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은 것들은 우리의 내부에서 부패한다.
골리아르다 사피엔차

어떤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아빠는 농담조로 말했다
"여자들이 한 일 같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겪은 고통과 피해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하더라도 법에 기입된 것이 아니면 그것은 무가치하게 여겨진다. 법에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법에 근거가 없다는 것은, 법의 언어로 그 고통을 의미 있게 들리게 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니라 ‘소리‘에 불과하다. 소리를 들으며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정심밖에 없다. "안됐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 법에 호소했을 때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다. 자신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절벽에 부딪히면 사람은 더욱 더 격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고통 그 자체도 무의미한데 고통을 해결하려는 자신의 호소조차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사람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극단의 고통을 겪게 된다. - P101

민중신학자 정용택은 이를 "고통에서 고난으로의 전환"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가 당한 고통의 실존적 무의미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고통이 사회적·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고난‘이 될 때 사람은 비로소 무의미를 딛고 ‘겨우‘ 일어나는 근거를 만들 수 있다. - P102

고통의 특징이 ‘호소‘라고 한다면,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서 비롯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 P106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불가능에 좌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주문은 이 길을 봉쇄한다. - P114

고통은 거의 대부분 비교 불가능하다. 비교를 통해 자기가 좀더 나은 상태임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대개 실패한다. - P115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에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절대성 자체가 ‘공통의 것‘이 되는 것이다. - P125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서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것이 통하게 된다. - P126

왜 남성의 노동은 높게 평가받고 여성의 노동은 보조적인 것으로 취급되는가. 왜정신노동은 육체노동보다 값어치가 더 비싼가. 사실 한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이 인정 체제를 바꾸는 것과 같다. - P1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식물과 화분의 세계는 신비로웠다. 인간의 세계와는 달랐다. 인간의 세계가 ‘말‘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식물과의 관계는 ‘손‘으로 이뤄졌다. 말로 이뤄진 인간의 세계가 불안하고 언제든 배신으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라면 식물과 만든 세계는 정직했다.


말이 필요 없는 관계였다. 말이 없더라도 교감하고 소통하고 구축할 수 있는 관계였다. 말에 의해 배신당하고, 배신의 고통을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또 다른 고통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에게 식물은 ‘손‘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알게 해주었다. 그 관계는 배신이 없는 깨끗한 세계였다. - P69

여기에는 다시 배신당하고 싶지 않다는 절망이 있었다. 그 배신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말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했다. 말하고 싶지 않음, 그러나 말하고 싶음. 말을 하지 않으면 아예 이해를 받을 수 없지만, 말을 하면 이해가 아니라 오해만 쌓이고 거리가 멀어졌다. 아예 이해를 기대하지 않는것이 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될수록 자신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말할 수 없는, 그러나 살아 있기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식물‘뿐이었다. - P71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 측면뿐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모색해야 할 일은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해결하는 것이다. 실존적 측면을 ‘사회적‘으로 나누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고통의 실존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그 고통의 사회성을 환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 혹은 도구로서 의미가 있다. - P76

선아가 ‘분리‘라는 말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너무 확실하게 설명해버리는 이 단어는 종종 선아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했다. 모든 것이 다 ‘마음‘과 ‘분리‘의 문제로 귀결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두 단어는 확실히 그로 하여금 문제를 지나치게
‘심리학화‘하여 바라보게 만들었다. 문제의 사회적 측면이나 실존적 측면을 직면하지 않고 오히려 회피하게 만들고 있었다. 또한 말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선아는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 P87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 언어가 무너질 때마다 선아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럴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흐느끼고, 한숨 쉬고, 절규하는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는 다시 ‘말‘의 세계에서 ‘소리‘의 세계로 돌아갔다. - P88

몇몇 모임은 당사자들이 겪은 사안을 지나치게 빨리 사회학적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렇게만 인식하게 만들어버린다그 결과 고통의 ‘개별성‘은 앙상한 것으로 날아간다. 고통을 개인화하는 잘못을 경계하면서 제거되지 않는 고통의 실존적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다. 사회학적 언어는 고통의 고유함과 개별성보다는 사회성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당사자 개개인의 구체적 사연들이 종종 ‘공감‘이라는 말로 너무 빨리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개별성이 ‘사연‘이나 ‘사례‘로 여겨진다. 나눔의 자리에서는 개별성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경청‘되는 것같지만, 그것이 언어화되는 자리에서는 선언적인 사회학적 언어만 남는다. - P90

"인간의 언어로는 지금 내 심정이나 상황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어.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지. 아무리 말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거야." - P95

고통에 직면하여 언어를 잃어버리는 순간 파괴되는 집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말을 잃어버리거나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 붕괴되어버리는, 다시 지을 수 없는 공동의 집은 세 가지 차원이다. 하나는 사회적 차원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들과 짓는 집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안에서 자기 자신과 거하는 ‘내면‘이라는 집이다. 고통의 끔찍함은 이 모든 거주지를 파괴하고 사람을 존재로부터 추방해버린다는 것이다. - P1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좋을 때든 무너져 있을 때는 항상 가까이에서 나를 돌보고 염려해주었던 이들이 있다는 데 감사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삶의 시간을 만들어 나가는 거, 그게 기쁨이에요." 이처럼 고통은 "왜 하필 내가?"라는 억울함을 거치면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자기에 대한 앎‘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 P39

자기에 대한 앎이란 그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겪는 자기를 알고 자기를 다루는 과정이지 고통의 원인을 알고 제거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 대한 삶은 고통의 이유를 원인으로 착각하여 마치 자기를 통제하는 것을 통해 고통의 원인을 없앨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상태에서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만 채근하며 원인을 더 키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거되지 않은 원인은 대개의 경우 더 악화되고 더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닥쳐온다. 그럴 때 자기에 대한 앎은 무력하게 무너진다. - P40

무엇이 가치가 있다고 여길 때는 그것이 어떤 좋은 열매, 즉 교훈을 남길 때다. 또한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끝이 있고, 그 끝이 더 좋은 열매를 남길 때 우리는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고통 역시 가치가 있다면 교훈을 남기며 끝이 나야 한다. 교훈을 바탕으로 자기 삶의 성장을 꾀할 수 있을 때 고통도 가치가 있다. - P44

정도가 압도적인 고통, 결말이 죽음에 이르는 절대적인 고통, 전적으로 자기와는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고통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런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삶에도 이르게 하지 못한다. 설혹 자기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그 고통을 다루고 해결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 소위 말하는 ‘정신 승리‘에 불과하다. - P48

고통이 몸과 마음을 모두 장악하면 눈앞에 다른 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고통만이 타자이다. 그러나 그 타자와 주체의 자리는 바뀌어 있다. 고통이 주체가 되어 타자가 된 자신을 응시하고 이끌어간다. 귀신 들린 몸이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는 내 몸이 아닌 이 몸을 부수어버리고 싶고 절규하고 싶어진다.


고통은 소리치는 것 말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말은 고통을 묘사하고 설명하고 분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만이 아니다. ‘고통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고통의 가치와 의미다. 억지로 외부로부터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면 고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통이 만일 무의미한 것이라면 고통을 통해 우리는 어떤 내면과 세계도 지을 수 없다. 말을 통해 소통되는 ‘의미‘가 있어야 비로소 내면과 세계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54

결국 그가 알게 된 것은 이 고통을 말로 묘사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에게뿐만이 아니다. 종종 자기 스스로도 이게 정말 그렇게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병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자기 몸이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 별것 아닌 게 아니었다. 몸은 아니 ‘뇌‘는 이미 별것 아닌 게 아니라고 판정해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의식적으로 부정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면 할수록 그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속상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군으로부터 장수를 빼앗으면 군대를 혼란에 빠뜨릴지는 모르나 한 사나이로부터 그의 지조를 빼앗지는 못한다." - P398

기본적인 틀에 가까울수록 삶은 감미로운 법이다. 당신은 낭비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고차원의 법칙을 따르는 삶을 살면 저차원의 세속적인 것들에는 초연하게 된다. 지나친 부를 소유하면 불필요한 것들만 사들이게 된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 P398

우리 눈을 멀게 하는 빛은 우리에게 어둠이다. 깨어 있는 자만이 동트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앞으로도 수많은 날들이 밝아오리라. 태양은 한낱 샛별에 불과하다. - P404

결국 권력이 시민에게 있을 때 다수 의견이 채택되고 이렇게 채택된 의견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현실적인 이유는, 다수의 의견이 옳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거나 다수 의견을 따르면 소수에게가장 공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수가 물리적으로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 P409

우리는 통치를 받는 한 나라의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이어야 한다. 인간은 법을 존중하기보다는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권리란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의무를 말한다. - P409

군인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신들이 관여하게 된 일이 저주스러운 일임을 안다. 그들은 모두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그들은 어떤 존재인가?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부도덕한 권력자에 봉사하는 움직이는 요새이자 탄약고인가? 해군 기지에 가서 해병을 한번 보라. 정부가 마술을 부려 만들어낸 듯한 그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그림자이자 흔적에 불과하며, 육신은 살아 있어도 이미 몸의 절반 이상이 땅속에 묻힌 채 장송곡을 듣고 있는 인간이나 다름없다. - P410

"나는 태생이 고귀하므로 소유당하지 않고
통제받지도 않으며,
이 세상의 어떤 주권 국가의
하인이나 도구로도 이용되지 않는다." - P411

나는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정치적 조직을 한순간도 나의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 - P411

흔히들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아직 상황을 개선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선이 더딘 진정한 이유는 다수보다 실제로 더 현명하거나 낫다고 할 만한 소수마저 없기 때문이다. 다수가 나 자신만큼 선해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딘가에 선한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람이 전체 집단을 발효시킬 효모이기 때문이다. - P413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투표권을 행사하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반드시 승리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다수의 결정에 맡긴다. 따라서 다수로 결정된 의무는 편의성 여부를 결정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정의를 위해 던진 한 표는 정의를 수호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않는다. 정의가 승리해야 한다는 투표자의 의사를 그저 미온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문제를 운에 맡기려 하지 않으며, 다수의 힘에 의해서 결정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집단 행동에는 미덕이 존재하지 않는다. - P414

부당한 법은 존재한다. 부당한 법을 준수해야 하는가, 개정될 때까지 준수하는 한편 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아니면 즉시 위반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현재와 같은 정부 아래에서 법 개정을 위해 다수를 설득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항을 하면 현재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항으로 상황이 악화된다면 그 책임은 정부에 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장본인은 바로 다름 아닌 정부다. 정부는 왜 개혁의 필요성을 예견하고 실행하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정부는 왜 현명한 소수의 견해를 겸허히 받아들이지 않는가? 정부는 왜 다치기도 전에 울고불고 엄살을 부리며 저항하는가? 정부는 왜 시민들이 정부의 잘못을 감시하고 지적하도록 권장하고 시민보다 솔선수범하지 않는가? 정부는 왜 늘 예수를 처형하고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축출하고 워싱턴과 프랭클린을 반란군으로 매도하는가? - P418

법이 본질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역할을 하도록 강요한다면 그 법은 즉시 위반하라. - P419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태어난 이상 좋든 싫든 이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할 필요는 없다.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무엇이든 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할 필요는 없으므로 피치 못하게 잘못을 저지를 이유도 없다. - P419

한 표를 행사할 때 단순히 종이쪽지를 던지지 말고 자신의 모든영향력을 온전히 한 표에 담아 던져라. 다수에 순응하는 한 소수는 무력하며 그런 소수는 진정한 의미의 소수가 아니다. 소수가온 힘을 다해 저항하면 다수는 당해내지 못한다. - P422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하다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귀를 누린다면 이 또한 부끄러운 일" - P424

내게는 정부에 대한 불복종으로 받는 처벌보다 정부에 대한 복종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가 더 크다. 정부에 복종하게 되면 나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 것처럼 느껴지리라.
. - P425

왜 교직자인 나는 그 성직자를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하고, 그 성직자는 교직자인 나를 위해 세금을 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425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으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가리라. 누가 가장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수는 어떤 힘을 갖고 있는가? 내가 준수하는 법보다 상위법을 준수하는 사람들만이 나를 강제할 수 있다(상위법은 민법이 아니라 정신적인 법, 즉 인간의 양심을 말한다). - P4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