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두어 달만 머물면서 두 친구가 식당을 궤도에 올릴 때까지 도울 계획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두어 달이 두어 해가 되고, 두어 해는 이십 년이 되고 말았다. 그 생각을 되도록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어쩌다 생각에 빠져버리면 이따금 무서워진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 P95

그때 리베카는 아직 버티고 있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믿으려 했다. 여러 해가 흐른 뒤에도 가끔 그녀의 눈 속에 얼핏 스치는 그 시절의 다른 자아는 라인벡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 희미해지기 시작해 소도시를 하나씩 지날 때마 다 점점 더 흐릿하게 멀어지곤 했다. - P111

내 침대 밑에 있는 앨범에는 대학 시절부터 뉴욕 생활 초기 몇 해 동안 우리 셋을 찍은 오래된 사진들이 가득하다. […] 이삼 년 전이었나, 마지막으로 앨범을 봤을 때 우리가 너무 달라 보여서, 그때는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사진을 넘겨볼수록 점점 슬퍼지다가 어느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고, 그래서 앨범을 치워야 했다. 그뒤로는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앨범에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맥두걸 스트리트에 있던 내 아파트에서 셋이 함께 앉아 와인을 마시는 사진이다. […] 모두가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얼마나 추운지 보여주려고 입김을 불고 있고, 우리의 숨결은 안개처럼 공기 중에 서린 채 멈춰 있다. 그 사진의 재미있는 점은 맥두걸 스트리트의 그 오래된 아파트가 겨울에 얼마나 추웠는지는 기억이 나지만—난방장치가 늘 고장났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그 사진을 누가 찍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진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을지,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이 지워져버렸을지. - P125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지—오스틴 이주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지—두 주가 지났고, 때로는 이 시간의 기억 역시 지워질지 궁금해진다. 라인벡에서 보내는 우리의 마지막 날들의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지. - P126

잠자리에 들기 전에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새로운 음성메시지 두 통이 와 있다—하나는 리베카에게서, 다른 하나는 데이비드에게서. 지금 확인할 수도 있고 아침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지워버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P127

하지만 그래도 어떤 일들은 아직 확실히 기억할 수 있다. 예전에 뉴욕에서 우리 모두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청춘이던 그때, 나는 늦은 저녁에 대개는 다른 친구들과 저녁 내내 술을 마신 뒤 둘의 아파트에 들르곤 했다. 86번가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들의 아파트 건물 가장자리가 보이면, 두 사람이 아직 깨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깨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늘 어떤 긴장된 설렘을 느꼈다가, 아파트 이층의 불 켜진 창문이 마침내 보이면서 그들이 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찾아오던 그 편안함. 그 때는 그저 소박한 일상 같았지만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건물 아래쪽 입구로 걸어올라가 초인종을 울리면 몇 초 뒤 둘중 하나의 얼굴이 창문에 나타나 나를 내려다보고 웃으며 올라 오라고 손짓할 때의 그 기대감을, 그런 다음에는 인터컴으로 방금 와인을 땄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바깥은 너무 춥지 않냐고 말하던 둘 중 하나의, 대개는 리베카의, 그 목소리를. - P127

흐릿한 조명으로 밝힌 방안에는 스파이더맨 포스터, 이언이 어린이집에서 그린 아름다운 그림, 게시판에 압정으로 꽂힌 삼촌과 이모, 고모, 조부모가 보낸 엽서 등이 가득했다. 이 아이는 좋은 삶을, 내 유년기보다 훨씬 수월한 삶을 살아왔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두 부모가 있었다. 친구도 많았다. 너른 뒷마당도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교육도 받았다. 그런데도 아이에겐 어쩐지 슬픔이, 불행이, 불만족이 있었다. 그건 어디에서 온 걸까? - P153

어쩌면 이언은 이런 불행을 내게만 내보였는지도 모른다. 내 잘못이라고, 나 때문에 자기가 이렇다고 알려주기 위해. 아니면 그보다 훨씬 단순한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저 자기가 뽑은 패에,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에게 실망한 건지도. 아이가 가장 원한 건 그저 다른 삶이었는지도. - P154

"아빠는 뭘 하고 있었어?" 이언은 말했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자기가 물에 빠진 순간, 혹은 그전 오 분이나 십 분 동안, 자신이 튜브나 다른 구명 장비 하나 없이 에어매트 위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육아 블로그를 드나들며 헛소리나 지껄이는 나. 육아 지침과 육아 조언 칼럼을 집착적으로 읽는 나. 그 순간 나는 미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일 말고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식음료 테이블 앞에 있었지만 내 정신은 어디에 있었나? 대체 무엇에 집착하고 있었기에 바로 그 특정한 순간에 부모로서 단 하나의 주요한 책임, 내 아이를 살린다는 책임을 잊어버렸나? 그때를 돌아보려 했지만—바로 그 순간에 내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리려 해봤지만—솔직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물 위의 햇빛, 순간적인 번뜩임, 밝은 섬광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 P158

가끔 밤에 어둠 속에 누워 삶의 이런저런 불안 때문에 뒤척일 때면 내 바로 밑에 있는 그 상자를 생각했다. 폴과 일레인의 삶을 이루던,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서 빼앗은 그 작은 조각들, 그 하찮은 상징물들, 그 기묘하게 개인적인 장신구와 증표들, 시기나 분노 때문에, 혹은 두 가지가 뒤섞인 감정으로 말미암아 무단으로 취해 내 것으로 만든 그 사소한 기념품과 정표를 생각했다. 그 상자를 떠올리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내가 정신이 이상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 P168

"부모가 되면 사람이 바뀐다 어쩐다. 다들 얘기하잖아요." 린지가 말했다. "뭐, 물론 그렇긴 해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흔히 떠올리는 변화와는 다를 뿐이죠. 뻥 뚫린 마음이 채워진다거나 하진 않아요. 무언가를 해결해주진 않죠. 그저 달라질 뿐이랄까요? 때로는 더 좋게, 때로는 더 나쁘게.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전과 다르게." - P181

"어쨌거나," 린지가 물잔을 들며 마침내 말했다. "아까 하신 질문에 답을 하자면, 이 연구 결과가 진실이라 해도 —진실이라는 말이 아니에요—만약 그렇다 해도 중요하진 않아요. 일단 아이를 갖게 되면 그 아이가 없는 상황은 상상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행복이라는 논제는 뭐랄까, 좀 무관하죠." - P183

그날 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를 몇 곡 들은 뒤 리아가 다시 〈Thirteen〉을 틀어달라고 했다.
"이 노래 가사가 무슨 내용인지 알아?" 내가 물었다.
"우리에 관한 거야."
"우리?"
"아빠가 날 학교로 데리러 올 때, 우리가 함께 수영장에 갈 때, 그런 얘기."
나는 내 아버지가 내게 했을 법한 방식으로 리아의 오류를 바로잡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노래가 리아에게 그런 의미라면 그 의미가 맞았다. 내가 뭐라고 그걸 망가뜨리나? - P215

"난 알아, 당신은 이걸 좋아해." 알렉시스가 말했다.
"뭘?"
"이거." 알렉시스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당신이 나와 결혼한 이유라는 걸 알아. 당신은 이걸 좋아해."
나는 아내를 밀어내고 부엌으로 물을 가지러 갔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내내 나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아내가 우리 둘 다 말하지 않았던 우리 사이의 수치스러운 비밀을 정통으로 찌른 것 같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녀의 어떤 측면에 나는 또한 이끌린다는 사실을. - P226

그때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우리가 다른 단계로, 좀더 깊은 단계로, 끝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저멀리 마당 끝자락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그곳 어둠 속 어딘가로 그들이 돌아 왔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세탁실 벽 주위를 느린 동작으로 선회하며 아마도 그 숫자를 점점 불려가고 있을 그들이. - P230

다른 모든 면에서 히메나는 무척 확신이 강하고 침착한 사람 같았지만, 예술에 관해 얘기할 때는 갑자기 모호해지고 작아지고 수줍어졌다. - P249

그해 봄에는 나이들어간다는 것을 한층 실감했다. 물론 거울을 보면 바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느꼈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젊은이들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의식하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가장 큰 슬픔은 바로 그런 인정의 부재에서 왔던 것 같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현실, 유령이 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현실이었다. - P267

히메나는 젊었고, 어쨌든 나보다는 젊었고, 나를 바라봐주었다. 아마도 그 눈길에 연애 감정은 없었겠지만—나 역시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진 않았다—같은 인간으로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후회에 휩싸인 채 인생을 망치지 않으려 애쓰며 이 땅 위를 걷는 사람으로서 나를 바라보았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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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뭔가 놓치고 있다거나 뒤처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보통 그런 느낌은 곧 사라졌다. 가끔 클레어몬트에 사는 부모님이 전화를 걸어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지 정했느냐고. 혹은 내면의 진취성을 북돋아줄 수 있는 책을 보냈는데 잘 받았느냐고 물어도 쉬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서른한 살이었고 내 일을 좋아했다. 내 삶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마야와 함께 있는 한 그저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다른 사람의 예술에 소소 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도 자신이 가는 길의 일부라고, 마야는 언젠가 내게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 P52

나는 잔을 내려놓고 마야를 바라보았다. 벌써 마야가 떠나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빛이 어딘가 달랐다. 아마도 그때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그런 감정을 느낀—이미 가버린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내 인생의 유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 P58

이런 점진적인 멀어짐은 그해 여름 내내 일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그것을 물리적으로 감지했다. 이제 방안에는 다른 기운이,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마야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뒤쪽 배경 어딘가에서, 멀리 기차역 플랫폼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그날 밤 침대에 함께 누워 있을 때 마야가 내게 말했다. "내 말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라도 해봤냐는 거야."
"해봤지." 나는 말했다.
"했다고? 정말?"
"당연하지." 나는 말했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 P58

해가 지나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자주 편지를 쓰던 시기도, 몇 달간, 때로는 일 년 넘게 아무런 연락 없이 지낸 시기도 있었다. 그 세월 내내 마야는 자신의 작품을 거론하거나 그림을 그만둔 이유를 말한 적이 없고 나도 묻지 않았다. 마야에게 그 시절은 단지 인생의 다른 부분인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나와 함께한 인생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현재의 인생과 다른 거라고. - P64

요즘은 예전처럼 마야를 자주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다가도 생각이 날 때는 라이어널의 스튜디오에서 그 수채화들을 발견한 날이 떠오르며, 그날 밤에 그랬듯이 지금도 그 누드화 속 인물이 정말로 마야였을까 궁금해진다.
그게 정말 마야였다면, 라이어널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그랬을까? 직장에서 일찍 돌아온 마야가 그의 스튜디오에 들러 작은 목제 이젤 뒤에 앉은 라이어널 앞에서 옷을 벗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카페에서 일하던 그 오후에 그들은 무슨 대화를 했을까? 수채화 속 여자가 정말로 마야였다면, 아마도 라이어널이 주지 못했을 그 무엇을 그녀는 그에게서 얻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내게서는 무엇을 원했을까? 라이어널에게서 원했던 것과 같은 것일까? 마야와 나는 우리 인생의 두 해에 가까운 나날을 밤마다 나란히 누워 함께 잤는데 지금도 나는 내가 마야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궁금하다. 혹은 마야가 나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 P64

"아까 강연에서 그 여자가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나. 그거 있잖아,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그것이 진정한 자아와 맺는 관계를 기준으로 판단된다는 말, 그리고 진정한 자아와 조응하 는 행동이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는 말. 하지만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더이상 통제할 수 없다면 어떡하지? 자기 몸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면?" - P87

"그러니까, 내 몸이 더는 내 것이 아닐 때 진정한 자아는 어떻게 되느냐고." 내털리는 말을 이었다. "내가 옷을 입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 머리를 스스로 빗을 수 없게 되면?"
"당신,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나는 말했다.
"난 지금 굉장히 진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거야, 데이비드."
그런데 당신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잖아."
"듣고 있어." 나는 대답하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두려운 거야. 이해해. 나도 두려우니까."
"그런데 요점은 바로 그거야." 내털리가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나는 전혀 두렵지 않거든." - P88

그 모든 이후의 일들보다 더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무대 위의 내털리를 보면서 위대함이란, 특출하고 탁월한 재능이란 이런 것임을 깨닫던 순간이다. 물 흐르듯 유연하게, 마치 몸의 연장인 양, 팔의 일부인 양 움직이던 활을 바라보던 기억, 공연중 이따금 눈을 감고 자기 안으로 사라지는 듯하던 내털리, 오르내리는 박자에 맞춰 호흡도 빨라졌다가 느려지고, 어떤 순간에는 꿈이나 무아지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환히 밝아지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그 내밀하고 황홀한 느낌에 취해 나는 내털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공연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연장에 불이 켜지고 객석의 청중 모두가 기립 박수를 치던 장면이 기억난다. 모두가 계속 선 채로 몇 분 내내 박수를 치던 장면이 기억난다. - P90

나는 최근에 내털리가 겪는 증상—어지럼증과 균형감각 이상—을 생각했다. 두 가지 다 파킨슨병과 연관된 증상이라는 사실을 우리 둘 다 알고 있고 의사도 ‘염려스럽다‘고 인정했다. 주초에 의사는 검사—혈액 검사 몇 가지와 MRI—를 더 해보자며 내털리를 불렀고 이제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 P92

그때 나는 스튜디오로 조금 더 가까이, 하지만 내털리는 나를 볼 수 없을 만큼만 가까이 다가갔다. 맨발 아래 시원한 땅이, 등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졌다. 마당에 짙은 어둠이 깔려 강렬하게 빛나는 스튜디오의 조명 외에는 온통 캄캄했다. 나는 더 다가갔다. 내털리가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흔들거나 이름을 부르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내털리가 나를 볼지, 이번 한 번만이라도 문으로 다가와 나를 안으로 들여줄지.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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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이렇게 익숙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만—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심야의 윤리적 딜레마, 그것도 우리 중 하나가 아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니—나는 그들에게 호응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구분하는 시각을 잃어버렸으며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이다. 정당화가 되느냐 아니냐를 따질 일이 아니다. 두 인간과 그들 각각의 가족에게 일어난 아주 슬픈 사건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 말고는 그다지 할 얘기가 없다. - P14

밖에서는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젊은이들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는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된 것일까? 나는 늦은 밤 이 의자에 앉아 나 자신에게 종종 그런 질문을 하고 술을 홀짝이며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하지만 어쩐지 더 큰 목적에서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벽 바로 뒤에서 그림자가 솟아오르고 더욱 거대한 부재의 울림이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이 늘 있었다.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 P21

최근에는 이런 일이 의례처럼 되어버렸다. 밤중에 자다가 깨어 뒷마당을, 세탁실을, 차고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소음의 정체를 알아보는 일, 창문을 단속하고 잠금장치를 더 단단히 채우는 이런 일. 이것이 우리가 들어온 새로운 세상, 우리가 꾸기 시작한 새로운 꿈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꿈에 균열이 생기는 때가 있었다. 과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그 다른 삶이 살짝 윙크를 보내는 때가 있었다. - P24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 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 P26

니코틴 중독의 구덩이로 다시 빠져 버릴까봐 항상 두렵긴 하지만, 그때 내가 한 생각은 그게 아니었고 울기 시작한 이유도 그게 아니었어. 왜 울기 시작했는지, 사실은 잘 모르겠어. 왜냐면, 당신도 알겠지만, 난 울지 않는 사람이잖아. 아마 오륙 년, 혹은 더 오랫동안 한 번도 운 적이 없을 거야. 그래서 눈물을 불러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말로 모르겠어. 어쩌면 요즘 우리 생활의 압도적인 피로가, 그간의 정신없던 하루하루가 마침내 내 뒷덜미를 잡아서일까, 아니면 오루호가 독한 술이어서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추위와 미닫이 유리문 너머에서 깊이 잠든 당신 모습, 그것이 주는 어떤 상실의 감각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단순히 그렇게 오랜만에—그제야 깨달았지만, 사 년 만이었어—담배에 불을 붙여놓고는 연기를 들이마시기도 전에, 담배 연기를 폐 속으로 빨아들이기도 전에,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이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걸, 당연히 그 담배에서는—지금껏 흘러온 시간만으로도 쿰쿰해지고 마르고 쪼그라든 그 담배에서는—내가 기억하는 맛이 전혀 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 P27

누가 알겠어? 더 이상한 일들도 벌어지잖아, 안 그래?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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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상의 투사였을 뿐, 체제의 암살자나 외국인의 하수인이 아니었소이다." 그는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반복해서 말했다, 그렇게.
아니면 울적한 표정으로.
"지금은 사람들이 다들 날 욕하지!" 그리고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매번 자신은 아니라고 현재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은 자신을 처벌함으로써 과거에 자기들이 저질렀던 짓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 말라고 암시하는 것 같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다 어느 정도 파시스트였다고, 법원의 어떤 판결도 그 진실을 절대로 지울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 P255

무엇 때문이었을까? 왜 그랬을까? 그날 밤, 그가 깨어 있었다면 왜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걸까? 두려웠을까? 하지만 정확히 누가, 무엇이 두려웠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전혀 바뀌지 않았다. 다만 그뒤로 그는 망원경에 더 집착했고, 그 맞은편 보도를 감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십자 말풀이나 수수께끼그림 맞추기를 얼마나 잘 하는지 보여주려고 예전처럼 위에서 그녀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낄낄대고 혼자 중얼거렸다. 미친 걸까? 병이 도졌는지 몰랐다. 그런 처지에서 그녀 또한 천천히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결혼을 이어갈 수 있었겠는가?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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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들 브루노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인종 차별의 실질적 효력에 대해 아버지는 착각하고 있었다. 경찰서에서는 여권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전쟁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작동된 덫으로 인해 어떤 도피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유일한 길은 분명히 아무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희망 없는 미래로 데려갈 그런 길이기 때문에, 차라리 불쌍하게 자기를 낮춰서 이 여행의 동반자들이 그러하듯, 외로이 몽상에 잠기거나 절망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자위하는 죄수처럼 슬프고도 비참한 망상에 사로잡히는 편이 더 나았다.
브루노는 여전히 발끝으로 걸으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두 개의 차광 덮개 중 하나를 살짝 열고 뿌연 유리와 덧창 문의 창살 사이로 내다보았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몇 시간 후에는 높이 쌓일 것이며, 온 도시 위로, 감옥과 게토 위로 답답한 정적을 드리울 것이다. - P198

"감옥은 진정한 학교예요." […] "그렇지만 너무 오래 지속되지 않고, 체력이 약해지거나 소모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이에요. 나는 나에게 시련을 아끼지 않은 운명에 감사해요. 외로움과 집중, 자기 자신 말고는 달리 친구가 없다는 점은 은혜로운 일이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의 성향에 맞서 싸우는 것, 그리고 때로는 거기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은 감방의 네 벽 사이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지요. 1930년 감옥에서 나올 때, 나는 내 36호 실을(우연의 일치지요? 내 동생의 집 번지와 똑같아요) 정말 우울한 마음으로 떠났어요. 마치 나 자신의 일부를 거기에 버려둔 것처럼 말이에요. 그 벽마다, 구석마다, 사소한 물건들마다 고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요. 사실 눈물을 흘린 곳, 고통을 겪었던 곳, 희망하고 저항하느라 자기 안에서 많은 능력을 발견하게 된 곳이 바로 가장 애정을 느끼는 곳이에요. 예를 들어, 당신 자신을 봐요. 당신은 같은 종교인 사람들과 함께 떠날 수 있었고, 당신이 겪어야 했던 일을 고려하면 그럴 권리가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다른 선택을 했어요. 여기에 남아 싸우고 견디기를 원했어요. 그리고 이제 당신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어른이 된 이 땅, 이 오래된 도시는 이중적으로 당신의 것이 되었어요. 당신은 이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 P212

젊은 연인은 오십여 미터 앞에서 가고 있었다. 남자는 자전거에 올라탔고 균형을 잡기 위해 이따금 오른손으로 여자친구의 어깨를 짚었다. 브루노는 줄곧 그들을 바라보았다. "누구 일까? 이름이 뭘까?" 입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롭고 닿을 수 없는 존재 같았다. 저기 저들이 바로 인류의 표본이고 원형이다! 그는 절망적인 사랑과 증오로 눈을 반쯤 감으면서 속으로 말했다. 그들의 피는 그보다 좋은 피였고, 그들의 영혼은 그보다 좋은 영혼이었다. 틀리지 않다면 아가씨의 머리칼은 뒤로 붉은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남아 있는 약간의 햇살은 온통 그 리본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있고, 바로 그들이 된다면! - P217

"당신 말을 듣기 잘했군요. 성벽 위에서는 정말 놀라운 석양을 감상할 수 있어요." 클렐리아 트로티가 평온하게 말했다.
브루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다시 한번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혼자 말하듯이. 마치 자신의 꿈을 뒤쫓는 것처럼.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고독에, 격리된 자의 영원한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전율했다.
아마도 언젠가 그녀는 브루노 라테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달을 것이다. 그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은, 혹시 올 수 있다고 해도, 분명 아직 멀리 있었다. - P218

이방인이 지나가고, 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빙긋이 입귀를 올려 가만히 바라본다. 하지만 하루 중 어떤 시간이 되면 그들의 시선은 기묘하게 한곳에 붙잡히고 심지어 숨죽이기까지 한다. 지방 도시의 나른함과 게으름이 상상의 대학살에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순진한 이방인의 발길이 무심결에 뇌관을 건드려, 갑작스러운 지뢰 폭발로 보도의 포장석이 정말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상상한다 한들 말이다. 아니면 1943년 12월 어느 날 밤, 바로 그곳 델라보르사 카페의 주랑 아래에서 저 보도 위로 시민 열한 명을 쓰러뜨린 파시스트의 신속한 기관총 일제사격이 부주의한 행인에게도 똑같이 그 짧고 끔찍한 춤을, 역사가 몇 년에 걸쳐 기리고 기린 이탈리아 내전의 첫 희생자들에게 시체 위로 쓰러지기 직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틀림없이 추게 했을 그 경련과 발작의 춤을 추게 할 것처럼 상상한다 한들 말이다. - P222

방심한 이방인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곧 대화는 약해진다. 눈을 고정하고 숨을 죽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총살이 있던 그 보도를 이용할 사람은 자신이 삼가면 좋을 행동을 하게 되리라는 걸 깨달게 될까? 그는 마침내 여행안내서에서 머리를 들 것인가, 들지 않을 것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이 순간 보이지 않는 피노 바릴라리의 얇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역설적인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올 것인가, 내려오지 않을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사건을 기다리는 것은 때론 지랄 맞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특히 불확실한 운동경기의 결과를 기다리게 되는 것과 똑같다. - P223

이야기는 매번 피노를 향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기대한 게 바로 그런 것 아니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제 노상 약국 위층 아파트 창문가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앉아 있었고, 감히 데스테 성 해자의 보도를 따라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오만하고 동시에 뻔뻔 한 눈빛으로—사람들은 그렇게 확언했다—뚫어지게 노려볼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행복한 눈빛으로! 그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마치 그의 핏속에서 몇 년 동안 음흉하게 잠복해 있다가 마침내 불시에 나타나 다리를 빼앗고, 창백한 삶을 무언가 분명한 것, 자기이해가 가능한 것, 존재 충만한 것으로 전환 시킨 그것이 매독이었던 것 같았다고. 보아서 알겠지만, 그는 강해지고 심지어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결혼 후 해질녘에 두어 번 아내와 팔짱끼고 조베카 대로를 지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인, 구명대에 매달린 조난자 같던 때와는 어쨌든 사뭇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자, 봐요, 젊은 시절 작은 실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셨나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 여기, 보여요?‘ 그리고 촉촉하게 반짝이던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그늘조차 없었다. 일말의 어둠도. - P228

상황이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건, 로마 대로 한복판이나 델라보르사 카페 주랑 아래에서 마주 치는 극소수의 생존 유대인들이나(반대로 유대인들은 다시 다 게토에 틀어박혀 어울리지 않는 의례적인 경건함에 만족 해했지만!), 아니면 가장 열성적인 일부 반파시스트 시민들의 얼굴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공적인 비극이 발생 했을 때만 델라보르사 카페에 들렀는데, 실제로 이제는 마치 흉조를 알리는 새들처럼 늘 그곳에 죽치고 앉아 있어서 거의 매일 보게 되었다. 습관적인 무관심의 가면 아래 그들이 모든 구멍으로 내뿜는 사악한 만족감은 장님이 아닌 이상 모두가 볼 수 있었다! - P230

물론 사람들은 그 외까지, 그 외의 모든 것까지 상상했다.
데스테 성 해자의 난간 옆에 세 무리로 나뉘어 쓰러진 열한 명의 사람들을 보았고, 델라보르사 카페 주랑과 맞은편 보도 사이의 공간에서 오가는 검푸른 셔츠의 부대원들, 일제사격 직전에 약간 한쪽에 떨어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던 시아구라를 향해 "살인자!"라고 외친 파노 변호사의 절망적인 찡그림, 그 대단한 달빛, 자정부터 갑자기 불어온 바람과 함께 도시의 모든 돌멩이를 유리나 석탄 조각처럼 빛나게 만들었던 그 믿을 수 없이 밝은 달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노 바릴라리, 파노 변호사의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지막 순간 어린애 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이제 그 위에서, 그 장면 바로 위 창문 뒤에서 목발에 의지해 떨고 있던 피노는······ 오랜 기간, 1943년 12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천천히 거슬러올라가기 위해 치렀던 전쟁 기간 내내 그랬을 것이다. 집단의 상상력은, 언제나 매번 그곳 그 끔찍한 밤으로 돌아가야 했고, 오직 피노 바릴라리만이 가장 높은 지점에서 볼 수 있었던 총살당한 열한 명의 얼굴을 눈앞에 하나씩 떠올려야 했을 것이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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