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산만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핀잔을 듣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길을 잘못 들거나 지갑을 잃어버리는 일 따위는 적어도 문학의 세계에서는 대개 걱정거리라기보다 웃어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예컨대 키르케고르는 산만함을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다양한 면면을 즐거운 마음으로 섬세하게 감지하는 일이라며 예찬했다. 베르그송은 산만함이란 우리의 인식을 날카롭게 벼릴 수 있는 도구라고 말했다. 프루스트는 앞만 보고 곧장 나아갈 때가 아니라 이리저리 방황하고 헤맬 때 비로소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 P27

다윈처럼 돌연 아름다움에 무감해지는 증상을 ‘쾌감상실증‘이라 하는데, 이런 상태에 빠지면 예술을 경험할 때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습관의 법칙들」이라는 글에서 이 기이한 증상을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미묘하고 다양한 감정의 층위를 느끼기 위해서는 아무런 목적성 없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이것은 곧 습관이 된다고 말했다. 뇌가 음악, 시, 그림과 같이 무용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이나 정보 탐색에만 몰두하면 감정을 표현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뇌의 유연성은 퇴행하고 만다. - P33

윌리엄 제임스는 우연히 다윈의 자서전을 읽고 학생들에게 지식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그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깊고 풍부한 사고를 하려면 감정의 충격파가 집중력을 자극해야 한다. - P33

프랑스 인류학자 알베르 피에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존재 방식은 고릴라나 침팬지와 다르다. 인간은 ‘존재와 부재‘,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동시에 처리하며 일종의 ‘유익한 산만함‘을 실행한다. 이런 ‘불완전한 부분‘ 때문에 인간은 현재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고, 쓸데없는 행동을 하거나 불현듯 딴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 P41

알베르 피에트는 오직 인간만이 한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딴생각에 빠지며, 처음에 품었던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일에는 기꺼이 뒤로 물러설 줄 안다고 말했다. - P43

비극을 겪으면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산만하다가도 심오한 생각에 빠지는 능력을 갖춘 인간은 진지하면서도 가벼울 수 있고, 무언가에 몰두하다가도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기에 균형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 P43

프랑스인에게 ‘산만한 사람‘은 고루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실히 제 역할을 하기보다 몽상에 빠져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는 덤벙거리기는 하지만 매력적인 사람으로 인식된다. 반면 미국인은 산만함을 부정적이고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왜 발터 베냐민이 말한 즐겁고 유쾌한 게으름, "자의적으로 잇따라 일어나는 감각"에 자신을 내맡기는 일에서 그토록 멀어지게 되었을까? - P54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게으름을 휴식의 한 방식으로 보았다. 그는 과도한 집중이 유발하는 긴장감을 해소하고, 세상을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잠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게으름이나 휴식이 수면만큼이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휴식은 "노동이나 쾌락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약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의 자아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고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해준다. 게으름은 "만족감을 주기는 하지만 과도한 몰입으로 결국 정신을 지치게 하는 활동"에 제동을 걸어 집중과 휴식의 균형을 맞춰준다. 따라서 산만함은 악덕이 아니라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산만함이 없으면 정신은 결코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없고, "그 가능성과 역량"을 확장할 수도 없다. - P55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산만함과 집중력의 상호작용, 그 열려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과 담론이 통제 없이 자유롭게 오가며 사람들을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게 할 때, 민족, 자유, 평등과 같은 몇몇 단어들은 그들을 움직이게 한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자유롭게 부유하는 말과 생각의 세계에서 우리는 디지털 기기가 유발하는 산만함과는 전혀 다른 산만함을 경험한다. 이런 산만함의 세계는 우리를 여러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데, 이때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다 해도, 각각의 방향에서 깊이 있는 사유를 하게 된다. 이런 긍정적인 산만함의 핵심은 바로 만족 지연에 있다. 미래의 더 큰 만족을 위해 현재의 즉각적인 즐거움을 뒤로 미룰 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자유롭게 순환한다. - P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시가 도박을 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카드를 접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질문들은 놓아 버린다. 루시는 샘에게 왜 그 짐을 혼자 지려고 했는지, 왜 기회가 있을 때 털어놓지 않았는지, 왜 그렇게 우라지게 오만한지 물을 수도 있다. 왜 그렇게 고집이 센지. 그렇지만. 이 모든 게 반다나나 부츠와 마찬가지로 샘의 일부다. 남들과 다른, 고집스러운 규칙에 따라 사는 샘—엄청난 부를 손에 넣었다가 바다에 던져 버릴 수 있는 샘. 루시는 분노와 공포를 접어 누른다. 남아 있는 것은 기나긴 여행 끝에 더러운 집에 도착했을 때의 익숙한 피로감이다. - P341

루시는 눈을 감고 보려고 애쓴다.
루시는 샘을 본다. 반짝이는.
일곱 살 때의 샘, 드레스와 땋은 머리 차림으로 반짝이는.
열한 살 때의 샘, 상실과 검댕 속에서 반짝이는.
열여섯 살 때의 샘, 이 신념, 단단히 자란 뼈. - P342

루시는 금을 본다. 샘이 버린 금이 아니라, 다른 것. 이 언덕. 이 개울. 그런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속 조각 이상의 가치로 빛나는. 이곳은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겼다. 그럼에도 이 땅은 아름답다. 이곳은 그들의 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샘은 샘 나름의 방식으로 이 땅에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 주려 한 거다. - P342

샘의 턱이 올라간다. 샘의 고집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루시는 긴 세월 속으로 몸을 기울여 샘의 뺨을 친다. 갈매기들이 까악거리며 단단하고 맑은 하늘로 솟아오른다. 갈매기 날개 그림자가 샘의 뺨에 그늘을 만든다. 샘의 눈에. 갈매기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도 그늘이 남아 있다. 루시는 최고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떻게 몸을 돌려 어떻게 후려치는지. 어떻게 온몸과 멀쩡한 다리와 나쁜 삶의 무게를 다 싣는지. 배[腹] 속 침니[沈泥] 속 금만큼 무거운 슬픔에 짓눌린 삶의 무게를 어떻게 손바닥에 전부 싣는지. 그러고 난 다음 어떻게 고함을 치며 말로 사람을 무너뜨리고 움츠러들고 주눅 들게 만드는지. 네가 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해? 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 건 나야. 넌 가치가 없어. 가. 등신. 어떻게 그런 다음 뺨을 쓰다듬어 주는지. 바오베이. - P346

벽 앞에 선 루시는 이야기와 역사책을 두고 샘과 벌였던 어리석은 말다툼을 생각한다. 루시가 진실이 하나뿐이라고 믿을 만큼 어리석었을 때. 루시는 소리 없이 미안하다고 말한다. - P348

루시는 한참 앉아서 물이 빠지는 걸 본다. 루시 자신도 비워진다. 자기와 닮은 얼굴들 사이에 있더라도 혼자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 P351

새로운 곳, 새로운 언어가 있을지는 몰라도—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사람이 손대지 않은 야생의 땅은 남지 않았다.
루시는 파란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걸 읽어 보아야 이제 의미가 없다. - P352

코가 낯설고, 여위고 조용해진 얼굴이 낯설다. 루시가 반짝반짝 빛나는 미모를 갖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남자들이 보면서 가슴앓이를 하게 만들, 마치 탐사봉을 든 것처럼 이끌리게 만들 어떤 아름다움을 지니게 될 것이다. 루시가 잘라 버린 머리카락이 귀신처럼 다시 돌아왔다. 루시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하얀 목은 루시의 것이다. 흠 없는 얼굴은 루시의 것이다. 이제 아무도 루시를 다치게 할 수 없다. 루시의 육신은 불멸이다. 아니 너무나 많은 남자의 이야기 속에서 너무나 여러 번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루시는 이 몸 안에 깃든 귀신이다. 자기가 과연 죽을 수나 있을까 싶다. - P353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일렁이는 빛. 누가 그걸 손에 넣을 수 있는가, 그 거대하 고 미치게 하는 빛, 영원히 멀어지는 신기루, 누구의 소유가 되거나 한곳에 고정되기를 거부하고 빛의 각도에 따라 변하던 풀을. 누가 그걸 알 수 있나, 이 땅이 누구에게 무엇인지를, 죽었거나 살았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운이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무수한 삶이 태어나고 파괴되게 만든 이 땅의 공포와 아량을.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이 그토록 떠돌아다닌 게 아닌가? 가난 때문도 절박함 때문도 탐욕 때문도 분노 때문도 아니고, 눈앞에 땅이 펼쳐지는 한은, 계속 찾아 헤매는 한은 영원히 탐색자이고 패배자가 아닐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 P3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은 어때야 집이지? 뼈, 풀, 열기로 가장 자리가 표백된 하늘—익숙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옛날 책을 넘겨 볼 때처럼 페이지가 뒤죽박죽이고 색이 햇빛과 세월에 바래고 이야기는 기억과 다르다. 그래서 매일 아침이 익숙하면서도 뜻밖이다. 연기 나는 탄광, 교차로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마을과 빈둥거리는 두 소년, 흰 뼈, 온통 재로 변한 마을에 남아 있는 호랑이 발자국, 키가 크고 작은 두 여자아이가 서 있는 다른 교차로, 말라붙은 개울, 다른 교차로, 한숨을 쉬는 풀이 있는 언덕, 검게 변했으나 여전히 흐르는 개울, 노래하는 풀이 있는, 무언가 다른 게 묻혀 있을지 모르는 둔덕, 파헤쳐진 흙 위에 들꽃이 피는 탄광, 또 다른 교차로, 또 다른 술집, 또 다른 아침, 또 다른 밤, 또 다른 정오에 흘러내려 가늘게 뜬 눈을 따갑게 만드는 땀, 또 다른 교차로, 또 다른 새벽에 울부짖는 풀밭 위 무언가 다른 게 묻혀 있을지 모르는 표식 없는 둔덕에서 속삭이는 듯한 바람, 또 다른 교차로, 또 다른 교차로, 또 다른 교차로, 금, 풀, 풀, 풀, 금, 풀, 금— - P314

둘은 느릿느릿 큰 바다 건너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꿈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는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긴 게임의 끝에서 자기 패를 보여 주는 포커 플레이어처럼 잔뜩 긴장한 채로. 루시는 말할 상대가 바람과 풀밖에 없는 그들 땅에 머물고 싶다. 샘은 사람이 바글거리는 거리를 누비고 생선을 맛보고 상인과 흥정하고 싶다. 눈길 받는 게 지겹지 않아? / 거기에 가면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게 아닐 거야. 나를 제대로 볼 거야. - P317

루시는 말에서 내리고, 욕을 하며 땀을 흘리는 샘을 언덕 꼭대기로 끌고 간다. 샘에게 위를 보라고 한다. 구름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맴돌기 시작한다. 전에 루시는 길을 잃을까 겁나면 하늘을 보라고 배웠다. 지금 루시는 샘에게 하늘에서 아름다움을 보라고 가르친다. 샘의 짜증이 경이감으로 바뀌면서 땅도 달라진다. 같지만 달라진다. - P318

어쩌면 이동 속도가 빨라진 게 루시가 사랑을 닮은 슬픔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메마른 누런 언덕이 고통과 땀과 헛된 희망밖에는 안겨 주지 않았음에도—이 언덕을 아니까. 루시의 일부가 거기 묻혀 있고 일부가 그 안에서 사라졌고 일부가 그 안에서 발견되고 만들어졌다. 너무 많은 부분이 이 땅에 속한다. 탐사봉이 이끌리는 것처럼 가슴이 아픔에 끌린다. 큰 바다 건너 사람들은 그들과 닮았을 테지만 그들은 이 언덕의 형상, 풀이 쏴 우는 소리, 흙탕물의 맛을 모른다. 눈과 코가 외면을 이루듯 루시의 내면을 이루는 이 모든 것을, 어쩌면 이동 속도가 빨라진 게 루시가 이미 이 땅을 잃을 일을 애도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시에게는 샘이 있으니까. - P318

루시는 나중에—말[言]이 그렇게 위험스럽지 않을 때, 말이 샘을 불안에 떨게 만들지 않을 때—묻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왜 그렇게 경계하며 사냐고. 질문은 배에 올라타 주위 사방에 대양이 펼쳐질 때까지, 새로운 언어, 자기들을 다치게 하지 않은 언어를 배울 시간이 얼마든지 있을 때까지 미뤄도 된다. - P319

나중에 루시는 서쪽 끝에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될 것이다. 바다가 살아날 때가, 안개가 등대 불빛을 감출 때가 있다. 다른 것도 아닌 언덕이 치명적일 때가 있다. 이 도시에 언덕 일곱 개가 있는데 몇 해마다 한 번씩 개가 벼룩을 떨어내듯 부르르 집을 떨군다. 나중에 루시는 저 아래 파도 거품 안에 버펄로 뼈보다 훨씬 더 많은 뼈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나중에 루시는 안개가 걷히고 나면 단단하고 투명한 빛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 P322

안개가 두 사람을 둘러싼다. 바람의 축축한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훑는다. 낮은 땅이 웅얼거리며 옛 꿈처럼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단편을 기억한다. 571이라고 적힌 집, 구슬 하나가 반짝이는 나무 그루터기, 파란 벽 앞의 노란 꽃. 금이 간 문, 굶주린 고양이 울음. 대기 중인 마차에서 고개를 푹 박고 자는 마부. 불이 켜진 창문에 맺힌 물방울. 도망가는 아이의 발목. - P323

루시는 예쁜 액자 속 여자들에게 걸어간다. 여자들이 여전히 꿈쩍도 않자, 루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치맛자락을 잡는다. 천 찢어지는 소리가 적막 속에서 비명보다 더 요란하다. 아름다운 얼굴들이 루시를 돌아본다. 숙련된 고요함이 처음으로 깨진다. 분노가, 그리고 모욕, 두려움, 재미, 경멸이 루시를 향한다. 이 여자들은 루시가 들어왔을 때 루시를 쳐다보고 꿰뚫어 봤다. 루시는 오는 길에 샘이 한 말을 생각한다. 쳐다보는 것과 진짜로 보는 것의 차이. - P327

"내가 선생님처럼 질문 하나 해도 될까—아까 우리 애들이 이야기 같다고 했었잖아. 왜 그렇게 말했지?"
"텅 비어 있어요." 루시가 파란 책을 보며 말한다. 대답이 엘스크 마음에 든다면 그 책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루시는 움직임이 없는 얼굴, 저마다 다르지만 완벽히 똑같은 여자들을 생각 한다. "종이가 생각나요." 아니면 맑은 물.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 이따금 보았던 표정. - P330

"바오베이." 루시가 말을 꺼내다가 멈춘다. 지금은 다정한 말을 나눌 때가 아니다. 묵은 상처를 건드릴 때도 아니다. 루시는 딱딱한 빵을 찢는다. 빵을 뜯다가 껍질 조각이 손톱 아래로 파고든다. "전에 있었던 일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어. 우리가 바다를 건너가면, 그러면 마치 마치—" 오래된 약속이 루시의 입을 가득 채운다. 달콤하고 씁쓸하다. "꿈 같을 거야. 거기에서 깨어나면 이 모든 일은 다 꿈이 될 거야." - P335

기억나는 가장 슬픈 일을 떠올려 봐. 나한테 말하지는 말고. 몸 안에 담아 둬, 루시 걸. 그게 자라게 해. 도박꾼들 사이에서 루시는 그렇게 한다. 루시의 어깨에 얹힌 샘의 손이 샘이 지닌 슬픔의 무게까지 더한다. 그들은 탐광꾼의 자식들이다. 어디에 있는지 느껴 봐, 루시. 그냥 느껴. […]
그 밤이 끝날 무렵 작은 돈 무더기가 생긴다.
앞으로 올 힘겨운 날에 루시는 이걸 기억할 것이다. 적어도 하룻밤 동안은, 둘이서 언덕에 금이 있게 만들었다는 것을. - P337

샘은 고집이 세다. 대답을 안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한 눈으로 루시를 쳐다볼 뿐. 스위트워터에서 샘이 했던 질문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메운다. 외로울 때 없어? 지금껏 내내 루시는 샘이 이기적이라고 했다. 지금 보니 자신밖에 보지 못한 사람은 루시였다. 루시는 같은 걸 샘에게 묻지 않았다. - P3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언덕에는 얼마나 많은 황금이
C 팸 장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보다 ‘살아가야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샘이 으르렁거리고 루시는 움찔한다. 그 목소리에, 뻗을 태세의 주먹처럼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제야 루시는 샘이 저녁 식사 때 했던 이야기가 진짜로 믿긴다. 카우보이이자 산 사람이자 광부인 샘을 볼 수 있다. 루시가 모르는 거칠고 단단한 남자. - P300

루시가 샘을 노려본다. 손을 진흙 속에 푹 담근다. 익숙한 냄새, 광산 지역 물에서 나는 듯한 냄새가 주위를 감싼다. 전에는 투덜거리며 그 물을 마셨다. 지금은 깊이 냄새를 들이마신다. 루시는 이 진흙을, 이 삶을 선택한다. 이제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 - P304

미모는 무기야. 마가 말했다. 신세 지지 마. 마가 말했다. 똑똑한 내 딸. 마가 말했다. 선택지가 많아야 해. 마가 말했다. 금을 나누고, 가족을 나눈 마. - P305

그동안 내내 루시는 마의 사랑을 힘든 일을 이겨 내는 주문 삼아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게 이제는 짐이 되었다. 샘이 어떤 진실은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게 당연하다. 루시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는다. 왜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하는 걸까?
그때, 피가 귀로 쏠리고 머리가 무겁게 처질 때, 마의 트렁크가 떠오른다. 그 무거운 트렁크를 샘이 혼자 힘으로 넬리 위에 얹 었다. 샘은 바의 사랑이라는 짐도 져야 했다. 그런데 그날 루시는 그 짐을 나눠 지지 않았다. 그랬어야 했는데. 자기 자리를 지켰어야, 머물렀어야 하는데. 그날, 그리고 오 년 전 강둑에서의 그날, 그리고 오늘. 루시는 내내 샘 곁에 있었어야 했다. 루시는 일어선다. 마지막으로 강에 돌을 던져 물 위의 이미지를 조각낸다. 그냥 물일 뿐이다. - P306

루시는 두려워하면서 샘을 등지고 무릎을 꿇는다. 칼이 두려운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두렵다. 뻣뻣하던 머리카락이 몇 해 전부터 매끈해지고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마가 그럴 거라고 했던 대로. 자기도 마처럼 허영심이 있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이기적 이면? - P307

루시는 바가 추구하던 세상과 마가 원하던 세상 사이의 공간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바의 세상은 사라진 세상, 현재와 미래를 상대적으로 칙칙해 보이게 만들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마의 세상은 너무 좁아서 한 사람밖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루시와 샘이 같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 거의 새로운 땅. - P307

칠흑 같은 어둠. 재칼의 시간—미망의 시간은 지나갔다. 지금이 어떤 짐승의 시간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P307

샘이 칼질을 멈추자 루시는 일어선다. 머리가 훨씬 가볍다. 머리채가 무릎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루시는 기억해 낸다. 이 시간은 뱀의 시간이다. 루시의 머리카락이 땅바닥에서 힘없이 구불거린다. 루시가 생각했던 것에 비해 너무 사소해 보인다. 루시가 머리카락을 발로 걷어찬다. 샘이 말린다.
샘이 땅을 파기 시작한다.
뭘 하는지 깨닫고 루시도 같이 판다. 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마의 말이 옳지도 않았지만. 미모는 무기지만, 그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의 목을 조이는 무기다. 샘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했고 루시에게도 그랬다. 마가 두 딸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길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무덤을 깊이 파고 묻는다. 흙을 넣고 다지기 전에 샘이 은 동전 하나를 떨어뜨린다. - P307

"이젠 상관없는 일이야." 샘이 땅 소리를 내며 팬을 내려놓는다. "멀리 갈 거니까. 그동안 돌아다니면서 내내 정착할 곳을 찾았는데 그럴 만한 곳이 없었어. 왜 그런지 아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 이제 우리 땅을 가질 때가 됐어. 여기엔 등 뒤를 계속 돌아볼 필요가 없는 곳, 훔친 땅이 아닌 곳, 버펄로나 인디언들의 땅이 아니었던 곳, 다 고갈되어 버리지 않은 곳이 없어. 이번에는 우리가 땅을 사더라도 아무도 막지 않을 곳으로 갈 거야." - P310

샘이 움찔한다. 루시의 말이 주먹을 날리기라도 한 듯. 산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순간 샘이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마처럼 보인다—강인함 아래 흐르는 슬픔, 땅 밑으로 흐르는 보이지 않는 강처럼. 질문으로 이미 충분히 상처를 주지 않았나? 루시는 혀를 깨문다. 지금 샘을 보니, 저렇게 자랐는데도 나약하게만 보인다. 부드러운 목을 감추는 반다나. 비밀 주머니가 있는 바지, 이 더위에도 단추를 다 채워야 하는 셔츠. 천 한 장에 감춰진 샘이 어찌나 위태해 보이는지. - P311

루시는 입을 다물기로 한다. 출발할 무렵에는 샘의 손이 다시 차분해진다. 두 사람은 질문을 묻어 놓고 떠난다. 무덤 두개를 두고 떠나는 것처럼. 어쨌거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멀리 가고 나면 이 땅이나 어떻게 이 땅을 떠났는가 하는 이야기는 한낱 역사가 되고 말 터인데? - P3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