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이 으르렁거리고 루시는 움찔한다. 그 목소리에, 뻗을 태세의 주먹처럼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제야 루시는 샘이 저녁 식사 때 했던 이야기가 진짜로 믿긴다. 카우보이이자 산 사람이자 광부인 샘을 볼 수 있다. 루시가 모르는 거칠고 단단한 남자. - P300
루시가 샘을 노려본다. 손을 진흙 속에 푹 담근다. 익숙한 냄새, 광산 지역 물에서 나는 듯한 냄새가 주위를 감싼다. 전에는 투덜거리며 그 물을 마셨다. 지금은 깊이 냄새를 들이마신다. 루시는 이 진흙을, 이 삶을 선택한다. 이제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 - P304
미모는 무기야. 마가 말했다. 신세 지지 마. 마가 말했다. 똑똑한 내 딸. 마가 말했다. 선택지가 많아야 해. 마가 말했다. 금을 나누고, 가족을 나눈 마. - P305
그동안 내내 루시는 마의 사랑을 힘든 일을 이겨 내는 주문 삼아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게 이제는 짐이 되었다. 샘이 어떤 진실은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게 당연하다. 루시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는다. 왜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하는 걸까? 그때, 피가 귀로 쏠리고 머리가 무겁게 처질 때, 마의 트렁크가 떠오른다. 그 무거운 트렁크를 샘이 혼자 힘으로 넬리 위에 얹 었다. 샘은 바의 사랑이라는 짐도 져야 했다. 그런데 그날 루시는 그 짐을 나눠 지지 않았다. 그랬어야 했는데. 자기 자리를 지켰어야, 머물렀어야 하는데. 그날, 그리고 오 년 전 강둑에서의 그날, 그리고 오늘. 루시는 내내 샘 곁에 있었어야 했다. 루시는 일어선다. 마지막으로 강에 돌을 던져 물 위의 이미지를 조각낸다. 그냥 물일 뿐이다. - P306
루시는 두려워하면서 샘을 등지고 무릎을 꿇는다. 칼이 두려운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두렵다. 뻣뻣하던 머리카락이 몇 해 전부터 매끈해지고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마가 그럴 거라고 했던 대로. 자기도 마처럼 허영심이 있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이기적 이면? - P307
루시는 바가 추구하던 세상과 마가 원하던 세상 사이의 공간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바의 세상은 사라진 세상, 현재와 미래를 상대적으로 칙칙해 보이게 만들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마의 세상은 너무 좁아서 한 사람밖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루시와 샘이 같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 거의 새로운 땅. - P307
칠흑 같은 어둠. 재칼의 시간—미망의 시간은 지나갔다. 지금이 어떤 짐승의 시간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P307
샘이 칼질을 멈추자 루시는 일어선다. 머리가 훨씬 가볍다. 머리채가 무릎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루시는 기억해 낸다. 이 시간은 뱀의 시간이다. 루시의 머리카락이 땅바닥에서 힘없이 구불거린다. 루시가 생각했던 것에 비해 너무 사소해 보인다. 루시가 머리카락을 발로 걷어찬다. 샘이 말린다. 샘이 땅을 파기 시작한다. 뭘 하는지 깨닫고 루시도 같이 판다. 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마의 말이 옳지도 않았지만. 미모는 무기지만, 그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의 목을 조이는 무기다. 샘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했고 루시에게도 그랬다. 마가 두 딸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길고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무덤을 깊이 파고 묻는다. 흙을 넣고 다지기 전에 샘이 은 동전 하나를 떨어뜨린다. - P307
"이젠 상관없는 일이야." 샘이 땅 소리를 내며 팬을 내려놓는다. "멀리 갈 거니까. 그동안 돌아다니면서 내내 정착할 곳을 찾았는데 그럴 만한 곳이 없었어. 왜 그런지 아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 이제 우리 땅을 가질 때가 됐어. 여기엔 등 뒤를 계속 돌아볼 필요가 없는 곳, 훔친 땅이 아닌 곳, 버펄로나 인디언들의 땅이 아니었던 곳, 다 고갈되어 버리지 않은 곳이 없어. 이번에는 우리가 땅을 사더라도 아무도 막지 않을 곳으로 갈 거야." - P310
샘이 움찔한다. 루시의 말이 주먹을 날리기라도 한 듯. 산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순간 샘이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마처럼 보인다—강인함 아래 흐르는 슬픔, 땅 밑으로 흐르는 보이지 않는 강처럼. 질문으로 이미 충분히 상처를 주지 않았나? 루시는 혀를 깨문다. 지금 샘을 보니, 저렇게 자랐는데도 나약하게만 보인다. 부드러운 목을 감추는 반다나. 비밀 주머니가 있는 바지, 이 더위에도 단추를 다 채워야 하는 셔츠. 천 한 장에 감춰진 샘이 어찌나 위태해 보이는지. - P311
루시는 입을 다물기로 한다. 출발할 무렵에는 샘의 손이 다시 차분해진다. 두 사람은 질문을 묻어 놓고 떠난다. 무덤 두개를 두고 떠나는 것처럼. 어쨌거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멀리 가고 나면 이 땅이나 어떻게 이 땅을 떠났는가 하는 이야기는 한낱 역사가 되고 말 터인데?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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