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시간보다 소미는 거기서 실개천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그 시간이 좋았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두렵고 또 두려웠지. 현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가끔 그 말이 떨쳐지지 않는 주문처럼 소미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때 우리는 젊었으며······ 현수가 말한 그때는 그때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다시 만났던 그때가 그래도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젊었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이제 소미는 안다. 그래서 여전히 두렵고 또 두려웠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많이 웃고 죽자고 담배를 피워대고 겁없이 땅을 사고 했다는 것을. - P143

혜진이 무턱대고 들이받으려고 하거나 고집을 부려 대화 시간이 길어지면 혜영은 자기도 모르게 밀랍 가면 속에서 눈만 자주 깜빡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혜진은 놓치지 않고 또 깜빡이 켜졌다, 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혜영은 가슴속에 서서히 번지는 미지근한 불쾌감을 억눌렀다. - P150

요즘 들어 혜진이 급격히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느꼈지만 혜영은 절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이 혜진과 세상을 이어줄 유일한 밧줄인 걸 아니까. 그런데도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육신······ 육신······ 그 말이 자꾸 입안을 맴돌았고, 니 육신······ 내 육신······ 하면 왜 더 심한 욕 같은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 P151

어떤 말은, 특정 음식이 인체에 계속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정신에 그렇게 반복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오익은 생각했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그 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 P172

지금은 숙이가 전생의 원한을 못 풀고 마음을 굳게 닫아걸었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정을 주고 위해주면 언젠가는 마음을 열 거다. 명채는 명으로 갚고 정채는 정으로 갚아야 한단다. 그러니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숙이에게 정을 듬뿍 주자, 익아.
정을 무슨 수로 줘요? 전화도 안 받는다면서요?
마음으로 주는 거지. 진심을 다해 정을 주면, 정은 다 통하게 돼 있다.
오익은 어머니의 정 타령을 들으며 풍미정 방여사가 입에 달고 사는 정 나눔이란 말이 떠올랐다. 참으로 지겨운 말들이었다. - P187

기름냄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배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묵직한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차라리 상가 사람들이 그리웠다. 얼른 이 자리를 끝내고 상가 사무실로 돌아가 철호와 술이나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소리가 들려왔다.
새 세 마리······
오익은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다. […] 아무도 새 세 마리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오익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입을 대고 숨결마저 끼얹는 목소리로 그 말을 속삭인 듯한 느낌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실감이었다. 새 세 마리······ 오익은 음소거하듯 가스 버너의 손잡이를 돌려 불을 꺼버렸다. - P193

이번에도 어머니는 다짜고짜 명자네 집 노인네가 귀가 먹어서 도대체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았고, 세상에 벗삼을 사람이 없다고도 한탄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니 쟤는 왜 비를 맞고 댕기니, 우산도 있는 놈이, 했다. 예전 같으면 이건 또 누구 얘긴가 했겠지만 이제 오익은 어머니가 어디 나와 앉아 우산을 든 채 비를 맞고 걸어가는 놈을 보고 있으려니 짐작했다. 그가 자정쯤 카페에 앉아 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그들과의 거리감이 상실되는 듯한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듯 어머니 또한 그렇게 어딘가를 내다보며 저 녀석은 왜, 저 양반은 왜,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오익은 차분히 기다렸다. 오늘 어머니는 오숙에 관해 또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 P197

오익은 어머니가 오숙의 말을 빌려 자신에게 막 해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그는 대학원 등록금을 빌리러 아버지의 재혼식 에 간 적이 있었다. 의리를 저버린 빚은 의채인가, 오익은 생각했다. 때로 어머니가 오숙의 입을 빌려 하는 말 중에는 그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모호한 기억과 말의 수렁에 잠긴 채로 그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고, 그럴 때면 어머니가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원수로 여기는 건 아닌가, 심지어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로 여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198

자신이 알아챘다면 간과했겠는가. 마찬가지로 오익은 오숙이 얼마만 한 분노가 있었기에 자신을 ‘너‘라고 부르며 의절을 통보하는 문자를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 P199

차라리 자신이 딸이었다면, 모든 걸 희생하고 차별받고 살아온 그런 존재였다면 오숙처럼 무섭게 돌변할 기회라도 있었으련만, 그는 한없이 억울했고 뭔지 모를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어머니를 닮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자신이 오숙처럼 되기를 바라느냐고, 앞으로 자기가 다 포기하고 희생하고 살면 되겠느냐고, 어머니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 P199

오래전 기억 속의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각되는 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젋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 P204

나는 곧 잊었다. 잊으려고 했고 그러면 잊히는 듯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게 되는 듯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듯 어제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내 손에 쥔 확실한 패는 오늘밖에 없고 그 하루를 땔감 삼아 시간을 활활 태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 P211

그건 무엇이었을까. 내 속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발사된 것은.
지금의 내 생각에 그건 아마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정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네 살의 삶이 품을 수밖에 없던 경쾌한 반짝임 사이에서 빚어진 어떤 비틀림 같은 것, 그 와중에 발사되는 우스꽝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턱없이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목으로 지탱하는 듯한 그런 기형적인 삶의 고갯짓이 자아내는 경련적인 유머가 때때로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사된 건 아니었을까. - P218

나는 그의 눈빛, 그의 경청에서 그가 나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해석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서서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한편으로는 혹시 그가 내 내부에서 치명적인 진실 들을 캐낼까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내게서 아무것도 캐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 둘은 아마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 P219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이 뜻밖의 별자리를 만들면서 내 정신은 깊은 어둠과 무지에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났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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