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응시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글쓰기가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사방에서 공포가 밀려든다. 그러나 공포가 나를 덮쳐 집어삼키기만을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두워질 때까지 글을 쓸 테고, 이 새롭고 서툰 작업에 피로해진 나의 머리는 텅 빈 채로 잠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침은 두렵지 않다. 다만 어스름한 기나긴 오후가 두려울 뿐이다. - P6

나는 말을 걸며 개를 안심시켰다.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순간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 우울하고 습한 계곡의 적막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너도밤나무 나뭇잎 사이로 초록빛 햇살이 비치고 돌 바닥이 거의 다 드러난 얕은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졸졸 울리던 계곡의 적막을. - P20

나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내가 조금 전 계곡에서 보았던 광경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그건 도무지 사실일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만에 하나 일어난다 해도 산속의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에서, 유럽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햇빛 속에 가만히 앉아서 나비를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 P21

나는 걱정에도 절망에도 빠지지 않았다. 억지로 걱정거리나 절망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내 상황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를 알 만큼은 나이를 먹었다. […] 나는 첫 번째 가정을 믿기로 했다. 그래야 누군가가 며칠 뒤 나를 이 산속 감옥으로부터 구해줄 거라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이미 누군가가 나를 구해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확실히 그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나는 한동안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만큼은 현명했다. - P26

내가 해둔 모든 조치들이 인간을 겨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조치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내가 경험했던 위험이란 모두 인간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기 때문에 내 관념을 갑자기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생애를 통틀어 유일한 적은 인간이었다. - P27

불현듯 이 화창한 5월의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하루를 살아 넘겨야 하며 도망갈 길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침착성을 잃지 않으면서 버텨내야 할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살아남아야 했던 날이 그날 생애 처음 닥친 것도 아니었다. 빨리 저항을 단념해야 더 견딜 만해질 것이었다. 전날의 멍함은 이제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전에 없이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 P33

그것이 만약 죽음이었다면 죽음은 매우 갑작스럽고도 부드럽게, 사랑스럽다고 말해도 좋을 방식으로 닥쳐 왔던 것이다. 만약 내가 후고와 루이제를 따라 마을에 갔더라면 나의 상황은 오히려 지금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 P37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소가 나에게 축복인 동시에 커다란 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멀리 나가 돌아다니는 일도 힘들 것 같았다.
소 같은 가축은 먹이를 챙겨주어야 하고 젖을 짜주어야 한다. 그래서 붙어 앉아 보살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나는 소의 주인이자 소의 노예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소를 원하지 않았더라도 그곳에 소를 남겨두고 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는 그만큼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 P42

선량한 후고, 그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그는 지금도 어느 주점에서 레모네이드를 한 잔 앞에 놓고 앉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떨쳐버리고 말이다. 이제는 회의와 회의 사이를 떠밀려 다닐 필요도 없다. - P46

나는 소에게 이름을 하나 붙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벨라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은 이런 산골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짧고 부르기 좋았다. 소는 자기 이름이 벨라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고 내가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렸다. 소가 전에는 어떻게 불렸는지 궁금했다. 디른들, 그레틀, 아니면 그라우에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소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었다. 그 소는 산속에 있는 유일한 소였고, 어쩌면 온 세상에 한 마리밖에 없는 소인지도 몰랐다. - P50

사실 룩스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어놓은 이름이다. 여하튼 오래전부터 계곡의 사냥개들은 모두 룩스라고 불렸다. 진짜 살쾡이는 씨가 마른 지 오래기 때문에 산속에 사는 사람들도 살쾡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잘 모를 것이다. 룩스의 선조들 중 하나가 마지막 남아 있던 진짜 살쾡이를 죽이고 룩스라는 이름을 전리품으로 얻었는지도 모른다. - P50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랬다. 구조의 손길을 더는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이 어리석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이성과 믿음의 모든 논리를 벗어난 희망이었다. - P51

오늘 내 아이들을 떠올려보면, 아이들은 다섯 살짜리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이들은 그 나이에 벌써 내 인생에 서는 멀어져갔던 것 같다. 아마도 자식들이란 그 나이가 되면 으레 부모의 인생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서서히 하숙인으로 변해간다. 단지 이런 일이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기 때문에 거의 느끼지 못할 뿐이다. 아이들이 멀어지는 것 같다는 서늘한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치는 순간도 있었지만, 나 역시 다른 부모들처럼 그런 생각을 얼른 머리에서 지워버리곤 했다. 나는 어쨌든 살아야만 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들의 그런 변화를 눈치채고서도 살아나갈 수 있단 말인가? - P52

나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 적은 없었다. 내가 슬픔을 느낀 것은 오래전 그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였다. 어쩌면 이런 말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누구한테 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나는 진실을 쓰기로 결심했다. 내가 일생 동안 거짓말을 하며 위해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다. - P52

희생자들이 평화로워 보이는 것으로 추정하건대 그들이 고통스러웠던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두뇌가 생각해낸 가장 인간적인 악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54

사실 지금도 나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나는 이미 나로부터 너무 멀어졌고 이를 느끼는 것도 버거운 지 모른다. - P57

내 이름을 어디에도 적어놓지 않았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 이름은 벌써 거의 잊히고 있다. 그렇게 앞으로도 잊힐 것이다. 아무도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이젠 이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P58

염려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나는 사람들 대부분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한지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런 편이 다행이다. 상상력은 사람을 과민하게 만들고 상처받기 쉽게, 무기력하게 만든다. 상상력은 퇴화의 증상일지도 모른다. 나는 상상력이 없는 사람을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을 부러워한 적이 많았다. 그들이 더 쉽고 편안한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 P59

룩스도 내가 오래 쳐다보면 시선을 돌린다. 나는 인간의 눈이 최면 작용을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람의 눈이 너무 크고 반짝거리기 때문에 동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접시만큼 큰 눈이 나를 바라본다면 나라도 싫을 것이다. - P67

전쟁 때 그런 상태를 겪어보고도, 사람이 채워지지 않는 육체적 열망에 끌려 다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나는 잊고 있었다. 햇감자를 거두었을 때 갑자기 그 무서운 식욕은 씻은 듯 사라졌다. 신선한 과일과 초콜릿, 아이스커피의 맛이 어땠는지도 서서히 잊기 시작했다. 갓 구운 빵 냄새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빵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가끔 빵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엄습하곤 한다. 평범한 검은 빵이 나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맛을 자랑하는 음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 P73

너무나 힘에 부친 나머지 내 상황을 똑똑히 헤아려 볼 여유도 없었다. 견뎌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나는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잊은 채 나는 그날그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 P75

산장으로 돌아가는 긴 길 위에서 나는 나의 지난 삶을 돌이켜보았다. 그러고는 모든 면에서 불만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했던 것 가운데 이룬 것은 거의 없었고, 내가 이루어놓은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얘기를 나누어본 일이 없다. 다른 사람들과 그런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언젠가 나에게 다시 주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순전히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 P82

어떤 것에 대한 삶이 몸 구석구석 까지 스민 뒤에야 그것을 정말로 안다고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손, 나의 발, 나의 내정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나에게는 그토록 비현실적인 것이다. - P83

숲은 한낮의 햇살에 안겨 있었고 왜송나무 쪽에서 훈훈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때 석남꽃이 피어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꽃들은 산등성이 위로 붉게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한낮이 달밤보다 훨씬 더 고요했다. 숲이 노란 태양 아래 노곤하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 한 마리가 푸른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룩스는 귀를 쫑긋거리며 잠이 들었고 거대한 적막이 나를 덮어버렸다. 나는 영원히 거기 앉아 있고 싶었다. 따스함 속에, 햇살 속에, 발밑에는 개가 잠들어 있 고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맴돌고 있는 그 한 가운데에. 걱정과 기억이 전부 다 사라진 것처럼 나는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발길을 떼어야 했을 때는 마음이 정말 무거웠다. 산장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서서히 이 숲속의 고요에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존재, 머릿속은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뒤죽박죽이며 무지막지한 신발로 나뭇가지를 밟고 피비린내 나는 살생을 불사하는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 P84

인간이 없는 곳에서 정확한 시간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다. 전에는 5분도 늦지 않고 약속 시간에 도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던가 생각날 때가 가끔 있다. 시계를 마치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태도가 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노예로 살고 있을 때는 규정들을 잘 따르면서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공적인 시간에, 째깍거리는 시계에 맞춰 사는 것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그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많았다. 나는 시계를 좋아한 적이 없다. 시계를 마련하면 모두 얼마 안 가서 망가지거나 없어졌다. 체계적인 시계 제거의 방법을 나는 자신에게까지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던 것인지 물론 다 알고 있다. 지금은 그만큼 생각할 시간도 많고, 나이를 먹으면 모르는 것이 없게 된다. - P87

그렇다, 차라리 나 혼자 지내는 편이 낫다. 나보다 힘이 약한 파트너와 함께 지내는 것도 좋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받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죽도록 키워가기만 할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런 모습이기도 하다. 이것은 숲에서 홀로 지내는 삶도 바꾸지 못한 것이다. 나를 참아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동물들뿐인지도 모른다. 후고와 루이제가 여기 남아 있었다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공동생활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P89

내가 지금 함께 있을 사람을 고를 수 있다면 현명하고 재미있어서 함께 웃음을 나눌 수 있는 할머니를 원할 것이다. 웃음은 지금도 너무나 그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라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고 나는 또다시 혼자 남게 된다. 그것은 할머니를 아예 모르고 지내던 것보다 더 힘들 것 같다. 웃음에 대한 대가 를 너무나 비싸게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죽은 뒤에는 계속 할머니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다. 지난 추억이라면 안 그래도 넘칠 지경인데 더는 싫다. 그러다 머리가 터져버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 P90

되돌아보면 나는 항상 그런 불안에 떨며 살았던 것 같다.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생명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앞으로도 불안의 고통을 떨치지는 못할 것이다. […] 하지만 이 무거운 짐에 대해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말해보았자 남자들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나와 똑같이 처신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차라리 옷이라든가, 친구들, 연극에 관해 떠들면서 웃어댄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근심들은 두 눈에 숨긴 채로. 우리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무언가를 사랑하는 능력 때문에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 P96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보잘것 없다. 그것은 아마 종이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외적인 자유는 이야기할 것도 없다. 내면이 자유로운 사람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이것이 치욕스럽다고,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부과된 짐을 지고 가다가 결국에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죽는다. 나는 명예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태어나고 죽는 일은 명예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그저 일어나는 일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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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을 느끼며, 그 빛이 지닌 까다로운 진실 중 하나를 다시금 포착하고 있다: 아무 색깔도 없는 얼어붙은 침묵. 거울이 지닌 그 격렬한 없음, 색의 없음을 재창조하기 위해선 먼저 그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마치 물이 지닌 그 격렬한 없음을, 맛의 없음을 재창조할 때처럼. - P129

아, 삶은 너무도 불편하다. 모든 게 죄어 온다: 몸은 요구하고, 정신은 멈추지 않는다. 삶이란 피곤한데 잠을 잘 수 없는 상태와 같다—삶은 성가시다. 당신은 몸과 정신 그 어느 것도 벗어 둔 채 걸어 다닐 수 없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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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대체로 매끄럽게 흘러갔다. - P12

평소라면 이쯤에서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겠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문득 누군들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일에 마음의 준비가 되기는 하는 걸까 싶었다. - P18

사빈은 페르메이르가 그린 여자들을 좋아 했지만 그의 눈에는 다들 게을러 보였다. 그 여자들은 절대 오지 않을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거나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건장해 보이는 여자조차도 달리 더 나은 일이 없다는 듯 한가롭게 우유를 따랐다. - P20

두 사람이 같이 보내는 시간은 다시 달콤해졌다. 첫 말다툼이라는 장애물을 넘었기에 평소보다 더 달콤했을지도 몰랐다. - P28

"난 이런 식일지 몰랐어, 그뿐이야." 카헐이 말했다. "그냥 당신이 여기 같이 있고, 같이 저녁을 먹고, 아침에 같이 일어난다고만 생각했지. 그냥 너무 현실적이라서 그래." - P35

카헐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진실에 불편할 정도로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 그녀가 입을 닥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헐은 농담을 해야겠다고,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이물질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은 채 그 순간이 지나가 버렸고,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여자가 사랑에서 빠져나올 때의 문제였다. 눈을 가리고 있던 낭만이라는 베일이 걷혀서 당신을 들여다보고 읽을 수 있게 된다. - P37

거실로 돌아온 카헐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역시나 정말로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없었다. 케이크를 마시다시피 먹고 샴페인을 느긋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마시다 보니 케이크와 샴페인이 다 떨어졌다. 겪어본 적 없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거의 끝나가는 하루를 지워주지는 않았다. 잠이라도 잤으면 좋았겠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 P43

카헐은 마음 한구석으로 아버지가 다른 남자였다면,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았다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 P44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웃기다고 할 만한 소리가 들렸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저녁을 태우고 사랑이 식은 여자는 덜 익은 요리를 내놓는다는 말이 있지 않았나? - P46

어딘가에서 읽은 끝에 관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쁘게 끝나지 않았다면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했다. - P48

오는 길에 두 번이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잠깐 눈을 붙였지만 섬에 들어오자 정신이 말똥말똥해지고 온전히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해변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칠흑 같이 까만 길까지도 생기가 가득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높고 든든한 산과 헐벗은 언덕, 그리고 저 아래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선명하고 기분 좋게 철썩이는 대서양의 존재를 느꼈다. - P53

돌아오는 길에 햇살이 너무 강렬해서 그녀는 집으로 곧장 가는 대신 남쪽으로 차를 돌려 집이 거의 없고 덤불도 하나 없는 애틀 랜틱 차도를 따라 차를 달렸다. 겨울에 이런 동네에 살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덤불을 꺾고 해변의 모래를 흩날리는 거센 바람, 안개와 가차 없는 비, 갈매기의 차가운 비명. 마침내 겨울이 끝나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할까. - P58

언젠가 그녀에게 같이 살자고 했던 별거 중인 남자와의 사랑이 식었던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가 떠올랐다. 그는 자기 기분을 반대로 말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말하면 진실이 되리라는 듯이, 또는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다는 듯이. - P64

그녀는 그동안 알았던 남자들을, 그녀에게 청혼을 해서 그때마다 승낙했지만 결국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애초에 청혼을 왜 받아들였을까 약간 의아했다. 그녀는 돌아누워서 집 주변 덤불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오늘 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여자에게 가끔 필요한 것, 즉 칭찬이었다. 뻔뻔스러운 거짓말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녀는 칭찬을 자기가 먼저 요구하는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 나이에 말이다. 아무 것도 배우질 못한 걸까? - P78

공기가 그녀의 폐를 찔렀다. 하늘에서 구름이 충돌했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구름을 보았다. 그녀의 기분에 걸맞게 세상이 거짓말 같고 터무니없는 빨간색으로 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85

"학교 다닐 때 수녀님이 지옥은 영원하다고 했어요." 그녀가 송어 껍질을 떼어내며 말했다. "우리가 영원이 얼마나 긴 시간이냐고 물었더니 수녀님이 말했죠. ‘지구상의 모든 모래를 생각해 봐. 모든 해변과 모래 채석장, 해저, 사막을 말이야. 그 모래가 전부 모래시계에 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렴. 거대한 요리용 타이머 같은 데 말이야. 일 년에 모래가 한 알씩 떨어진다고 했을 때 영원은 세상의 모든 모래가 모래시계 속에서 다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야. 생각해 봐요! 우린 모두 겁에 질렸죠. 아주 어렸거든요." - P97

낮의 빛이 다 빠졌다. 황혼이 하늘을 물들이고 대낮의 빛을 어둠으로 바꾸려고 꼬드겼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 동안 걸으면서 일요일의 고요함을 느끼고 얼음장 같은 바람 때문에 나무가 긴장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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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은 내향적이며 자아를 깊이 성찰한다. 사람들은 제비꽃이 겸손해서 숨는다고 말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제비꽃은 자신의 비밀을 포착하기 위해 숨어 있다. 그 거의—없는—향기는 억제된 영광인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찾아봐 달라고 요구한다. 제비꽃은 향기로 소리치지 않는다. 제비꽃은 말할 수 없는 가벼운 것들을 말한다. - P93

겁이 난다. 하지만 내 심장은 뛰고 있다. 이해를 허락지 않는 사랑이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한다. 단 하나 확실한 건 내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당신은 나라는 존재의 한 형태이고 나는 당신이라는 존재의 한 형태라는 것: 그것들이 내가 지닌 가능성의 한계다. - P108

나는 죽을 것 같은 기쁨 속에 있다. 달콤한 탈진 속에서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기다림이 있다. 기다림이란 미래에 대한 탐욕을 느끼는 일이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믿는 척하며 하루하루 즐거운 사랑 속에서 산다. 하지만 갈망을 안은 채 기억을 되새기는 건 다시 한번 작별을 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 P108

나는 생각을 넘어 하나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걸 말들로 쪼개는 일은 거부한다—표현할 수 없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은 것은 결국 내 비밀들 가운데 가장 은밀한 것이 된다. 나는 내가 생각을 쓰지 않는 순간들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건 순간적인 상태다. 도달하기 어려운, 완전히 은밀한, 생각을 빚어내는 말들을 더 이상 쓰지 않는 상태. 말들을 쓴다는 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아닐까? 해롭고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일이 아닐까?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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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게 되리란 걸 믿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차가운 신선함 속에서 보글거리고 있으니까. 매 순간이 있기에 내 삶은 아주 길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 직전인데 태어날 수는 없는 상태인 듯한 느낌 속에 있다.

나는 세상에서 고동치는 심장이다. - P56

나는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시간의 폭음을 듣는다. 그것은 소리 없이 형성되고 있는 세상의 소리다. 내가 그걸 들을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시간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있다‘, 그것이 세상이다.
시간 없는 세상. 이제 내 의식은 가벼워졌다. 그것은 공기다. 공기는 장소도 시간도 갖지 않는다. 공기는 모든 것이 존재할 비非장소이다. 내가 쓰고 있는 건 공기의 음악이다. 세상의 형성. 그것은 앞으로 천천히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이미 그랬던 대로 될 것이다. 미래는 앞에, 뒤에, 그리고 양옆에 있다. 미래는 늘 존재했던 것이고 늘 존재할 것이다. 시간이 없어진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쓰고 있는 건 독해가 아니라 존재하기를 위한 것이다. - P58

문득, 살기 위해 질서가 필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야 할 패턴은 없으며, 패턴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태어난다. - P59

나는 여전히 ‘그‘나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선보이는 건 ‘저것‘이다. 저것은 보편적인 법칙이다. 탄생과 죽음. 탄생. 죽음. 탄생, 그리고—세상의 호흡 같은 것. - P59

나는 내 알려지지 않은 부분 속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시 태어나면 ‘그‘ 혹은 ‘그녀‘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일단은, 지금 나를 지탱하는 건 ‘저것‘이며 그건 곧 ‘그것‘이다. 자신으로부터 하나의 존재를 창조해 내는 건 매우 중대한 일이다. 나는 자신을 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한다. 우리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완전한 어둠 속을 걷기. 그건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은 산고와도 같으니: 어떤 것이 태어난다. 그것 자체가. 그건 마른 돌멩이처럼 단단하다. 하지만 그 중심부는 부드럽고 살아 있는, 필멸하는, 위태로운 그것이다. 기초 물질의 생명. - P72

지금은 하나의 순간이다. 당신은 그걸 느끼는가? 나는 느낀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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