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우리를 친구로 대해주는 건 우리가 건드리지 않을 때 뿐이야. 톱날이 파고 들어간 다음부터는 전쟁이 벌어지는 거라고. - P20

안의 절친한 친구이며 역시 나이가 많은 빌리는 보통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무덤 앞에서는 한두 마디 말을 했다. "안 피플스는 평생 남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적도 없어요. 어렸을 때, 아이였을 때 하다못해 막대사탕 하나도 안 훔쳤습니다. 그러고는 상당히 오래 살았습니다. 여기에 우리 모두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잘 지낼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다른 사람들도 "아멘"이라고 말했다. 대장이 말했다. - P25

이 첫 키스로 그는 구멍에 빠졌다가 다른 세상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 세상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지금까지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히 힘을 쓰다가 몸을 돌려 하류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데이지 꽃들 사이에서 키스를 하며 그날 오후를 다 보냈다. 그는 찬란한 기분이었다. 원래 몸속에 있어야 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가 온몸을 채운 것 같았다. - P46

불길은 그렇게 계곡을 집어삼켰다. 메도크릭에는 인적이 없었다. 그는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그곳에 있는 통에서 물을 마신 뒤 그대로 다시 걸었다. 곧 검게 탄 숲을 지나가게 되었다. 겨우 며칠 전만 해도 푸르던 나무 들이 이제는 거대한 창처럼 변해 있었다. 세상은 회색, 하얀색, 검은색으로 변해서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불꽃도 없었지만, 불길의 기세와 열기는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재가 너무 많고, 숨 막히는 연기도 너무 짙었다. - P49

나무가 탁탁 타는 소리와 불길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렇게 걷다 보니 검게 탄 모든 나무가 아직도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굽잇길을 돌자 불길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리고, 반 마일쯤 앞에서 불길이 보였다.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커튼이 밤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아직 거리가 있는 데도 열기 때문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릎으로 주저앉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헤치며 지나온 뜨거운 재 속에 그렇게 앉아 울었다. - P50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석양 무렵에 본 불탄 계곡의 모습을 평생 생생히 기억했다. 맨 정신으로 그렇게 꿈같은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머리 위 하늘에서는 마지막 남은 햇빛이 파스텔색으로 눈부신 광경을 그려내고, 하얀 구름 몇 점이 높이 떠서 계곡 너머의 햇빛을 받고 있었다. 다른 구름들은 갈비뼈 모양으로 회색이나 분홍색을 띠었다. 가장 낮게 걸린 구름은 부사드산과 퀸산의 꼭대기에 닿아 있었으며, 이 장관 아래에 검은 계곡이 있었다. 완전히 적막한 모습으로. 기차가 그 계곡을 지나가며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냈지만, 죽어버린 이 세계를 깨울 수 없었다. - P51

그레이니어는 말 두 마리와 수레 한 대를 빌려서 필요한 물건들을 싣고 강가의 길을 따라 출발했다. 자기 땅에 임시로 지낼 만한 곳을 지은 뒤, 겨울 내내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누가 들으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시도 덕분에 그는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페허가 된 지 역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심장에 고인 슬픔이 검게 변해서 정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그곳에 실제로 뭉쳐 있던 덩어리에서 정신 나간 희망이 만들어낸 모든 생각이 불에 타 사라지는 것 같았다. - P54

봄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몇 명이 가족과 함께 돌아와 모이 계곡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했다. 그레이니어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5월에 강가에서 야영하면서 낚시질로 무지개송어를 잡고, 캐나다인들이 모렐이라고 부르는 아주 향기롭고 희귀한 버섯을 찾아다녔다. 불길이 휩쓸고 간 땅에서 솟아나는 버섯이었다. 여러 날 동안 북쪽으로 나아가던 그레이니어는 옛 집에서 소리를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까지 온 것을 깨닫고 자신과 글래디스가 물가를 오갈 때 항상 이용하던 골짜기를 올라갔다. 모두가 죽어버린 땅에 벌써 새싹과 꽃이 지천으로 올라와 있는 광경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 P53

성경책도 보이지 않았다. 주님이 자신의 말씀이 기록된 책조차 지키지 못했다면, 그레이니어가 보기에 그것은 이 곳을 찾아온 불길이 하느님보다 더 강했다는 증거였다. - P54

그녀와 아기의 물건이었던 어떤 것이 이 근처에 묻혀서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엄습했다. 어떤 물건이지? 어쩌면 글래디스가 사 온 초콜릿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 상자 속에서 컵처럼 오목한 하얀 종이에 싸여 있는 초콜릿이었다. 정신 나간 생각이었지만, 그는 굳이 이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글래디스와 아이는 매주 한 번씩 초콜릿 한 개를 빨아 먹었다. 그 하얀 종이컵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습이 갑자기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종이컵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면, 컵이 사라져 버렸다. - P55

파괴되어 얼마 남지 않은 숲에 동물들이 돌아와 살고 있었다. 그레이니어가 모래 빛깔의 펑퍼짐한 암말이 느릿느릿 끄는 수레를 타고 가는데, 오렌지색 나비 무리가 곰을 조심하라고 알리는 어두운 보라색 표지판 더미에서 폭발하듯 쏟아져 나와 마법처럼 팔랑거렸다. 마치 나무가 없는 이파리들 같았다. 진흙길에는 사람보다 곰의 흔적이 더 많았다. 길 한가운데에 곰들이 똑바로 오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늦여름이 되면 녀석들이 먹이를 찾아 아래쪽 월귤 나무 밭으로 내려올 것이다. 검게 탄 능선에 벌써 월귤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 P59

"넌 왜 본성을 따르지 않는 거냐. 다른 늑대들이 울면 너도 따라 울어야지." 그는 잡종 강아지에게 말했다. 그러고 똑바로 일어서서 협곡을 향해 길고 슬프게 울었다. 날이 거의 어두워진 때라 조용하게 흐르는 낮은 강 저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강아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그 뒤로 그레이니어는 황혼 녘에 늑대 소리가 들리면 자주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힘껏 늑대처럼 울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쌓이곤 하는 묵직한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늑대 합창단과 저녁에 이렇게 한바탕 공연을 하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운이 났다. - P63

그는 쿠트나이 밥에게 이런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다. "늑대처럼 운다고, 자네가?" 밥이 말했다. "그렇게 된 거로군. 그런 일이 있다고 했어. 사람들 말로는. 살아 있는 늑대가 언제나 사람을 길들일 수 있다고 말이야." - P54

수면 위로 튀어나온 80피트 길이의 가문비나무가 속까지 완전히 타서 협곡으로 떨어졌다. 불길에 휩싸인 초록색 바늘 이파리 뒤로 연기가 꼬리처럼 늘어진 것이, 불꽃으로 그려낸 뱀 같았다. 불타는 이파리들이 강물에 떨어지면서 쉭쉭 소리를 냈다. […] 집 지붕에서 자라던 이끼가 둥글게 꼬부라지면서 희미하게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오두막 벽의 통나무들은 압력을 받아 대구경 탄약통처럼 폭발했다. 화덕 옆 탁자 위에서는 불길에 휩싸인 잡지가 검게 그을려 구부러지며 한 페이지씩 공중으로 날아가 허공을 떠돌았다. 유리창도 산산조각 나고, 커튼 가장자리가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토마토, 콩, 캐나다 버찌를 넣어둔 단지들은 부엌 개수대 위의 선반에서 녹아내렸다. 갑자기 오두막 안의 모든 램프에 불이 켜졌다. 탁자 위에서는 뚜껑이 녹은 소금 단지가 폭발했고, 곧 집 전체에 성냥처럼 확 불이 번졌다. - P89

그 뒤로 그레이니어는 겨울에도 오두막에서 살았다. 대개 1월에 눈이 높이 쌓이면, 계곡은 영원한 침묵 속에 정지해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기차 소리와 멀리서 늑대 들이 합창하듯 울어대는 소리, 가까이에서 코요테가 미친 듯이 날뛰는 소리로 가득할 때가 많았다. 그레이니어 본인도 늑대처럼 울부짖는 것을 일종의 스포츠처럼 즐겼다. - P91

비행기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가파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엔진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니어의 장기들이 척추에 달라붙었다. 여름밤에 오두막에서 아내와 딸이 후드의 사르사를 마시던 순간이 보였다. 그다음에는 기억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른 오두막이 나타나고, 그의 숨겨진 유년 시절에 갔던 장소들, 광대한 황금빛 밀 밭, 길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는 열기, 그를 감싼 두 팔, 다정한 여자의 목소리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번 생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었다. - P95

"하느님에게는 연단에 서서 설교를 하는 사람과 숲에 사는 은자가 모두 똑같이 필요해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요?"
"내가 은자 같지는 않은데." 그레이니어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그날 하루가 끝나갈 무렵 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내가 은자인가? 이런 것이 은자인가? - P108

그는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하고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숲 속 오두막에서 혼잣말을 하다가 자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참이었다. 심지어 개도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지 밤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화덕의 틈새에서 밝게 너울거리는 불꽃을, 커튼처럼 점점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칠흑같은 어둠을 빤히 바라보았다. - P109

늑대와 코요테가 밤새 쉬지 않고 울어댔다. 수백 마리는 되는 것 같았으니, 그레이니어가 들어본 것 중에 가장 많은 짐승들이 내는 소리였다. 어쩌면 올빼미, 독수리 같은 다른 짐승도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어떤 동물 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산꼭대기와 능선에서 모이강을 내려다보는 동물 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녀석들이 한 마리도 빠지지 않고 울어대는 것 같았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짐승들을 그 무엇도 달랠 수 없다는 듯이. 그레이니어는 감히 잠을 자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엄청난 징조 같아서였다. 어쩌면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경보일 수도 있었다. - P112

저쪽 2번가에서 감리교 신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보너스 읍내에서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니어는 아직 드물게 예배에 참석했다. 마침 예배가 있는 시간에 읍내에 나왔을 때. 교회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가 글래디스와 함께 거의 매주 예배에 나오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체로 교회에 간 것을 후회하는 편이었다. 교회에서 그는 자주 울었다. 모이산 속에서 살 때는 자잘하게 할 일이 워낙 많아서 다른 데 신경을 쓸 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슬프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러다 찬송가가 시작되면 기억이 났다. - P120

그레이니어는 이 광고를 여러 번 읽었다. 목구멍이 조여들고, 뱃속이 펄떡거리면서 팔다리가 마비되었다. 비록 아주 조금이기는 해도, 자신이 대로를 걷는 동안 내내 틀림없이 노 젓는 배처럼 흔들거린 것 같았다. 자신이 미쳐 버린 건지, 정신병을 고친다는 의사를 찾아가야 하는 건지 고민스러웠다.
미인이라니! - P124

일몰 때 그는 딱 멈춰 섰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절벽이었다. 스푸르스 호수라고 불리는 물가로 내려가는 뒷길을 발견한 그는 수백 피트 아래에 있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평평한 수면이 잔잔하고, 흑요석처럼 검었다. 주위를 에워싼 절벽의 그림자가 그 호수를 잡아먹고, 상록수와 상록수의 그림자가 그 호수를 이중으로 둘러쌌다. 그 너머로 아직 햇빛을 받고 있는 캐나다 로키산맥이 보였다. 꼭대기에 눈을 얹고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산은 구름에서 영양분을 취했다. 마치 땅이 창조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웅장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그의 삶을 채운 숲은 너무나 울창하고 높아서 세상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볼 수 없게 그의 시야를 대체로 가려버렸다.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나 산을 하나씩 가질 수 있을 만큼 세상에 산이 많은 것 같았다. 그에게서 저주가 사라지고, 욕망이라는 전염병도 스르르 날아가 저기 먼 계곡에 내려앉았다. - P127

발밑에서 바람이 우르룽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한데 모여 포효처럼 변하더니 사람들의 청각 그 자체를 쪽쪽 빨아들여 목소리로 변했다. 그 목소리가 콧구멍으로 들어와 마침내 사람들의 뇌 속으로 침투해서 계속 높이 올라가며 점점 더 끔찍하고 아름답게 변했다. 배의 경적 소리, 기관차의 외로운 기적 소리, 오페라 가수의 노랫소리, 플루트 소리, 계속 신음하는 것 같은 백파이프 소리 등 비슷한 모든 소리의 출발점인 이상적인 소리였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암흑이 되고, 시간이 영원히 사라졌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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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그레이니어는 사방에 그 중국인이 있는 것 같았다. 길에 서 있는 중국인. 숲속의 중국인. 양손을 밧줄처럼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걷고 있는 중국인. 개울에서 거미처럼 사사삭 기어 나오는 중국인. - P11

기차가 도착하는 지점에는 대장이 당나귀라고 부르는 거대한 엔진이 웅크리고 있었다. 거대한 무쇠 드럼통 두 개를 붙여놓은 모양의 이 엔진에서 한쪽 드럼통은 케이블을 풀어내고 다른 한쪽은 케이블을 감아들이면서 통나무를 끌어가는 한편, 동시에 고리를 반대편으로 보내주면 그 쪽의 초커가 다음 통나무를 고리에 끼웠다. 이 엔진은 나무를 태우는 구식 증기엔진으로, 쿵쿵, 웅웅, 끙끙거리는 소리와 함께 증기를 폭포처럼 쏟아냈다. 길을 오가는 말들은 마치 침묵 속에서 거대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증기 소리와 기계 소리에 그들이 내는 소리가 모두 지워진 탓이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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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없다, 다만 시간의 몰려옴이 있을 뿐. 설명할 수 없고, 공허하며, 무형의 시간, 그녀는 그것을 향해 움직이도록 기대될 뿐이다. 앞쪽으로. 앞으로. 그리고 어떻게든 현재를 지나쳐버린다. 망각의 은총으로 스스로를 구제하고 있는 그 현재.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었을까. 현재의 가시성이 없이. - P152

그녀는 그 전날과 같은 장소에 앉아 있다. 첫날과 같이. 그녀를 보려고 몸을 왼쪽으로 돌린다, 그녀는 혼자다, 몸은 부동. 그녀의 손은 그녀의 소지품들과 함께 무릎 위에 마주 잡고 있다. 그녀는 인공으로 모조된 밤의 고요한 매달림 속에서 떠돌고 있다 움직이지 않기도 하고 바람이 일면 동등하게 흔들리는 불꽃처럼. 그늘과 어둠 속에서 지나간 것들 속에 머물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눈은 먼 곳을 향해 뜨고 있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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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없다. 또 다른 전쟁으로부터 또 다른 피난처를 향하는 것 외에는. 목적지를 향한 여러 세대의 교체와 역사의 행로에는 많은 기만들이 있다. - P92

타액을 분비하는 말들
타액은 말들을 분비한다
말들의 분비는 액체로 흐르고
말들을 침 흘리게 한다. - P142

타액을 분비하는 말들
타액은 말들을 분비한다
말들의 분비는 액체형으로 흐르고
말들을 분비한다. - P143

순백함의 이후로는 언제나.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 있다, 하얗게,
능가할 수 없는, 색깔의 부재, 절대적, 지극히 순수하다, 이를 수 없도록 순수하다.
만약 그 자체의 하얀 그림자—수의안에서, 모든 얼룩이
사라진다면, 드리웠던 모든 과거 모든 기억이 떠난다면, 이 말들의 사면과 힘을 통하여.
덮어씌우고. 장막처럼 두르고. 옷을 입히고. 자루집에 넣고. 수의를 입혀.
덧씌우고. 덧입히고. 막을 치고.
숨긴다. 급습한다.
변장. 은닉. 가면. 베일
불분명. 모호. 가리개. 침식. 은밀.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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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뒤 윌리엄 스토너는 그날 조시아 클레어몬트의 집에서 오후에서 이른 저녁까지 보내며 자신이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분위기가 공식적이었고 기억도 흐릿해서, 현관홀의 계단 벽에 걸려 있던 색 바랜 벽걸이 같았다. - P68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도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처음으로 그녀와 둘이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해 12월 그날 저녁의 한 시간 반 동안 한 것만큼 그녀가 자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자신과 그녀가 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그런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는 또한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확신했다. - P75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천장이 높은 전시관들을 돌아다녔다. 그림에 반사된 빛이 풍요롭고 은은했다. 그 조용함, 그 따스함, 오래된 그림들과 조각상들 덕분에 시간을 초월한 듯한 그 분위기 속에서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는 섬세한 키다리 아가씨를 향해 사랑이 마구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마음속에서 솟아오른 조용한 열정은 따스했으며, 관능적이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았다. 사방에 걸린 그림에서 솟아나온 색깔들과 같았다. - P98

슬론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의 동료들과 이 도시 사람들 몇 명만이 좁은 구덩이 주위에 모여 서서 경외감, 당혹감, 존경심을 한꺼번에 느끼며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해 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울어준 사람은 바로 스토너였다. 이제 완전히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망자의 고독이 그 울음으로 조금 덜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운 것이 자신 때문인지, 슬론과 함께 보낸 젊은 시절이 함께 땅속에 묻히고 있기 때문인지, 그가 사랑했던 저 마르고 가엾은 사람 때문인지는 스토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P125

스토너는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홀리스 로맥스에게 끌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로맥스의 거만한 태도, 달변, 유쾌한 신랄함 속에서 스토너는 비록 조금 일그러지기는 했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데이브와 그랬던 것처럼 로맥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런 마음을 스스로 인정한 뒤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 P130

윌리엄 스토너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에게 뜻밖의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로맥스가 일종의 변화를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을 통해 알게 되는 직관적인 깨달음 같은 것. 스토너 자신도 예전에 아처 슬론의 강의를 들으며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로맥스는 일찌감치 혼자서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통해 얻은 지식이 스토너의 경우보다 더욱더 그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두 사람은 비슷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또는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그 사실을 시인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 P137

이디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빛의 장난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열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끈 뒤 그녀 옆에 누웠다. - P139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 P140

처음에 그는 자신의 책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것을 양손으로 들고 아무 장식이 없는 표지를 쓰다듬다가 책장을 펼쳤다. 섬세하고 활기찬 아이 같았다. 그는 책으로 완성된 자신의 원고를 다시 읽고 나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나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그 책을 보는 일에 진력이 났다. 하지만 자신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경이가 느껴졌으며, 자신이 그토록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일에 무모하게 나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 P142

1927년 봄, 어느 저녁에 윌리엄 스토너는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는 꽃들의 향기가 촉촉하고 따스한 공기에 섞여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귀뚜라미들이 노래를 부르고, 저 멀리에서는 자동차 한 대가 외로이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적막한 어둠을 향해 반항하듯 커다랗게 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새로운 계절의 나른함에 사로잡혀 천천히 걸었다. 덤불과 나무의 그늘 속에서 밝게 고개를 내민 자그마한 초록색 봉오리들이 신기했다. - P144

분빌은 그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 비해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새로운 건물이 몇 개 들어서고 옛날에 있던 건물 몇 채가 철거되었지만, 살풍경하고 보잘것없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지금도 언제든 없애버릴 수 있는 임시 거처처럼 보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대부분의 길이 포장되었는데도 흙먼지가 엷은 안개처럼 허공에 떠 있고, 강철바퀴를 단 마차 몇 대가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강철바퀴가 도로와 도로 턱의 콘크리트 포장을 긁을 때면 가끔 불꽃이 튀었다. 고향집도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옛날보다 더 건조하고 칙칙해진 것 같기는 했다. 미늘벽판자로 된 벽에는 페인트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고, 역시 페인트칠이 되지 않은 포치 바닥도 맨살을 드러낸 땅을 향해 조금 더 주저앉아 있었다. - P146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옷을 입고 밭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해마다 일하던 곳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어렸을 때 보았던 아버지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마른 흙 한 덩이를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스러뜨리며 달빛 속에서 어둡게 보이는 흙 알갱이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바지에 손을 털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누워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동이 틀 때까지. 땅 위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척박한 회색 땅이 그의 앞에 무한하게 펼쳐질 때까지. - P150

그는 […] 이 황량하고, 나무 하나 없는 작은 땅으로 시선을 돌려 평평한 땅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태어난 집,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보낸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해마다 땅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했다. 땅은 옛날과 다름없었다. 아니, 그때보다 조금 더 척박해지고, 소출도 조금 더 인색해진 것 같았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는 멍해졌다. […]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습기와 부패의 기운이 두 분의 시신이 담긴 소나무 상자를 서서히 침범해서 두 분의 몸을 건드리다가, 마침내 두 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먹어 치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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