되살아났다. 그렇게 과거와 망자가 현재의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오면 그는 순간적으로 아주 강렬한 환상을 보았다. 자신을 압축해서 집어삼킨 그 환상 속에서 그는 도망칠 길도,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트리스탄과 아름다운 이졸데가 그의 앞을 거닐었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강렬한 어둠 속에서 빙빙 돌았다. 헬레네와 총명한 파리스는 자신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 때문에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어둠 속에서 솟아올랐다. - P24

입술이 근질거리고 손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는 잠든 사람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지만, 주위의 것들을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복도의 광택이 나는 나무 벽들을 스치듯이 지나갈 때는 나무의 온기와 유구한 세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갈 때는 자기 발밑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만 같은 차가운 대리석 계단에 감탄했다. 홀에서는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들 속에서 학생들 각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구분되고, 그들의 얼굴이 친밀하면서 동시에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제시 홀에서 오전 풍경 속으로 나갔다. 이제는 캠퍼스가 회색 풍경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캠퍼스가 그의 시선을 밖으로, 위로 이끌어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는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가능성을 바라보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 P30

윌리엄 스토너 앞에 놓인 장래는 밝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와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증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 P36

그는 학생의 입장으로 강의를 들을 때 해방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런 수업에서는 아처 슬론이 수업 중에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던 그날처럼, 그 자신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던 그날처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강의에 빠져들어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문학의 힘을 파악하려고 씨름 하면서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 점점 빠져나와, 자신이 읽은 밀턴의 시나 베이컨의 에세이나 벤 존슨의 희곡이 세상을 바꿔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작품들이 자신의 소재이기도 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상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P39

전쟁선포 후 처음 며칠 동안 스토너도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캠퍼스 내의 사람들 대부분을 사로잡은 혼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나 강사들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어도, 사실 그는 전쟁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쟁이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자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엄청난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쟁 때문에 대학의 일들이 중단된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의 내면에서 강렬한 애국심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독일인 들을 미워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 P47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나자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 P53

전에는 죽음을 문학적 사건 또는 불완전한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조용하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으로만 생각했다. 전장에서 터져 나오는 폭력이나 파열된 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처럼 다른 종류의 죽음이 존재하는 까닭, 그리고 그 차이가 지니는 의미가 궁금했다. - P57

그는 여름에 고전 작품과 중세시대의 라틴어 시를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죽음을 다룬 시들을 많이 읽었다. 로마의 서정시인들이 죽음을 삶의 현실로 편안하고 우아하게 받아들인 것에 다시 의아함을 느꼈다. 그들은 무(無)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살면서 즐겼던 풍요로움에 바치는 공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반면 기독교 시대에 라틴 전통에 따라 시를 쓰던 후세의 시인들 중 일부의 작품에는 거의 감춰지지 않은 증오, 쓰라림, 공포가 드러나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들은 비록 모호한 약속이기는 하나 풍요롭고 황한 영생의 약속으로 그런 감정이 드러난 것을 보면, 마치 죽음과 영생의 약속이 삶을 망가뜨리는 못된 장난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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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내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없는 걸 요구해서 상대를 끝내 시험에 들게 해 그걸 얻어내고 말겠다는, 결국 이겨먹고 말겠다는 그 악착한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선물을 헌신짝 버리듯 쉽게 잊고 그 선물을 준 사람마저 이겨먹었으니까, 먹어버리듯 이겼으니까 까맣게 잊고 마는 그 잔혹한 무심함은. - P232

여자를 둘러싼 찬란한 햇빛이 공중에 은빛 거미줄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잿빛 음영이 드리우면 빛나던 베일은 수의처럼 뻣뻣해진다. 생명의 어두운 결정체들이 점점이 박히고 누런 고치들이 매달려 흔들리는 검은 그물은 그녀 자신이 내뿜었지만 이미 그녀 자신을 가두는 거대한 망이 된다. 이윽고 그녀 스스로 고치가 되고 캄캄한 밤이 그녀를 덮는다. - P237

나는 여자의 말투를 흉내낸 게 아니라 내 속에 오랫동안 고여 있던 가래 같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학대의 사슬 속에는 죽여버 릴까와 죽어버릴까밖에 없다. 학대당한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학대를 갚는 그 사슬을 끊으려면 단지 모음 하나만 바꾸면 된다. 비록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모음이라 해도. - P238

나는 한참 눈을 꾹 누르고 있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 P241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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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시간보다 소미는 거기서 실개천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그 시간이 좋았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두렵고 또 두려웠지. 현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가끔 그 말이 떨쳐지지 않는 주문처럼 소미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현수가 말한 그때는 그때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다시 만났던 그때가 그래도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젊었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이제 소미는 안다. 그래서 여전히 두렵고 또 두려웠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많이 웃고 죽자고 담배를 피워대고 겁없이 땅을 사고 했다는 것을. - P143

혜진이 무턱대고 들이받으려고 하거나 고집을 부려 대화 시간이 길어지면 혜영은 자기도 모르게 밀랍 가면 속에서 눈만 자주 깜빡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혜진은 놓치지 않고 또 깜빡이 켜졌다, 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혜영은 가슴속에 서서히 번지는 미지근한 불쾌감을 억눌렀다. - P150

요즘 들어 혜진이 급격히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느꼈지만 혜영은 절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이 혜진과 세상을 이어줄 유일한 밧줄인 걸 아니까. 그런데도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육신······ 육신······ 그 말이 자꾸 입안을 맴돌았고, 니 육신······ 내 육신······ 하면 왜 더 심한 욕 같은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 P151

어떤 말은, 특정 음식이 인체에 계속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정신에 그렇게 반복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오익은 생각했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그 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 P172

지금은 숙이가 전생의 원한을 못 풀고 마음을 굳게 닫아걸었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정을 주고 위해주면 언젠가는 마음을 열 거다. 명채는 명으로 갚고 정채는 정으로 갚아야 한단다. 그러니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숙이에게 정을 듬뿍 주자, 익아.
정을 무슨 수로 줘요? 전화도 안 받는다면서요?
마음으로 주는 거지. 진심을 다해 정을 주면, 정은 다 통하게 돼 있다.
오익은 어머니의 정 타령을 들으며 풍미정 방여사가 입에 달고 사는 정 나눔이란 말이 떠올랐다. 참으로 지겨운 말들이었다. - P187

기름냄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배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묵직한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차라리 상가 사람들이 그리웠다. 얼른 이 자리를 끝내고 상가 사무실로 돌아가 철호와 술이나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소리가 들려왔다.
새 세 마리······
오익은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다. […] 아무도 새 세 마리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오익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입을 대고 숨결마저 끼얹는 목소리로 그 말을 속삭인 듯한 느낌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실감이었다. 새 세 마리······ 오익은 음소거하듯 가스 버너의 손잡이를 돌려 불을 꺼버렸다. - P193

이번에도 어머니는 다짜고짜 명자네 집 노인네가 귀가 먹어서 도대체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았고, 세상에 벗삼을 사람이 없다고도 한탄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니 쟤는 왜 비를 맞고 댕기니, 우산도 있는 놈이, 했다. 예전 같으면 이건 또 누구 얘긴가 했겠지만 이제 오익은 어머니가 어디 나와 앉아 우산을 든 채 비를 맞고 걸어가는 놈을 보고 있으려니 짐작했다. 그가 자정쯤 카페에 앉아 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그들과의 거리감이 상실되는 듯한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듯 어머니 또한 그렇게 어딘가를 내다보며 저 녀석은 왜, 저 양반은 왜,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오익은 차분히 기다렸다. 오늘 어머니는 오숙에 관해 또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 P197

오익은 어머니가 오숙의 말을 빌려 자신에게 막 해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그는 대학원 등록금을 빌리러 아버지의 재혼식 에 간 적이 있었다. 의리를 저버린 빚은 의채인가, 오익은 생각했다. 때로 어머니가 오숙의 입을 빌려 하는 말 중에는 그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모호한 기억과 말의 수렁에 잠긴 채로 그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고, 그럴 때면 어머니가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원수로 여기는 건 아닌가, 심지어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로 여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198

자신이 알아챘다면 간과했겠는가. 마찬가지로 오익은 오숙이 얼마만 한 분노가 있었기에 자신을 ‘너‘라고 부르며 의절을 통보하는 문자를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 P199

차라리 자신이 딸이었다면, 모든 걸 희생하고 차별받고 살아온 그런 존재였다면 오숙처럼 무섭게 돌변할 기회라도 있었으련만, 그는 한없이 억울했고 뭔지 모를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어머니를 닮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자신이 오숙처럼 되기를 바라느냐고, 앞으로 자기가 다 포기하고 희생하고 살면 되겠느냐고, 어머니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 P199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젋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 P204

나는 곧 잊었다. 잊으려고 했고 그러면 잊히는 듯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게 되는 듯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듯 어제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내 손에 쥔 확실한 패는 오늘밖에 없고 그 하루를 땔감 삼아 시간을 활활 태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 P211

그건 무엇이었을까. 내 속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발사된 것은.
지금의 내 생각에 그건 아마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정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네 살의 삶이 품을 수밖에 없던 경쾌한 반짝임 사이에서 빚어진 어떤 비틀림 같은 것, 그 와중에 발사되는 우스꽝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턱없이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목으로 지탱하는 듯한 그런 기형적인 삶의 고갯짓이 자아내는 경련적인 유머가 때때로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사된 건 아니었을까. - P218

나는 그의 눈빛, 그의 경청에서 그가 나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해석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서서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한편으로는 혹시 그가 내 내부에서 치명적인 진실 들을 캐낼까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내게서 아무것도 캐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 둘은 아마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 P219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이 뜻밖의 별자리를 만들면서 내 정신은 깊은 어둠과 무지에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났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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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는 매일 어김없이 호수로 나가 삽질을 했다. 엑스레이의 말이 맞았다. 세 번째 구덩이가 가장 힘들었다. 아니, 네 번째가, 아니 다섯 번째가, 아니 여섯 번째가······.
스탠리는 흙 속에 삽을 쑤셔 넣었다.
얼마 뒤 스탠리는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신경도 쓰지 않게 되었다. 구덩이를 몇 개 팠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거대한 구덩이 하나를 1년 반 동안 파는 느낌이었다. 몸무게가 최소한 3킬로그램은 빠진 것 같았다. 1년 반 뒤면 몸이 아주 좋아지거나 아니면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 P89

그날 밤, 스탠리는 간지럽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낮에 자기가 달리 행동할 수는 없었나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었다. 행운과는 거리가 먼 인생에서 딱 한 번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장소에 있었지만,그것도 결국 허사였다. - P95

"음, 사실 우리 아빠는 헌 운동화를 새 운동화로 바꾸는 방법을 발명하고 싶어하셔.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늘 고약한 냄새가 나. 아빠가 항상 헌 운동화를 삶고 있으니까. 엄마는 신발 속에 사는 난쟁이 할멈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대. 냄새가 얼마나 지독하겠니?"
제로는 멍한 표정으로 스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 P110

"신발 속에 사는 난쟁이 할멈 나오는 자장가 못 들어봤어?"
"못 들어봤어." 스탠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부르는 건데?"
"「쎄서미 스트리트」도 안 봤어?"
제로는 멀뚱멀뚱 스탠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스탠리는 저녁을 먹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초록호수 캠프에서 자장가를 불러봤자 바보 같은 기분밖에 더 들겠는가. - P111

스탠리는 고개를 들어 먼지 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흩어진 해바라기 씨를 내려다보았다. 스탠리는 또 한 번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
이게 뭐 새삼스러운 일인가? - P123

트라우트는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졌다. 그래서 캐서린 선생님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트라우트는 캐서린 선생님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이 찰스 워커에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아!"
그러자 캐서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좀 전에 내가 그렇게 말한 걸로 아는데요." - P147

"제로."
제로는 얼굴이 작아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스탠리는 제로가 자기 이름을 반복해서 자꾸자꾸 쓰는 것을 지켜보았다.
Zero, Zero, Zero, Zero, Zero, Zero, Zero······.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탠리는 왠지 짠한 느낌이 들었다. 제로, 그러니까 ‘0‘을 100번 써봤자 결국 ‘0‘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P169

"너도 알지? 제로가 진짜 내 이름이 아니라는 거."
저녁을 먹으러 휴게실로 가면서 제로가 말했다.
"어, 그래. 알았던 것 같아."
그렇게 말했지만, 스탠리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날 제로라고 불렀어. 여기에 오기 전에도 말이야."
"어, 그래?"
"진짜 이름은 헥터야."
"헥터."
"헥터 제로니." - P170

"비야, 제발 좀 내려라! 바람아, 제발 이쪽으로 좀 불어다오!"
겨드랑이가 소리쳤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호수에 물이 가득 찰지도 몰라. 그러면 수영도 할 수 있겠지." 오징어가 말했다.
"40일 낮, 40일 밤 동안만 내려라. 우리도 방주를 만드는 게 좋겠다. 그래서 암수 한 쌍씩 동물들을 태우는 거야, 그렇지?"
엑스레이가 말했다.
"맞아. 방울뱀 두 마리, 전갈 두 마리, 노랑 반점 도마뱀 두 마리."
지그재그가 말했다. - P179

스탠리는 제로에게 자기 구덩이를 대신 파게 한 것을 후회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제로에게 읽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것 아닌가. 제로가 온종일 구덩이를 파고도 배울 힘이 있다면, 스탠리 자신도 온종일 구덩이를 파고도 가르칠 힘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P199

미리 경고하는데, 난 그다지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야."
스탠리가 말했다.
"평생 구덩이에서 지낸 사람이 더 떨어질 데가 어디 있어. 위로 올라가는 길뿐이지."
제로는 별 상관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 P227

죽음을 떠올릴 때 스탠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다. 죽음의 고통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그 고통이 그렇게 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죽는 순간이 되면 몸이 너무 약해져서 고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음은 구원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탠리가 가장 걱정하는 점은 부모님이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아무것도 모른 채 헛된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 살아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죽으면 스탠리한테는 모든 게 끝이겠지만, 부모님의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다. - P231

스탠리는 누워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스탠리는 행복에 겨워 잠이 오지 않았다.
행복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스탠리도 알았다. 스탠리는 사람이 죽기 바로 직전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푸근해진다는 얘기를 어디서 읽은 것 같기도 하고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스탠리는 지금 자기가 바로 그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행복을 느낀 때가 언제였는지 스탠리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 아무도 스탠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스탠리 자신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 스탠리는 자신을 좋아했다. - P263

‘무슨 미친 생각을 하는지, 원.‘
스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과연 미친 사람들이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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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라 멘키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고르 바르코프가 마이라를 차지하려고 가장 살진 돼지를 내놓겠다고 했어요. 저한테 그렇게 값비싼 게 어디 있어야 말이죠."
"잘됐네. 너는 결혼을 하기에는 아직 젊어. 네 인생은 아직도 앞 길이 창창해."
"하지만 마이라를 사랑하는걸요."
"마이라는 머리가 꽃병처럼 텅 비었어."
"하지만 예쁘잖아요."
"그러니까 꽃병이지. 걔가 쟁기질을 하겠니, 염소젖을 짜겠니? 못하지. 걔는 너무 가냘파. 그리고 어디 수준 높은 대화나 할 수 있겠어? 못하지. 멍청하고 어리석거든. 또 네가 아플 때 널 돌볼 수나 있겠어? 못하지. 철이 없어서 네 보살핌만 받으려 들걸. 그래, 걔는 예뻐. 그래서 뭐? 퉤." - P47

펜댄스키 선생님이 말했다.
"인생에서 뭘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던 중이야. 죽을 때까지 초록호수 캠프에 있을 건 아니잖아. 여기를 떠난 다음을 준비할 필요가 있지."
"엄마, 그거 잘됐네요. 사람들이 드디어 엄마를 여기서 내보내 줄 건가 보죠?" - P84

"좋아. 한 가지 말해주지, 원시인. 네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딱 한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네가 이 뙤약볕 아래에서 구덩이를 팔 일도 없었을 거야. 그 사람이 누군지 아니?"
"아무짝에도—쓸모없고—지저분하고—냄새—풀풀—나는—돼지도둑—고조할아버지요."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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