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을 향한 의지로 모든 것을 잊는 열정! 크든 작든 자기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다른 마법은 없다. - P75

침묵, 뚫을 수 없는 침묵, 끝없는 침묵, 끔찍한 침묵. 나는 그 침묵을 밤에도 낮에도 듣는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로 내 귀와 영혼을 가득 채운다. 그것은 어떤 소음보다 견디기 힘들고, 천둥보다, 사이렌의 울부짖음보다, 폭발음 보다 더 끔찍하다. 그것은 비명이나 흐느낌보다 더 신경을 찢고 더 슬프다. 수백만 사람이 이 침묵 속에서 억압받고 있음을 나는 매 순간 깨닫는다. 그것은 고독의 정적과 전혀 다르다. 산, 호수, 숲에 정적이 흐르면, 마치 풍경이 휴식하고 꿈꾸기 위해 숨을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정적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고 억압하는 이 침묵은 인위적이다. 강제, 명령, 강요된 위협적 침묵, 공포의 침묵이다. 거짓으로 직조된 거대한 장막 아래에서 나는 생매장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본다. 나는 이 침묵 뒤에서 재갈이 물리고 입이 틀어막힌 수백만 목소리의 굴욕과 분노를 인식하고 느낀다. 그들의 침묵이 내 귀를 찢고, 밤낮으로 내 영혼을 때린다. - P101

잔혹한 추적자들은 티끌 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히, 더욱 잔혹하게 고문한다. 라디오를 압수했다. 입을 틀어 막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귀까지 틀어막아 모든 희망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다. 밤이 되어서야 그들은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한다.
"언제 다시 말할 수 있게 될까요? 이 침묵의 고문은 언제 끝날까요?"
이는 이 세상에서 고안된 가장 잔인한 영혼 훼손이다. - P104

침묵, 그 끔찍한 침묵은 사람들의 모든 연락을 끊어놓았다. 계속 졸라봐야 소용없다. 한 사람이 전할 수 있는 소식은 유럽의 4분의 1을 집어삼킨 이 비참한 바다에서 그저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침묵이 삼켜버린 수많은 행복한 사람에 대해 알게 되면, 모두의 자부심이자 신앙이었던 한 세기의 발전과 과학, 예술, 위대한 발명품을 쓸데없는 잔혹함으로 더럽힌 무리는 나중에 자책하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 P105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가 이 모든 상황에서도 계속 독일어로 창작하고 글을 쓰는 것에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조국을 떠날 수는 있어도, 창작하고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와는 갈라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독일어로 나치의 자기 신격화에 맞서 줄곧 싸워왔고, 바로 이 독일어야 말로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 존엄을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범죄적 망상에 맞서 싸우는 데 쓸 수 있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입니다. - P115

우리는 밝은 대낮에 별을 보지 못하듯, 삶의 신성한 가치가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망각하고, 삶이 평온할 때는 삶의 가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몸과 숨을 분리할 수 없듯이 영혼과 자유를 분리할 수 없음을 인식 하기 위해, 먼저 어둠의 시간이, 아마도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 우리에게 닥쳐야 했습니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류가 인간의 영혼에 자유가 필수임을 지금처럼 명확히 인식한 적도 없었습니다. - P115

그러니 우리 함께합시다. 각자의 나라를 위해,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작품과 삶으로, 이 의무를 완수합시다. 이 어두운 시절에 우리가 자기 자신을 믿고 서로를 신뢰할 때만, 우리는 명예롭게 우리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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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안톤을 생각한다. 그토록 큰 도움을 내게 준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항상 고마운 마음이 든다. 때때로 사소하고 어리석은 돈 걱정이 들 때면, 나는 당장 단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지 않아 늘 여유롭고 태평하게 살 수 있는 이 남자를 떠올린다. 허름한 옷차림의 그를 여러 차례 보았다. 그는 늘 한결같이 쾌활하고 태평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 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호 신뢰의 비결을 배운다면, 경찰도 법원도 교도소도 돈도 필요 없을 거라고. 필요한 만큼만 대가를 받고 능력이 닿는 한 힘껏 돕는 이 청년처럼 모두가 산다면, 부조리가 반복되어 ‘사회문제‘가 되는 우리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도 어쩌면 해결될지 모른다. - P22

패배나 굴욕의 수치심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잘 알지만,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P33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은) 가장 기이한 현상은, 나를 비롯한 다른 수많은 개인의 삶은 거의 아무렇지 않게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극도로 힘든 시기였지만, 베를린이나 빈에서는 겉보기에 이렇다 할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돈의 실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기차는 붐볐고, 우편물은 제시간에 도착했고, 제빵사는 빵을 굽고, 농부는 땅을 일구고, 아이들이 잉태되고 태어났으며, 모두가 예전처럼 자신의 소명, 성향, 재능대로 살아갔다. 나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일했고, 어쩌면 심지어 그 어느 때보다 더 훌륭하게 집중해서 일했던 것 같다. - P41

우리는 비록 돈에 실패했지만, 삶의 용기와 기쁨을 잃지는 않았다. 오히려 돈의 가치가 떨어질 수록 삶의 오랜 가치(일, 사랑, 우정, 예술, 자연 등)가 더욱 중요해졌다. - P42

돈이 줄 수 있는 즐거움과 자극을 나는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모든 방문객에게 하듯이, 나는 돈에도 모든 문을 활짝 열어둔다. 하지만 돈은 방문객 그 이상은 아니다. 나는 돈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지울 수 없는 교훈을 배웠다.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 - P44

이 시대의 우리는 쏟아지는 이 모든 사건을 매일, 매시간 주의를 기울여 따라갈 여력과 참여의식을 충분히 가졌을까? 솔직하게 자문해 본다면,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끊임없이 닥치는 높은 긴장에 대처할 여력이 없고, 우리는 그저 이따금 좌절과 절망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볼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54

자기 시대에 진정으로 관심을 두고 참여하고 동시대 사람의 공포와 괴로움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대다수 사람이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부당한 비난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평범하지 않은 모든 사건에 관심을 둘 의향이 매우 강하고, 그것에 몰두하고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소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두 더 강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자연법칙은 우리의 참여 의지와 공감 능력을 현명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제한한다. 강한 흥분이 연속되면 필연적으로 피로가 누적되고, 너무 오래 계속 되는 과도한 긴장은 일종의 마비를 일으킨다. - P55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킬로스는 극의 길이를 두 시간, 길어야 세 시간으로 제한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비극이 한없이 길어지면, 그것에 몰두하는 능력이 오히려 감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이 숙명적 비율을 체감하고 있다. 세계의 극이 길어질수록 장면은 점점 더 끔찍해지고, 사건이 자극적일수록 그것을 진심으로 연민하는 능력이 더욱 줄어든다.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마음을 파괴하고, 시대가 우리에게 연민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우리의 지친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더 줄어든다. - P56

전쟁 첫해 말에 우리가 더는 전쟁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우리가 비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작은 심장 하나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아서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역사적 시대‘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고, 우리의 마음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에서 잠시 떠나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면, 이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선한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 P56

세계의 재앙이 길어질수록 고통과 연민 사이의 비례 관계가 점점 깨졌다. 전쟁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지금, 수천 명의 죽음에서 느끼는 감정은 이전에 수백 명의 죽음에서 느꼈던 감정보다 훨씬 약해졌다. 신문 보도는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뇌에만 도달할 뿐, 피로한 상상력과 과로에 지친 피곤한 심장에는 닿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깊이 괴로워하는지 자문하면, 목숨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공감 능력까지 죽이는 이 엄청난 고통의 시대에, 모든 일에 연민을 느낄 여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것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 P58

자연은 어떤 중단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연은 사람들 일부가 무참히 파괴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끈기 있게 인내하며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길 요구한다. 우리가 때때로 시대에 무관심해 보인다면, 그것은 자기 피조물의 고통에 무관심한 자연의 잘못이다. 그리고 무너져가는 세계의 폐허를 계속 노려보는 대신 더 나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명령에 순종하게 된다. - P60

크든 작든 어떤 작업이든, 수행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너무 자주 수백 가지 사소한 일에 분산되고 쪼개지는 의지를 진정으로 원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영혼의 결단이 있어야만, 오직 그런 결단력으로만 진정으로 일할 수 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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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소년이 배트맨과 함께 아침을 준비하고 있어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게요. - P129

소년과 배트맨이 있는 풍경에 나는 점점 익숙해져 가요. 하지만 이 풍경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한 가지 마음만 품기에도 버거운데 왜 여러 가지 마음을 동시에 품게 되는 걸까요. 소년이 영원히 이곳에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과, 소년이 더 좋은 곳으로 갔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해요. - P130

피란 행렬을 따라갔을 때 폭격으로 껍데기만 남은 버스를 색칠하고 있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어요. 이미 망가진 버스를 왜 칠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 알겠어요. 그 아이들은 잿빛을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예요. 숨이 막히는 잿빛을. - P140

이제 바람이 불면 우리는 넷 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요. 쓸모없어진 물건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작은 소리를 들으려고요.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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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나는 어른이 되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익숙해지는 것뿐이었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무뎌지는 것뿐이었다. - P92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슬픔을 안고 있어요. 그 사실이 나를 버티게 해요. 가끔은 슬픔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그만 잠겨 버리고 말 것 같을 때, 내 옆에 나처럼 턱밑까지 차오른 슬픔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헤엄쳐 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아, 아직 괜찮구나, 하고 따라서 헤엄을 쳐요. 헤엄치는 나를 보고 또 다른 누군가 역시 헤엄을 치겠지요.
우리는 이렇게 시커먼 슬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지어 헤엄을 치고 있어요. 나를 위해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요. - P104

원래 그랬잖아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이렇게 웃었죠. 왜 웃었는지 설명을 하려고 하면 하나도 웃기지 않은데, 그때는 눈물이 나도록 웃기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요. 나는 그렇게 웃어 버렸어요. - P120

아침을 먹으면서 말할 상대가 있으니 좋아요. 날씨라든가, 뜰에서 본 신기하게 생긴 벌레라든가, 헐거운 문고리라든가, 세상의 심각한 일들이 아니라 그냥 사는 얘기들이 오가요. 그래서 나는 소년과 아침 먹는 시간을 기다려요. 눈을 뜨고 일어나 아침을 먹을 때까지는, 예전처럼 사는 것 같다는 착각도 들어요.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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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까 봐 아무 인사도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거짓말처럼 저 올리브나무가 연두색 손을 뻗어 인사를 건넸다고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다음 날도. 그 인사 한마디에 또 내일이 오더라고요. - P73

비누가 다 굳을 때까지 이틀 정도가 걸릴 거래요. 그때까지 만지지 말고 참고 기다려야 한대요. 비누 만들기의 핵심은 인내심이라고요. 오래 말릴수록 더 좋은 비누가 된대요. - P79

우리는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들을 오래도록, 시간을 들여 바라봤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요. - P81

그들은 오래 머물고 싶어도 두려움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요. 신속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소중한 것들을 잃은 사람들은 더 빠르게, 더 민첩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그게 죄책감이라는 걸 난 너무 잘 알아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요.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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