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우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환상은 우리가 언제나 과거보다는 더 나아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귀를 막는다면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까? - P171

험버트의 내면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까닭에 이 책은 결국 회고록 형식으로 집필되어 있다. 회고록이 나르시시즘의 기록이라는 평판과 영원히 싸워야 한다면 범죄적 자아를 기록하는 험버트는 궁극의 회고록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회고록은, 최악의 경우, 자신의 특별함에 대한 길고 긴 아우성이다. - P180

만약 그가 그 감정을 느끼거나 생각했다면, 그건 정말 괴물적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평범한 인간의 변태성일까? 결국 생각은 행동이 아니다. 이야기가 범죄는 아니다.
진실은,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끔찍하고 쓸모없고 비뚤어진 감정들을 품고 산다는 점이다. - P189

제도 내부에서의 존재감은 중요하다. 예술가든 행정가든 문화적 제도 안에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것이 괴물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억압받던 집단의 사람들이 결코 괴물이 될 리 없다는 생각 또한 오류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자동적으로 그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지 않고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 그 사람을 자동적으로 선인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제도가 여성, 유색인, 퀴어, 트랜스젠더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도가 전반적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이 공정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 P201

남자는 여자를 침묵시키고 법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았고 기관은 여자를 잊었다. - P201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의 밑바닥에는 한 무더기의 야만이 깔려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덜 중요한 예술 작품의 바닥에는 그만큼 야만도 적게 깔려 있을까? 한 덩어리 정도 있을까? 작은 조각일까? (추가 조사를 통해 벤야민이 실제로 쓴 글은 이 번역에 더 가깝다는 것을 발견했다. "문화의 기록 중에 문화적인 동시에 야만적이지 않은 기록은 없었다." 아무래도 의미가 더 좁아지는 것 같다.) - P203

애나 울프를 잡아먹는 것은 집안일뿐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기억하기, 즉 오늘날에 감정노동이라 지칭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여자/엄마 역할을 해낼 사람이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에 긴장한다. 그녀는 계속 자신의 정신 분석에 대해 생각한다. - P228

좋은 문학 작품이, 아니 좋은 글 한 편이 해야 할 일은 내가 느껴야 할 것 같은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느끼는 감정과 살아 있는 경험을 대신 드러내 주는 것이다. 어쩌면 제2의 물결 페미니즘의 의식 고양 모임도 바로 이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이 정말 느끼는 감정을 말해 보면 어떻습니까? 혁명적인 행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부분적으로는 누가 말하는지에 따라 다르다고도 생각한다. 레싱은 이 부분에서 중요한 일을 해냈다. 대체로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익명의 여성들에게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느낀 경험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 P230

내가 사기꾼 같다는 느낌, 엄마 역할을 거부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 조용한 목소리, 그 경험 속에서 나도 살았다. 수년 동안 나는 충분히 좋은 엄마가 아니었고 현재도 아니라는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역할에 내 존재 전부를 던져 넣을 수 있었다. 내 안의 예술가 자아, 어쩌면 진정한 자아, 완전히 선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이 자아를 구석에 밀어 둘 수 없었다. 아마 그래서 딸이 세 살 즈음일 때 아이와 놀 때마다 나 자신에게 뇌물을 주었을 것이다. 제발 눈 딱 감고 좋은 엄마처럼 행동하라고 나를 살살 달랬다. 하지만 가끔은 내 안의 애나 울프가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기계, 영화의 한 장면, 사진, 시뮬라크르, 잘린 가지, 타자, 분열된 자아. - P231

나는 가끔 내가 착함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욕구는 강력한 갈망이기도 했다. 이 개념의 핵심에는 무언가 굉장히 순수한 것, 평범하고 단순하고 좋은 인간의 상호 관계라는 것이 있다. […] 그러나 내가 되어야 할 것만 같은 사람이라는 개념과 그 순간에 내가 느끼는 도피하고 싶은 감정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다. 좋게 말해서 지루함이라 말할 수 있는 무기력한 기분, 하지 못한 일만 생각하다가 친구들과 도망가고 싶다는 욕망을 불쑥 느끼는 상태다. 나의 내적 삶은 좋은 엄마의 뇌에 있는 그림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 P234

내 머릿속에 몇십 년 동안 자리 잡고 떨쳐 버릴 수 없는 노래처럼 귓가에 맴도는 문장이 하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엄마가 된다는 건 언제나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을 우울하게 해석하자면 꼼짝 없이 갇혔다는 이야기다. 나는 엄마의 역할에 갇혔지만 엄마로서 산 인생 또한 내 생애 다른 무엇보다 사랑해 마지않았다. 문제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엄마가 된다는 것과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직교라는 점이다. 어떻게 이 두 가지를 이인용 자전거처럼 끌고 갈 수 있을까? - P235

예술은 보통 자발적인 활동으로 비춰진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아이템 중 하나이며, 당신의 가용 자원과 시간에 따라 우선시할 수도 있고 생략할 수도 있는 업으로 보인다. 가족의 긴급한 상황과 균형을 맞춰야 하는 항목이다. 하지만 당신이 예술가이고 언제나, 항상 아이들의 욕구만을 가장 먼저 채워 주려고 한다면, 언젠가는 당신의 욕구가 고개를 들고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나는 그 잃어버린 세월 동안 무언가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도 할 것이다. 그런데 너무 늦지 않았을까?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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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회고록의 인물이 나처럼 생각하고 내가 믿는 바대로 행동하고 내가 행동하는 대로 행동할 때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 할 정도로 충격을 받거나 감격하진 않는다. 독서에 몰두할 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스토리가 전부다. 하지만 비평가가 그러했을 때는, 그러니까 나의 감정과 반응을 글로 풀어 줄 때는 언제나 크게 자극받고 흥분하고 감동했다. 아마도 비평가와 독자는 결국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은(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는다. 참고의 틀과 지형 또한 똑같이 공유한다. 우리가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게 비평문 읽기는 굉장히 친밀한 행동이었다. 나와 아주 먼 곳에 있는 타인이지만 같은 작품을 소비하고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보통 생각보다는 감정에 강렬하게 사로잡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감정이 나에게 설명되기를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정한 기쁨이고 위안이었다. - P95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래서 작품에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는 편이 좋다. 당신은 당신이라는 사람과 당신의 느낌에 따라 반응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편이 좋다. - P100

"역사와 완전히 무관한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작고한 작가 랜들 케넌이 2019년 미시시피대학교 강연에서 던진 질문을 나는 항상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의 감정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겪은 순간과 상황, 그 이전에 우리를 스쳐 간 순간과 상황에 복무한다. 여기에 이 말을 더하고 싶다. 과연 어떤 반응, 어떤 의견, 어떤 비평이 역사와 완전히 무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역사와 이력의 힘에 종속되어 있고 그 역사가 형성한 조건 내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역사를 초월한 주체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 P101

도나 해러웨이는 객관성이란 "아무 근거도 없는 정복자의 시선"이고 "환상이나 신의 장난"이라고 말한 바 있다. - P102

향수나 개인적 경험은 작품의 위대함과 나쁜 행위의 정도를 비교하여 결과를 계산할 때 중요한 의미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그저 권위에 기대서 무언가를 훌륭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목격했듯이 권위 또한 이해관계나 경험에, 혹은 단순히 많은 이의 미학적 취향에 반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작품이 위대한 작품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우리 감정에 좌우된다. - P104

천재는 지배자인 반면 다른 얼굴도 갖고 있다. 그는 하인이다. 무엇의 하인일까? 자기 천재성의 하인이다. 그의 천재성은 그를 압도하는 힘이며, 천재성 앞에서 미약한 존재인 그는 그 천재성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힘의 방문을 받는데 그 힘은 뮤즈보다 더 세다. 근현대 천재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그의 안에서 솟아나는, 혹은 그가 하사받는 에너지를 최대한 자유자재로 수용하여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 P115

천재는 재료와 조력자를 통제하는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은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다.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게 고개를 숙이고 군말 없이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다. - P115

우리가 보고 싶은 천재는 자유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유를 표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 P119

『금색 공책 The Golden Notebook』에서 도리스 레싱은 말한다. "신성한 동물인 예술가는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정당화된다." 참고로 레싱은 이 문장을 호의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 P136

드보르는 스타를 "살아 있는 인간이 빚어내는 장엄한 광경"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는 아바타이고 "노동의 부산물을 극대화하여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사회적 노동의 결과를 구현하는 사람이다. 이 노동의 부산물은 그 노동을 초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데 궁극적인 목표란 권력과 휴가다." - P141

우리는 깨우친 존재들이라 생각하지만 정말로 우리 이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아졌을까? - P150

만약 언어가 행동에 영향을 주어야만 그 언어를 반대할 명목이 생긴다면, 정치인은 아니지만 기함할 만한 말을 내뱉는 성난 편견주의자들에게도 모두 면죄부를 주어야 하는 것일까? 반유대주의가 홀로코스트에 직접적으로 기여했을 때만 잘못된 것은 아니다. - P159

이런 종류의 사고는 조건부적 사고다. 우리가 X라는 장소의 Y라는 시간대에 있었다면 Z라는 행동을 했을 것이다. 문법에서는 이런 종류의 구문을 위한 용어도 존재하는데 가정법 과거완료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가정법 과거완료 시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적절한 조건에서는 일어났을 거라 가정한다." - P164

자유주의는 인간의 지속적인 발전을 믿는다. 자유주의의 핵심 사상은 선의 목적론으로 인간은 정의를 향해 나아간다고 믿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결국 우리는 더 좋아지고 나아지리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우리를 역사로부터 분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역사의 힘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역사는 저기 저 멀리, 혹은 우리 뒤에 아니면 우리 밑에 있다. 우리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역사의 정점에 올라와 있는 우리는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다. - P165

우리가 알 만큼 아는 사람이라는 믿음은 —도덕적 감정moral fealing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만—매우 편안한 소파와도 같다. 우리가 정의, 진보, 공정이라는 목적론을 갖고 변함없이 순수하게 나아간다는 생각은 굉장히 유혹적이다. 너무나 유혹적이라 우리의 사고와 나에 대한 인식을 흐린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선한 사고만을 모아 놓은 종합체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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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비난하려는 충동은 사실 정치적 충동이다. 앞서 나는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책임에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 확성기가 될 수도 있다. 편 가르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대 그들. 도덕적인 사람들 대 비도덕적인 사람들. 어떤 사람을 더 잘못되고 그릇된 사람으로 만들면서 어쩌면 우리를 더 옳은 사람, 괜찮은 사람,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 P60

첫 #미투 시즌 중에 피해자들은 서로에게서 힘을 얻어 괴물을 고발하기 시작했고, 광장에서 열리는 괴물 퍼레이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모르던 바는 아니었으나) 이 남자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 말인즉슨 피해자들도 어디에나 있었다. 그동안 침묵하여 보이지 않던 피해자를 생각하면 할수록 ‘괴물‘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이란 단어는 계속 괴물 당사자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이 카리스마 넘치는 매머드 같은 동물은 주변 모든 것은 물론 공기까지 빨아들일 것만 같다. 이 괴물의 이름을 열거하고 그들이 저지른 악행을 나열하는 것은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뭘까? 우리는 어디로 갈까? 혹시 이들을 괴물이라 부르고 이들의 괴물성에 대해 글을 쓰고 이들의 괴물 범죄를 묘사하면서 이 괴물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있지는 않을까? - P63

작품의 얼룩은 철학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용주의의 문제, 평범한 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얼룩이 그만큼 강력한 은유가 된다. 갑작스럽다. 영구적이다. 무엇보다 냉혹할 정도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얼룩은 단순히 그냥 일어나 버린다. 얼룩은 선택이 아니다. 얼룩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아니다.
얼룩 제거도 자발적이지 않다. - P66

나는 수치심에 대해서도 늘 궁금하다. 수치를 당할 위험은 인터넷 생활의 모든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수치는 팬과 몰락한 예술가 사이의 역학 관계에 어떤 역할을 할까. 수치심shame은 동사이자 명사이기도 하다. 내 안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이면서 내가 당신에게 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예술가를 사랑하고 그들과 동일시할 때 그들이 얼룩지면 우리는 그들을 대신하여 수치심을 느낄까? 아니면 나와의 동일시를 끊어 버리고 싶어 그들에게 더 잔인하게 수치심을 주고 더 멀리 내쫓아 버릴까? 어쩌면 수치는 이 유사 사회 관계의 궁극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의 감정과 함께 무너진 우리의 감정은 인터넷 시대에 특화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취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새로운 지형 안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심지어 어떻게 느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 P85

나는 권위의 문제를 놓고 씨름했다.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긴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라는 사람이 대체 뭘 알아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쓴단 말인가? 물론 남들보다 영화를 많이 보긴 했다. 대학에서 영화 이론 수업을 두어 과목 들었는데 나처럼 검은색 옷을 많이 입는 학생은 응당 그래야 하는 줄 알아서였다. 하지만 신문사에 글 쓰는 사람으로 고용되었다. 나는 글을 제법 썼고 그래서 이렇게 남들이 탐내는 직업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절로 나에게 논평할 자격이 부여되는 걸까? 내 직업은 정확히 뭐지?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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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누가 더 명확하게 보고 있었던 걸까? 감독의 여성에 대한 태도와 감독의 과거 여자 문제에 영향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일까. 누군가는 그것을 특권이라고 부르지 않나? 자서전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혹은 프로젝트를 생기 있게 만드는 충동을 알아볼 수밖에—혹은 느낄 수밖에—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난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
자신들이 객관적이라 자부하는 관객들은 정말로 자기 생각만큼 객관적일까? - P56

권위가 말하길, 작품은 작가의 삶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 권위가 말하길, 자서전은 오류라고 한다. 권위는 작품이란 이상적인 상태(역사를 초월한 곳, 고산, 설원, 순수) 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권위는 창작자의 이력과 과거사를 알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을 무시하라 말한다. 권위는 그런 것들에 코웃음을 친다. 권위는 자서전과 역사와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위는 남성 제작자의 편을 든다. 관객이 아니다. - P58

나는 관객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관객은 무언가를 보고 읽고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은 관객이 된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서 관객에게 새로운 임무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현대사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불현듯 씁쓸한 깨달음이 스쳐 간 순간에 관객은 다른 무엇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괴물에 의해 새로운 분노를 계속 키우고 또 키우고 또 키워 가는 집단이 된 것이다. 관객은 괴물을 고발하는 드라마를 보며 전율을 느꼈다. - P59

우리가 도덕적 감정을 느낄 때 자아도취라는 감정은 결코 뒷자리에 오지 않는다. 윤리적 언어의 침대에 감정을 살포시 올려놓기로 하고 그렇게 하는 스스로를 칭찬한다. 우리는 감정에 지배되고 그 감정을 중심으로 언어를 배열한다. 우리의 미덕을 전달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이상하게도 짜릿하게 느껴진다. - P59

나는 인간의 조건이 자신 안의 사악함과 나약함을 은밀하게 의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왜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매혹되곤 할까? 우리 안에, 내 안의 무언가가 그 끔찍함에 공명하면서 내 안에 그 끔찍함이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문제의 괴물을 요란하게 비난하는 드라마에 짜릿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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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윌리엄 엠프슨은 인생이란 결국 분석으로 풀 수 없는 모순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라고 했다. - P20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나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디 앨런은 본인을 변명하기 위해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심장은 원하는 것을 원한다." 오든은 언제나 그렇듯이 같은 말을 조금 더 점잖게 했다. "우리 심장의 갈망은 나선형의 코르크따개와 같으니." 관객의 심장이 원하는 것 또한 나선형의 코르크따개 같다. 우리는 싫어해야 마땅한 사람들을 계속 사랑한다. 우리는 그 사랑을 스위치 끄듯이 꺼버리지 못한다. - P24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일들이 앞으로 몇 년간 더 가시화될 것이었다. 마치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 악당처럼 시야에 잡힐 것이었다. 물론 이 잔인성은 새롭지 않았다. 이곳에 늘 있어 왔다. 우리 중 일부가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 P25

1992년 『타임Time』과의 인터뷰에서 월터 아이작슨이 새로운 관계에 대해 묻자 앨런은 이후 대단히 유명해진 대사를 날린다. 그것은 반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도덕적 결함에 대한 어리석은 일축이었다.
"마음이 원하는 걸 원하는 거죠."
한번 들으면 영원히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원하건 아니건 그 즉시 외우게 된다.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존중하지 않는 자의 발언이다. 불합리함을 오만하게 내세우고 있다. 우디는 말을 이었다. "이런 일에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면 그것으로 끝인 거죠." - P51

나는 앞서 ‘우리‘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 즉 동의를 암시하거나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우리‘에 불만을 표한 바 있다. 하지만 미투 운동에서는 ‘우리‘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 ‘우리‘는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돋보기였고 확성기였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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